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44화 (44/254)

리뉴얼 (2)

끌루소의 주문을 받은 뒤.

우리는 출고 일정을 바꿔야 했다.

두 달 동안 만 병을 보내야 하는데 이미 어느 정도 일정을 다 짜놨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현송과 태백 등의 주류 상사 물량 중의 일부를 해외로 돌려야만 했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장님은 상황을 이해해주었다. 특히 가장 많은 물량을 핸들링하고 있는 현송의 도진학 사장님이 많은 편의를 봐주셨다. 현송은 단순한 거래처의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됐다.

우리 술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권택경 대리와 현송의 직원들은 거의 오저당의 영업 부서처럼 움직였다.

다른 주류 상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행사를 진행한 덕분에 서울과 경기 북부 일대는 오저당의 술이 제법 깔렸다.

당연히 우리도 그만큼 보답을 해줘야 했기에 항상 현송은 다른 주류 상사보다 훨씬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지방에서 작은 규모로 주류 상사를 하는 이들은 오저당이 아니라 현송에서 술을 받아서 가져갈 정도였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 우리가 남도 아니고 그 정도 배려는 해줘야지.]

“고맙습니다. 대신 오풍주는 다음 달에 조금 더 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안 그래도 요즘 날이 풀려서 그런지 오풍주 찾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아.]

오저당이 빚는 오풍주도 막걸리다.

날씨 영향을 꽤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비가 자주 올수록 판매량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막연하게 추측하는 게 아니라 주류 상사의 통계에서도 나오는 결과다.

장마철이 되면 오풍주의 판매량도 상당히 늘어날 것이다.

“요즘 벽향주 반응은 어때요?”

[올 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팔리고 있어. 업주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가격이 가장 큰 걸림돌이야.]

“저번에 이야기 드린 대로 가격 인하를 진행하면 조금 나아질까요?”

[맛만 크게 변하지 않는다면야 소비자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지. 그런데 정말 3천 원이나 내릴 생각이야? 그렇게 팔아도 남아?]

“당연하죠.”

잠시 순수익은 줄어들 수 있지만,

판매량이 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일단은 더 많은 대중에게 우리의 이름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직 오저당은 규모나 인지도 모두 마이너한 존재인 것이 현실이었다.

도진학 사장님과 제법 긴 통화를 마친 뒤에 내가 향한 곳은 양조장 내부였다.

그곳에는 수많은 요정들이 있었으나 내 관심은 오직 바오 양조장에서 데려온 요정들의 상태에 쏠려 있었다.

그건 향이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요즘 내 주변보다 그 아이들 곁을 지키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처음 이틀 정도는 정신을 못 차렸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기력을 되찾고 있는 중이라 다행이었다.

‘그래도 많이 좋아졌네.’

어제부터는 다른 요정들과 어울려서 천천히 날아다니고 있을 정도였다.

회복 과정에서 가장 큰 효과를 보인 것은 역시 술이다. 장기 숙성 중인 벽향주는 요정들에게 거의 특효약 수준이었다.

아! 맞다.

최근에 한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다.

바오 양조장처럼 다른 양조장에도 요정이 있지 않을까 궁금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시간을 내서 강원도에 있는 몇 곳의 양조장을 찾아가 봤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한 마리의 요정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전국의 양조장을 다 뒤져본 것은 아니라 성급하게 결론을 낼 수는 없었다.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잖아.”

그때 등 뒤에서 수호가 다가왔다.

옆에는 라니도 함께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었다.

내가 라니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저 신호는 뭔가 좋은 일이 있다는 의미다.

“나를 왜 찾았는데?”

“방금 끌루소에서 연락이 왔어.”

“벽향주 발주량이 더 늘어난 거면 조금 곤란한데. 조금 전까지 사장님들한테 전화해서 어렵게 양해를 구했단 말이야.”

“노노, 그런 내용은 아니야.”

그에 대한 대답은 라니가 했다.

요즘 끌루소와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은 라니가 대부분 맡고 있는 중이었다.

오저당에서 영어가 가능한 것은 나와 호세 그리고 라니가 전부였다.

호세는 생산에 특화된 인력이라 나를 제외하면 라니 밖에 적임자가 없었다.

그리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끌루소에서 연락이 자주 오진 않는다.

이번에 연락 온 것도 거의 한 달 만의 일이었다.

“설마 내년에 출시할 수출 전용 벽향주를 선주문이라도 하겠대?”

“와··· 그걸 찍어서 맞추네.”

“발주가 아니면 그것밖에 더 있겠어?”

“그렇기는 하지. 끌루소에서 50만 유로 규모의 선주문이 들어왔는데 선금은 그 절반인 25만 유로로 책정했어.”

라니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말했다.

확실히 대기업 출신이라 그런가 몇억 단위는 그리 감흥이 없어 보였다.

하긴 옥토퍼스에서 이 녀석이 디자인한 제품의 연간 매출이 20억 이상이었다고 들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매달 15억이 넘는 매출을 찍고 있었고 현송과 매달 거래하는 금액만 7억 가까이 된다. 그러니 7억에 불과한 단발성 거래에 쩔쩔맬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감흥이 아예 없진 않았다.

유럽에서 벽향주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이야기였고 올 초에 세웠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것 봐. 내가 된다고 했지?”

“네가 말한 대로 선주문을 결국 넣었네.”

“독점의 유혹은 생각보다 달콤하거든.”

“그런데 내년 여름에 3만 병이나 출하하려면 오크통이 몇 개 필요한 거야?”

“225리터 오크통을 기준으로 놓고 계산하면 최소 66.6개 이상이 필요하지.”

암산으로 계산해서 말해주자,

수호와 라니는 이상하게 바라봤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눈빛이었다.

뭐야 다들 이 정도는 가능한 거 아녔어?

하긴 얘네 둘 다 숫자에 약한 편이었다.

“어휴··· 오크통 가격도 장난 아니던데 그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들어가는 거야?”

“예전에 계산해 보니 국내산이면 8천만 원 정도이고 외국에서 만든 거면 최소 1억 2천만 원 정도는 할 거야.”

“헐!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오크통도 꽤 있으니 그보단 적게 나오겠지.”

“초반에 투자해야 하는 돈을 생각하면 벽향주를 1년 동안 숙성해서 팔아도 남는 게 거의 없겠다.”

수호의 계산이 틀리진 않았다.

올해부터 내년까지 1년 동안 숙성해서 남길 수 있는 예상 수익과 오크통에 투자해야 하는 돈은 거의 엇비슷했다.

하지만 내 계획은 조금 달랐다.

“그건 내가 생각해 놓은 게 있으니 걱정하지 마.”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나는 허머를 끌고 무주로 향했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고속도로 없이 국도로만 가다 보니 오저당에서 무려 4시간이나 걸렸다.

오죽하면 운전이 피곤해서 쉬는 게 아니라 허머가 중간에 퍼질까 봐 잠시 멈춰서 충전을 해야 할 정도였다.

“수호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솔직히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녀석이라도 있으면 운전이라도 교대했을 텐데 하필이면 오늘은 오풍주를 빚는 날이라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무주에 있는 제법 큰 와이너리였다.

그것도 동굴 안에 있었다.

이런 곳은 처음 와보는 터라 신기했다.

서늘한 냉기 때문인지 냉장고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한동안 입구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중년이라고 하기에는 젊고 어리다고 하기에는 성숙한 여성이 다가왔다.

“주 사장, 왔으면 전화를 하지.”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우숙희 사장님.”

“술도가의 일상이야 뻔하지. 술을 빚고 팔고의 반복 아니겠어.”

“그런데 생각보다 내부가 서늘하네요.”

“아직은 따뜻한 편이야. 여름이 되면 더 시원해지거든. 그게 이곳에 와이너리 창고를 만든 이유 아니겠어.”

와인을 이런 동굴이나 터널 안에서 보관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사시사철 온도가 크게 요동치지 않을뿐더러 습도가 높아서 증발하는 양이 줄어들게 된다.

물론, 내가 아는 지식은 그게 끝이다.

와인의 세계는 워낙 깊고 넓기에 어디 가서 아는 척을 하기 어려운 분야다.

솔직히 여러 종류의 술 중에서도 와인은 나의 관심 분야가 아니었다. 국내 환경이 와인을 빚기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품평회 수상식 하던 날 마지막으로 보고 그 이후로 못 봤으니 거의 석 달 만이네.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아.”

백련 와인의 우숙희 사장.

그녀와의 인연은 품평회에서 시작됐다.

당시에 수상자 중의 한 명이었던 우숙희 사장은 나처럼 20대에 와이너리를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호감을 보여줬다.

이쪽 바닥은 고인물이 많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이 쉽진 않았다.

텃세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쉽게 그들의 무리 속에 끼워주진 않았다.

우숙희 사장 역시 온갖 편견과 이유 없는 견제를 받아 가며 지금까지 왔다는 평가를 많이 받고 있었다.

“과실주에서 대상을 받은 뒤로 백련 와인 엄청나게 잘 나간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래서 더 바쁘셨던 거는 아니고요?”

“너희만 할까. 요즘 주당들 돈을 쓸어 담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해. 홍천에 있는 바오 양조장도 인수했다던데 사실이야?”

“와··· 그건 또 어떻게 들으신 거예요?”

역시 이쪽 바닥은 너무 좁아.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인수가 아닌 중고로 설비를 사들인 거라고 내용을 정정했다.

“영귀주도 가져가고 거기 조 사장도 직원으로 고용했으면 인수 맞잖아.”

“뭐 그렇다고 치죠.”

“물이 맛이 가서 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오저당 입장에선 운이 좋았네. 조 사장이 은근히 실력자야.”

“그러니까 제가 모셔간 거죠. 안에 구경 좀 해봐도 될까요? 제가 국내 와이너리는 물론이고 동굴 저장고도 처음 와보는 거라 궁금해서요.”

우숙희는 흔쾌히 허락해줬다.

어차피 이곳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어 관광객도 제법 많이 찾아오고 있었다.

마련된 테이블에서 와인도 팔았는데 서늘한 동굴인 탓에 여름철에도 에어컨이 필요 없다고 했다.

그녀를 따라 안 쪽으로 향하자,

커다란 오크통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우리가 쓰는 225리터 크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그보다 조금 더 큰 300리터 용량인 코냑 타입도 은근히 많았다.

한동안 내부를 둘러본 뒤.

다시 입구 쪽의 테이블에 앉으니 우숙희 사장은 두 개의 잔에 와인을 따라왔다.

운전 때문에 술은 안 된다고 하니 그녀는 걱정 말라며 웃었다.

“와인이 아니라 포도 주스야. 내가 직접 만든 거라 시중의 거랑은 다를 거야.”

“하하. 잘 마시겠습니다.”

“가기 전에 와인 좀 챙겨줄 테니 가져가.”

공짜 술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대신 나도 오저당의 술을 건네드렸다.

맨손으로 올 수 없어서 오풍주와 벽향주 몇 병을 챙겨왔다. 쇼핑백에 담긴 술을 본 우숙희는 환하게 웃었다.

“이야··· 이걸 다시 맛볼 수 있다니! 무주에도 좀 유통해주면 안 되니?”

“아직은 생산량이 넉넉하지 않아서 대도시 위주로 공급하는 것도 힘들어요.”

“그나저나 이제 슬슬 여기 온 이유를 말해주지. 궁금해서 더는 못 참겠네.”

“백련 와인이 보유한 오크통 중에 오래된 것들은 저희 오저당에게 넘기시죠.”

나는 그쯤에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바쁜 사람의 시간을 빼앗을 수 없었다.

내 말을 들은 우숙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내게 되물었다.

“오크통은 왜 필요한데? 벽향주는 옹기로 숙성하는 술이잖아.”

“오크통에 추가 숙성하려고요.”

“지금도 만드는 족족 팔려나간다고 들었는데 추가로 숙성한다고?”

“해외로 수출할 용도에요.”

그쯤에서 끌루소 이야기를 해주었다.

벽향주가 유럽에서 팔리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우숙희는 큰 관심을 보였다.

다른 술도 크게 다를 바가 없으나 국제 시장에서 국내산 와인은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였다.

“스카치 위스키를 만드는 증류소처럼 오래된 오크통을 찾는 거구나?”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뫼리스가 말한 대로 착향과 착색되지 않게 숙성하는 방향으로 갈 예정이다.

참고로 스카치 위스키 증류소는 새 오크통을 쓰지 않는다.

조금 더 부드러운 맛을 내기 위해서 쉐리 와인과 버번 위스키를 만드는 증류소에서 긴 시간 사용한 오크통을 사들인다.

심지어 50년이 넘어간 오크통을 사용하는 곳도 있을 정도라고 했다.

우리가 찾는 것이 바로 그런 조금 오래된 오크통이었다. 하지만 우숙희 사장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부터 했다.

“와이너리의 오크통은 거의 60년 가까이 사용하는 거 알아?”

“이야기 듣기는 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게 20년도 안 된 것인데 넘겨줘야 할 이유가 있을까?”

“반대로 생각하면 이번 기회에 우 사장님이 새로 만들고 계신 셰리 와인을 조금 더 성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거야?”

지난번에 품평회 당시에 우연히 듣게 된 것이 있었다. 우숙희 사장이 새롭게 셰리 와인을 개발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부분이 무척 중요한 것이 브랜디를 첨가해서 주정 강화하는 셰리 와인은 일반 와인과 달리 새 오크통을 써야 한다.

나는 그 부분을 강조했다.

“구매하셨던 가격의 40%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새 오크통을 놓으시려면 기존에 사용하시던 오크통 일부는 빼셔야 하잖아요.”

국내에서 오크통을 사용하는 곳이 과연 얼마나 될까. 착향도 안 되는 오래된 오크통을 활용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같은 와이너리끼리 거래하는 방법도 있으나 우리나라 와이너리의 숫자는 50여 곳에 불과하고 규모도 작은 편이다.

“흐음, 40%라···.”

“나중에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뭐든 돕겠습니다.”

“순진하게 그런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거래에서 나중은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적어도 50%는 줘야 넘기지.”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다행히 헛걸음하진 않은 것 같았다.

오크통은 나한테 맡겨 놓으라고 수호와 라니에게 큰소리를 쳐놨기 때문에 반드시 성사시켜서 돌아가야만 했다.

50% 가격으로 사들인다면 새 오크통을 사는 것보다 몇천만 원은 아끼는 거다.

무엇보다 오크통을 길들이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는 게 핵심이었다.

협상이 마무리되자 우숙희 사장은 오크통이 몇 개나 필요하냐며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최대한 많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