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뉴얼 (3)
4월 중순으로 넘어갈 무렵.
백련 와인에서 보낸 오크통이 왔다.
대형 화물차에 실린 오크통은 곧장 숙성 창고와 새로 임대한 창고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진 않았다.
“와··· 더럽게 무겁다.”
“그러게요. 우리가 쓰던 거랑 크기는 같은데 훨씬 더 무거운 느낌인데요.”
“며칠 전까지 와인이 담겨 있던 거잖아. 아직 수분을 가득 머금고 있으니 그렇게 느껴지는 게 정상이지.”
그래도 호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게차 모는 실력이 나날이 늘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50kg이 넘어가는 오크통을 들어서 옮길 필요는 없었다.
호세가 부지런히 옮기는 사이에 수호는 트럭에 실려 있는 오크통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쉰두 개네.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앞으로 이것만 채우면 되는 거야?”
“아니, 조금 더 구해야지. 선주문에 맞춰서 생산하면 나중에 부족할 거야.”
“그러면 다른 와이너리도 돌아보려고?”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백련 와인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다른 곳은 아마 씨알도 안 먹힐 거다.
그리고 백련 와인만큼 큰 규모를 가진 곳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나머지는 새로 사는 수밖에 없어.”
“그래도 네가 무주에 다녀온 덕분에 거의 5천만 원 가까이 세이브해서 다행이야.”
“그런 일은 내게 맡기고 너는 앞으로 벽향주랑 오풍주만 잘 빚어서 채워줘.”
“언제부터 빚을 거야?”
“내일, 하루라도 빠르면 더 좋잖아.”
지금 당장 빚어도 내년 5월까지 손도 대지 못하고 기다려야 한다. 나머지 잔금을 받으려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소의 수호라면 곧장 알겠다며 일정을 받아들였을 텐데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일부터 빚으면 안 되는 거야?”
“너 내일이 무슨 날인지 잊었냐?”
“작은할아버지 기일은 벌써 지나갔으니 아닐 테고, 내 생일은 아직 멀었는데?”
“이 자식아! 창립 기념일이잖아.”
아아! 맞다.
내일이 창립 기념일이었지.
작은할아버지가 계셨을 당시의 창립일은 알 수 없으나 내일이 되면 우리가 이곳에 온 지 정확하게 1년째가 되는 날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을 창립 기념일로 정했다.
당연히 그날은 쉬기로 했다.
대부분의 직원은 숙소에서 쉬기로 한 것 같은데 아직 한국에 대한 궁금증이 많은 고라니는 봄나들이를 계획 중이었다.
혼자 어디 내놓기 불안했으나 그래도 호세와 몇 명이 따라간다니 다행이었다.
요즘 호세는 라니의 껌딱지가 됐다.
여자로 보는 것 같지는 않고 현실 남매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라니는 아직 한국에 적응 중이라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날짜 감각이 완전히 사라져서 깜박했어. 그럼 다른 날을 잡아서 빚어야겠네.”
“정신 차려. 그러다가 내일 너 혼자 출근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몰라.”
“네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그랬을 거야. 그래봤자 집에서 양조장까지 몇 걸음 안 되지만 말이야.”
요즘 정말 정신 없기는 했다.
바오 양조장에서 설비가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제는 공장장이 된 조택훈과 배치에 대해 의논하기 바빴다.
일단 한 번 설치하면 다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신중해야만 했다.
그래도 진행 속도는 꽤 빨랐다.
생각보다 조택훈과 마음이 잘 맞았다.
양조장을 직접 운영해본 경력이 있는 탓에 누구보다 내가 고민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잘 알아채는 편이었다.
설치 스케줄도 당겨졌다.
원래는 5월 말 정도를 예상했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빠르면 5월 첫째 주 중에는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택훈이 빠르게 움직여준 덕분에 대량 생산을 시작할 수 있는 시기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내일은 너도 좀 쉬어.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에 주말에도 계속 일하고 있잖아.”
“미국에서 많이 쉬고 와서 괜찮아. 그나저나 영귀주는 언제쯤 손볼까?”
“영귀주는 여름쯤 해야지. 그보다 먼저 해결할 것들이 많아.”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수호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영귀주를 사들이긴 했지만, 그걸 그대로 내보낼 생각은 없었다.
개선할 부분이 있는지 한 번쯤은 짚고 가야만 했다.
벽향주 수준까진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오저당의 명성에 어울릴 정도는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도 기본이 잘 잡힌 술이고 거기에 요정의 효과까지 받게 될 테니 조금은 기대되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아예 보틀과 라벨도 리뉴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의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예정되어 있는 벽향주 리뉴얼이 우선이었다.
“어! 여기에 있었네.”
뒤를 돌아보니 고라니가 서 있었다.
그런데 꼬락서니가 정상이 아니었다.
눈은 살짝 충혈되어 있었고 머리도 부스스한 것이 밤을 새운 느낌이었다.
“너 어제 안 자고 뭐 했냐?”
“갑자기 필 받아서 작업 좀 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어. 정신 차려 보니 해가 뜬지 한참이나 지났더라.”
“어쩐지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보이더라.”
“사람이 안 보이면 찾아야 정상 아니야?”
아, 내 눈!
왜 삐진 표정을 짓는 건데?
한국에 오더니 이상한 것만 배웠어.
너 원래 그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표정들은 주로 내가 아닌 이장님과 동네 어르신들에게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널 믿는 거지. 그리고 너 지금 정상이 아닌 것 같으니 가서 좀 자.”
“노놉! 나는 멀쩡하니 일단 와봐.”
“뭘 보라는 거야?”
“보틀이랑 라벨 디자인 완성했어.”
“그걸 벌써 끝냈어?”
라니는 손가락을 V자로 치켜들었다.
필 받아서 작업했다더니 이렇게 빨리 완성했을 줄은 몰랐다. 나와 수호는 일단 사무실로 쓰는 컨테이너로 향했다.
양조장 내부에 있던 사무실은 허물고 저장고를 넣은 탓에 당분간은 컨테이너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난장판이 된 내부 모습이 보였다.
책상 위에는 에너지 드링크가 몇 개나 쌓여 있었고 밤을 이곳에서 지낸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오죽하면 수호도 질린 표정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도둑이라도 들어온 거야?”
“네 눈에도 그렇게 보이지? 어떻게 하룻밤 만에 이렇게 만들어 놓냐.”
“여기는 내가 알아서 다 치울 테니 입 닫고 어서 와서 앉기나 해.”
라니는 의자를 가져다가 우리 둘 앞에 놓고 어서 앉으라며 손짓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이런 식으로 일하면 퇴근 시간 이후에 여기 잠가버린다. 몸조리하려고 온 녀석이 이게 도대체 뭐야?”
“그래도 여기서 일한 뒤부터 피부 엄청 좋아졌잖아.”
“그건 나도 인정.”
이번에는 수호도 라니 편을 들었다.
이 녀석 영어로 대화해도 이제는 얼추 대화 내용을 따라잡고 있었다.
귀가 어느 정도는 뚫린 것 같았다.
어쨌든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라니의 상태는 정말 좋아졌다.
한국에 온 지 두 달도 되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반팔을 입고 다닐 정도였다.
미국에 있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먹는 것부터 모든 환경이 바뀐 탓인 것 같았다.
무농약으로 키운 뒷마당 채소.
제철을 맞은 여러 식자재로 만든 음식.
공기 좋고 물 맑은 환경이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술지게미 팩을 한다는 것이다.
술지게미.
그건 술을 빚고 남은 찌꺼기다.
예전에는 그걸 가축의 사료로 쓰거나 보릿고개 때는 식용하기도 했으나 요즘 우리 양조장에서는 처치 곤란이었다.
다른 양조장에서는 술지게미를 이용해서 비누를 만든다던데 우리는 그 정도 수준까지 도달하진 못했다.
안 그래도 바쁜 상황이다.
거기까지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그나마 그걸 가장 잘 활용하는 분이 바로 이모였다. 이모는 그걸 가져다가 팩을 만들어서 인근 마을에 나눠주셨다.
라니도 그 효과를 톡톡히 봤다.
이게 우리나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비노테라피’(vinotherapy)라 불리는 와인 목욕이 인기를 끌고 있다.
폴리페놀이란 성분이 신진대사를 도와주고 항산화 작용을 한다는 원리다.
그 역사가 클레오파트라 시대 이전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어쨌든 피부 미인을 꿈꾸는 라니가 재차 앉기를 권하자 일단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녀석은 화면부터 띄웠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부터 설명할게. 벽향주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눴어.”
“왜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야?”
“대중화된 일반 벽향주와 수출용인 프리미엄 벽향주 그리고 나중에 혹시 만들지 모르는 3년 숙성 한정판.”
“그건 그냥 구상일 뿐이잖아.”
3년 이상 숙성한 벽향주를 만들어서 나중에 팔고 싶다는 말을 하기는 했다.
그 정도 숙성이면 다른 증류소의 30년 숙성한 것과 얼추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과연 어떤 맛이 나올까.
나는 무엇보다 그게 가장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준비해도 3년 후의 일인데 벌써 디자인을 논의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
“미리 준비해놔야지. 이번에 리뉴얼하면 적어도 10년 이상은 쓸 거잖아.”
“그렇기는 하지. 메이커스 마크의 붉은 왁스처럼 병만 봐도 우리 술이라는 느낌이 확실하게 들었으면 좋겠어.”
“그게 쉽냐···. 어쨌든 세 종류 모두 라벨과 보틀의 형태는 같게 하고 색으로 구분하게 할 거야.”
“조니 워커처럼?”
라니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벽향주인데 숙성 기간만 다르기에 완전히 다른 디자인을 쓰기도 애매했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했다.
그쯤 되자 녀석은 화면에 자신이 만든 디자인을 띄웠다.
모두 합치면 세 가지였다.
보틀의 형태는 기본적인 둥글고 사각진 것 외에도 물방울 모양도 있었다.
당연히 보틀 디자인에 맞춰서 세 가지 모두 라벨 디자인이 달랐다.
“오! 다 마음에 드는걸.”
세 가지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건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점이 있다면 크게 들어간 한글이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수출용이라고 영문 위주로 라벨에 표기하진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게 가장 난감한 답인 거 알아? 가장 좋은 게 셋 중에서 뭐냐고.”
“글쎄···.”
“나는 처음에 본 것이 가장 좋다.”
수호는 잠시 말을 얼버무렸지만,
나는 곧장 마음에 드는 것을 알려줬다.
한눈에 들어왔기에 고민할 것도 없었다.
파스텔 톤의 조각보 이미지.
라벨에 한국적인 느낌이 담긴 고전적인 사각 병 형태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얼핏 보면 피에트 몬드리안의 선과 색으로 구성된 그림을 보는 느낌이었다.
라벨의 색도 화사했다.
옐로우와 퍼플 그리고 화이트 톤.
어떤 색을 입혀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장식장에 진열해놔도 좋을 것 같은 인테리어 소품 같았다.
역시 인테리어 소품을 만들던 옥토퍼스 디자이너다운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라니와 수호는 나와 다른 디자인을 골랐다. 결국에는 세 명 모두가 다른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
“이런···. 이러면 어쩌지?”
라니도 꽤 당황했다.
설마 이렇게 취향이 다를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차라리 여기에 한 명이 더 있었으면 쉬웠을 것이다. 수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이모를 부르자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이거 우리끼리 정하지 말고 너튜브에 올려서 투표를 해볼까?”
채널을 만든 지 반년도 안 되었지만,
‘오졌다, 오저당’ 채널의 구독자는 어느 사이에 4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쌍둥이의 실력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고 거기에 라니의 지원을 받은 터라 유입되는 수치가 생각보다 많았다.
그곳을 통한 광고 효과도 상당했다.
모든 영상의 처음과 마지막에는 우리 오저당 술에 대한 광고가 5초간 나갔다.
엄청 대단한 수준의 광고는 아니고 그저 스틸컷 몇 장만 보여주는 수준이었다.
그 정도는 구독자들 대부분은 양해해주었다.
“제품 출시 전에 공개를 한다고?”
“디자인 출원만 미리 해놓으면 되잖아.”
“그거 몇 개월 걸리는 거 아니야?”
“일단 신청해놓고 우리는 우리대로 움직여야지.”
어차피 라니가 제시한 보틀 디자인은 특별할 게 없었고 라벨 디자인이 핵심인데 그리 문제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카피도 아무거나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연간 수천만 병을 파는 브랜드도 아닌데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끌루소를 통해 해외에서도 판매 중이라 디자인이 확정되면 유럽 지역도 출원을 해둘 생각이었다.
“라니 네 생각은 어때?”
“재미있겠네. 고객의 참여가 우리 제품에 대한 애정으로 바뀔 수도 있잖아.”
“그러면 네가 직접 출연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런 디자인이 나왔는지 설명해.”
“내가? 나 한국어 서툴잖아.”
그건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자막을 달면 되잖아.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라니는 흔쾌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채널의 지분 상당수가 라니와 호세의 몫이었다.
호세가 라니에게 한국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 게 은근히 관심을 끌었다.
그런 덕분에 촬영을 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럼 결과가 나오면 다시 논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