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41화 (41/254)

바오 양조장 (2)

쓰러진 요정은 모두 다섯.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외형은 오저당의 요정과 같았다.

하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기에 혹시라도 죽은 게 아닌가 걱정되었다.

향이도 울먹이는 표정으로 주변을 맴돌았다.

“오! 움직였다.”

다행히 죽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미세하게나마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걸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한동안 쪼그려 앉아서 요정을 살피고 있자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소정우 주무관님과 함께 중년의 남성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체형과 키는 주무관님과 흡사했고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는 모습 때문인지 조금 위험하다는 느낌이 살짝 풍겼다.

“거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개미를 보고 있었습니다.”

“취미가 독특하시네요.”

“그런데 누구시죠?”

“이분이 바오 양조장을 운영하시는 조택훈 사장님이십니다.”

대답은 소정우가 대신했다.

슈퍼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조택훈의 손에는 소주병이 가득 담긴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대낮부터 술을 거하게 드실 계획이었던 것 같았다.

“오늘 예약해놨는데 찾아가는 양조장 체험 프로그램은 안 하시는 겁니까?”

“미리 연락을 드리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혹시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보통 때라면 묻지 않았을 거다.

그냥 헛걸음을 한 셈 치고 돌아갔겠지.

굳이 말을 섞어봤자 기분만 잡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빈사 상태의 요정을 보니 도저히 그냥 떠날 수 없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아야 했다.

원인을 알아야 대비를 하지.

오저당에 있는 수많은 요정과 향이가 이런 험한 꼴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요정의 생사에 우리 오저당 식구의 생계도 달려 있었다.

“바오 양조장은 망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죠?”

“작년에 청주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신 후로 제법 매출이 오르셨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요?”

“분명히 그랬었죠.”

조택훈은 잠시 하늘을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땅이 꺼질 듯이 한탄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이해가 되는 반응이었다.

“바오 양조장에서 술을 빚을 때 사용하던 지하수가 갑자기 변했어요.”

“물이요?”

“네, 그게 변하니 아무리 정성껏 술을 빚어도 예전 같은 맛이 나오질 않아요.”

“저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이건 누가 와도 해결할 수 없었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쓰고 숙련된 장인이 술을 빚는다고 하더라도 수질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혹시 원인이 뭔지 찾아보셨습니까?”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으니 미칠 노릇이죠. 근처에 공장이 몇 곳 생겼는데 그곳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제가 사비까지 들여가며 수차례 수질 검사를 해봤는데 아무것도 안 나와요.”“일단 한 잔 받으시죠.”

나는 소주병을 따서 잔을 따랐다.

내가 사 온 것은 아니었으나 술 없이 이야기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당연히 나는 운전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기에 소정우가 나서서 조택훈의 술 상대를 해줬다.

그렇게 두어 차례 술잔이 돌자,

조택훈은 하소연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작년에 수상한 이후부터 바오 양조장은 제법 잘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핑크빛 미래를 꿈꾸며 설비를 들여놨다고 했다.

그때 빚진 은행 빚만 3억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큰 금액이었다.

양조장 설비에 그 정도 돈이 들어가는 게 조금 의아했으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혀 돈이 아깝지 않을 수준으로 만들어놨다.

바오 양조장은 청주의 대량 생산을 위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국내에 그런 설비가 있었나요?”

나도 꽤 여러 방면으로 알아봤다.

벽향주의 대량 생산은 항상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막상 자동화가 가능한 범위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주조 산업이 큰 편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설비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없었다.

“제가 기계 설비 쪽에서 일한 세월이 20년이 넘어갑니다. 그때 배운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서 직접 설계한 겁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설비네요.”

“그러면 뭐합니까. 이제 남은 거라고는 은행 빚밖에 없는 걸요.”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 못 했겠지.

나한테 비슷한 일이 생겼어도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지하수는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괜히 옛 조상이 우물을 신성시하고 신앙으로 발전시켰던 게 아니었다.

“그래서 폐업을 하실 생각입니까?”

“방법이 없어요. 다른 곳으로 이전하자니 돈이 부족하고 당장 이번 달에 이자를 낼 여력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물이 좋은 지역을 찾아내서 땅을 확보한 후에 건물을 짓거나 사들여야만 한다.

거기에 설비를 옮기는 비용도 생각해야 하기에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간다.

만약에 그렇게 돈을 썼는데 다시 문제가 생기면 그때는 정말 인생 끝장나는 거다.

“지금으로서는 설비라도 어느 정도 제값을 받고 팔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안타깝네요. 개인적으로 바오에서 만드는 영귀주를 꽤 좋아했거든요.”

소정우는 무척 안타까워했다.

나도 이곳에서 빚는 영귀주를 마셔본 터라 아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곳 영귀미면의 이름을 딴 영귀주는 대상은 못 받았으나 최우수상을 받았을 정도로 꽤 괜찮은 술이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길 사들일까?’

양조장 전체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술도 빚지 못하는 곳을 살 이유가 없다.

더구나 오저당과 거리가 상당한 탓에 관리도 불가능한 곳이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설비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청주 제조에 특화된 설비.

그리고 영귀주의 상표권과 제조법.

그렇게 두 가지는 상당히 구미가 당겼다.

생각보다 저렴하게 설비를 추가하고 라인업을 늘릴 기회였다.

마침 마을 입구에 협동조합이 사용하던 100평 정도 되는 창고를 10년간 장기 임대하기로 계약을 마쳤다.

원래는 오크통 보관을 위한 용도였으나 거길 이용하면 될 것 같았다.

더구나 벽향주와 같은 청주라 적응하는 기간도 그리 길게 잡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과정은 비슷할 것이고 핵심 노하우만 가져와도 우리 실력을 업그레이드할 기회였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할까.

무엇보다 가격이 가장 큰 문제다.

우리가 매달 버는 돈이 적지 않으나 빚을 갚느라 여유 자금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참고로 허머는 리스로 뽑은 거라 그리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지금 상황으로서는 폐업하는 수밖에 없죠. 거의 한 달 동안 온갖 노력은 다했지만, 방법이 없으니까요.”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이미 예전에 빚어서 숙성시키던 술까지 모두 나갔어요. 저장고가 텅 비었는데 술을 빚지 못하니 접어야죠.”

“그럼 제가 2억에 이곳의 설비 전부를 사겠습니다. 파실 생각 있으십니까?”

3억이나 들인 설비다.

그걸 2억에 사겠다고 말하자,

조택훈은 말이 되냐는 듯이 바라봤다.

하지만 1년 가까이 사용했으니 중고 맞잖아. 그리고 내가 아니면 이렇게 비싼 설비를 사갈 사람이 과연 있을까?

어지간해서는 임자를 찾을 수 없다.

새로 양조장을 창업하는 사람이거나 우리처럼 사업을 확장하려는 곳이 전부일 텐데 그런 조건에 맞는 이는 전국을 뒤져봐도 거의 없었다.

솔직히 2억도 많이 쳐준 거다.

조택훈에게는 시간이 많이 없었다.

이미 그가 털어놨듯이 은행에 빌린 돈도 제대로 상환하기 힘든 지경이지 않은가.

정상적으로 상환되지 않으면 압류당해서 담보로 잡힌 양조장 전체가 경매로 넘어가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어차피 이제 술을 빚는 것은 불가능한 터라 조택훈으로서는 어떻게든 최악의 순간이 오기 전에 정리해야 했다.

“둘 중에 어느 쪽이 덜 손해겠어요?”

“빌어먹을! 내 노후를 모두 여기에 걸었는데 이게 도대체··· 그러고 보니 이 양반은 공무원이라고 들었는데 그쪽은 누구길래 설비를 사가겠다는 겁니까?”

“아! 제 소개를 아직 하지 않았군요. 저는 삼척에 있는 오저당이란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는 주도찬이라고 합니다.”

품에서 명함을 꺼내서 건네자,

조택훈은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저당 이야기는 요즘 정말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풍주가 정말 인상 깊었는데 이렇게 뵙는군요.”

“부디 좋은 소문이었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벌써 삼척까지 우리가 망했다는 소문이 나서 이렇게 오신 겁니까?”

“사장님. 그건 절대 아닙니다.”

소정우는 손사래를 치며 괜한 오해는 말라며 조택훈에게 설명을 했다.

더구나 우리가 예약한 것은 바오 양조장에 문제가 생기기 이전이었다.

“오저당이 올해 찾아가는 양조장에 선정돼서 다른 양조장은 어떻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지 견학 온 겁니다.”

“제가 조금 예민했나 봅니다. 하지만 그쪽도 내 입장이 되면 마찬가질 겁니다.”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날 정도더군요.”

“좋습니다. 설비는 2억에 넘기죠. 그런데 설비 이전하는 게 쉽진 않을 겁니다.”

“그것까지 해주셔야죠.”

내 조건은 설비 이전 포함이었다.

조택훈은 그건 너무 과하다며 난감해 했다. 하지만 그다음에 꺼낸 내 말을 듣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대신 오저당으로 오고 싶다는 직원이 있다면 고용 승계하겠습니다. 그리고 영귀주에 대한 상표권과 제조법을 넘기시면 2천만 원을 추가로 드리죠.”

모두 합치면 2억 2천만 원.

거기서 설비 이전 비용을 제외하더라도 조택훈에게는 2억 정도는 남게 된다.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계산을 해보던 그는 내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하죠. 방법이 없네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사장님이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또 뭘 원하시는 겁니까?”

“계약서 쓰기 전에 이곳의 설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은 해봐야죠.”

말만 믿고 계약할 수는 없다.

그것도 오늘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다.

적어도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은 해야지 않겠냐는 말에 조택훈은 곧장 최소 주조 단위인 500리터를 시연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물을 탱크에 채워주고 재료인 쌀가루 등을 설비에 채워 넣는 것이 전부였다. 그 상태로 전원을 켜니 설비가 죽을 쒀주었는데 섬세하게 비율 조절도 가능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밑 재료는 숙성용 저장고에 들어가게 되고 숙성을 마친 쪽의 밸브를 열면 포장 설비로 이동된다.

반대편을 살펴보니 공병 살균과 충진 등이 모두 자동화되어 있었다.

‘이거 내가 꿈꾸던 그런 설비잖아.’

벽향주의 대중화.

그건 내가 꿈꾸는 미래였다.

하지만 그 전에 이뤄야 할 과제가 대량 생산인데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했다.

대신 자동화 설비를 사용하면 더는 일반 벽향주를 옹기에 숙성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동화한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대형 저장고에서 옹기로 술을 옮겨서 숙성한 후에 다시 저장고로 옮겨 담아야 병입이 가능한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불필요한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옹기가 아니더라도 저장고에서도 벽향주의 숙성은 가능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요정만 잘 배치하면 가능했다.

이미 양조장에 있는 오풍주 설비를 통해 시험을 해봤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숙성 기간을 조금 더 잡아야 하고 술맛도 아주 살짝 기존보다 떨어진다는 단점도 분명히 있었다.

그 문제도 해결 가능했다.

그만큼 가격을 낮추면 되는 일이잖아.

이미 리뉴얼도 예정되어 있었기에 그걸 기회로 삼으면 된다. 가격이 낮아지면 심리적인 저항감도 낮아지겠지.

다른 방법도 있었다.

가격은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현재 500ml인 용량을 750ml로 올리는 것도 한 가지의 방법이었다. 뭐 이건 나중에 모두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지.

지금 여기서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직접 보시니 어떻습니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드네요.”

“그럼 조금 더···.”

“그렇다고 더 올려드릴 생각은 없으니 지금 하시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젊은 분이 참 야무지네요.”

“저도 사장님과 마찬가지로 책임져야 할 식구가 있으니까요.”

그에 따른 책임감도 꽤 컸다.

누군가의 생계와 미래를 책임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깨가 무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뭔가를 결정할 때마다 몇 번이나 심사숙고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이제 계약서 쓰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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