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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47화 (47/254)

스피릿 포인트 (1)

라니가 오저당에 온 이후부터.

녀석과 내 사이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해주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친구 그 이상은 절대 아니다.

한때 녀석을 보고 설렜던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다 어린 시절의 추억 같은 케케묵은 옛이야기에 불과했다.

저런 꼴을 하고 있는데 그런 마음이 생길 리가 없잖아.

“야! 가서 좀 씻어.”

녀석은 요즘 자연인이 되고 있었다.

평소에 외모를 단정하게 꾸미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화장을 하는 것도 개인의 선택이니 강요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옆에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좀 씻어야지.

평소에는 이 정도 수준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디자인 작업을 할 때는 정말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일하는 느낌이었다.

정말 영혼을 갈아서 넣는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였다.

“너무 자주 씻어도 피부에 안 좋아.”

“냄새는 어떻게 할 건데?”

“지금은 일할 시간도 부족하니 방해하지 말고 내 옆에서 좀 꺼져줄래?”

“나는 분명히 시간 여유 있다고 했는데 너 혼자 서두르고 있는 거잖아.”

“이걸 어서 끝내야 영귀주 리뉴얼을 시작하니 그렇지. 그것도 리뉴얼을 끝내야 판매할 거라고 말했잖아.”

연간 15억의 매출을 내던 제품이다.

그걸 생각하면 쉽게 포기하긴 어려운 금액이기는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의 매출로 되돌려 놓기 어려워진다.

대부분의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부터 다른 대체품을 찾기 시작한다.

영귀주가 아닌 술에 길들여지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저당도 같은 경험이 있었다.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몇 개월 지나 태백 물산의 요청대로 막걸리를 빚어서 내놨을 때 한동안 외면을 받았다.

다시 정상 궤도로 올라올 때까지 생각보다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라니는 그 간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작업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면 영귀주부터 작업하지 왜 선물 세트 패키징에 손을 대고 있는 거야? 그건 어차피 추석 때나 쓸 것 같은데.”

“벽향주에 힘을 너무 많이 줬는지 막상 이거다 싶은 게 안 떠올라서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 아무 때나 아이디어가 막 뿜뿜 솟아나는 게 아니란 말이지.”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패키징 디자인은 언제쯤 나와?”

“거의 다 끝냈으니 조만간 보여줄게.”

선물세트 패키징은 간단했다.

박스는 한 가지로 통일해서 사용하지만, 내부의 트레이는 세 종류가 될 예정이다.

벽향주는 용량을 통일했으나 오풍주는 그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라 트레이도 조합마다 다르게 만들어야 했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제법 있었다.

더구나 요즘 라니는 디자인 외에도 맡고 있는 업무가 제법 많이 있는 편이었다.

“이번에 사람 하나 뽑아서 붙여줄까?”

“좋지! 안 그래도 필요하긴 했어. 직원을 새로 뽑진 말고 주윤 씨를 붙여줘.”

“옥주윤 씨는 왜?”

“지금 네가 하고 있던 회계 업무 서포트하려고 일 배우고 있잖아. 아예 사무직으로 데리고 와서 일을 시키려고.”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으로 지금까지 교육을 하고 있는 중이기는 했다. 주윤 씨는 성격이 꽤 꼼꼼한 편이고 서류 작성도 제법 잘하는 편이라 그쪽이 더 어울렸다.

어차피 인력의 재배치가 필요했다.

기존에는 수작업으로 하던 것들이 설비가 들어오면서 불필요하게 되었다.

아직 숙성 벽향주는 수작업이 필요하나 그것도 내년이 되어야 병입을 하게 될 예정이고 양도 아직 그리 많진 않았다.

“본인 의사부터 물어보고 결정할게.”

“당연히 그래야지. 얼마 전에 듣기로는 이번에 세금이 장난 아니게 나올 거라고 하던데 얼마나 나올 것 같아?”

“주세가 확실히 장난 아니더라.”

세무사에서 정리해준 예상 금액을 받아봤을 때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주세가 엄청나다는 말을 여러 사람을 통해 여러 차례 들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그나마 전통주라 다행이었다.

벽향주의 매출은 50%의 감면을 받아서 상당히 많이 낮춰질 수 있었다. 문제는 당장이 아니라 내년이 될 것 같았다.

지난해 12월까지는 숙성 창고가 완공되기 전이라 매출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올해 1월부터 벽향주의 생산량이 10만 병에 달하기 시작하면서 매출의 단위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라니는 머리를 긁적이며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반응했다.

“내년 일은 내년에 걱정하자. 그리고 지금 설치 중인 생산 라인이 본격적으로 돌면 그때는 단위가 또 완전하게 달라질걸.”

“아무래도 그렇겠지. 올해 매출은 도대체 얼마나 찍힐지 감이 안 잡혀.”

“뭘 걱정해! 최대한 많이 팔고 그만큼 세금 내면 되지. 그런 걱정은 네가 하지 말고 세무사한테 하라고 해.”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

문제는 많이 벌고 있는 것 같지만,

당장 손에 쥐고 있는 돈이 별로 없었다.

세금도 내야 하고 버는 족족 어딘가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최근에 오크통과 바오 양조장의 설비를 사들이는 데 사용한 금액만 합쳐도 3억이 넘어갈 정도였다. 그나마 중간에 끌루소가 입금한 25만 유로가 있어서 다행이지 조금 상황이 애매해질 뻔했다.

하지만 선주문도 다 빚이다.

술이 완성되어 내년에 넘겨주기 전까지 절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럴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중간에 술이 잘못되면 대형 사고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라니가 벌떡 일어났다.

녀석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해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지 돌아보니 25인승 버스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제야 오늘 일정표에 적혀 있었던 외국인 체험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국내 관광객은 주말에 진행하지만,

수요일은 영어로 진행하는 외국인 전용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중이다. 보통은 라니와 호세가 번갈아 가며 맡고 있는데 이번 주는 라니가 담당인 것 같았다.

“너 그 꼴로 나갈 거는 아니지?”

“일단 시간 좀 벌어줘. 5분이면 충분해!”

“어휴 정신 좀 차려. 일단은 내가 가서 진행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와.”

“쌩유!”

누가 진행해도 상관없지.

남의 일도 아니고 오저당의 일이잖아.

그리고 마침 시간의 여유가 있었고 술을 빚는 과정을 설명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여기서 수호를 제외하면,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거울 앞에서 옷차림을 한 번 살핀 뒤에 컨테이너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인솔자로 온 최수향 씨가 보였다.

그녀는 삼척 관광과에서 고용된 관광 통역안내사로 매주 두 번씩 국내외 관광객을 이끌고 오저당에 오는 분이다.

슬쩍 버스 안을 살펴보니 이번에는 십여 명 정도라 그리 많아 보이진 않았다.

아직 홍보가 많이 안 된 탓이었다.

이것도 거의 무료에 가까운 금액으로 삼척에서 진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히 우리에게 떨어지는 금액도 거의 없다고 봐도 되었다.

그나마 방문한 이들이 술을 사가면 조금 남는 편인데 강요는 절대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체험 후에 테이스팅을 해본 대부분의 관광객은 알아서 몇 병씩 사 갔다. 그리고 이걸 통해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당장의 이익이 중요하진 않다.

조금 더 인지도를 높여야 했다.

좋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간 이들은 술을 고를 때 한 번쯤은 고민하지 않겠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 여겼다.

“엇! 오늘은 사장님이 직접 진행하시는 건가요?”

최수향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나오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제가 진행하면 안 되나요?”

“그런 거는 아니고요. 처음 있는 일이잖아요.”

“라니 실장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서요. 제가 앞부분만 살짝 도와주고 빠지려고요. 저 영어 제법 잘합니다.”

“저도 잘 알죠.”

처음 프로그램을 시작했을 당시에 나는 도우미를 자처하며 옆에서 도와줬다.

아무래도 라니가 아무리 술에 대해 공부를 했어도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더구나 짓궂은 이들이 종종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정말 말도 안 되는 질문이 나올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내가 나서서 답을 해줘야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예전의 일이다.

이제는 라니 혼자서도 잘했다.

경험이 쌓이니 나올만한 질문이 뻔했다.

관련된 내용만 외우면 어렵진 않았다.

그리고 라니는 실제로 술을 빚는 일도 종종 도와주며 전반적인 과정을 몸으로 직접 익히기도 했다.

“어서 오십쇼. 오저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발음하기 어려우시면 OGD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나는 일단 사람들을 인솔해서 한옥 마당에 마련된 자리에 앉혔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그곳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다들 독특한 주막 컨셉을 보고 꽤 흥미로워했다.

“이곳에서 죽을 쑤고 누룩이란 효모를 입혀서 발효하는 과정에 들어갑니다.”

청주와 막걸리의 생산 과정.

다른 술과의 차이점 등을 알려주기 시작하자 모두가 꽤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다들 술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오저당에 감도는 알코올 냄새만 맡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

체험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히 있기에 과정은 그리 복잡하진 않았다.

어차피 반나절도 안 되는 제한된 시간 동안 숙성까지 해볼 수는 없다.

대신 단계별로 숙성되고 있는 술을 보여주자 뽀글거리며 올라오는 기포를 보고 다들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아, 나도 처음에는 그랬거든.

이걸 자세히 보고 있으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한껏 부풀었다가 다시 가라앉는데 꼬물거리며 움직이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게 설명을 듣다 보면 적어도 한국의 술이 어떤 과정으로 빚어지는 건지 대충 알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고마워. 이제 나랑 교대하자.”

뒤늦게 라니가 왔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끝까지 하고 싶었다.

더구나 열두 명의 관광객 중에 2m 정도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금발의 남자가 상당히 신경 쓰였다.

그는 사진을 정말 열심히 찍었다.

누가 보면 취재라도 온 기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질문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 기자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평범한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술을 대하는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그는 체험 프로그램에서 제공되는 술을 마시며 열심히 뭔가를 메모했다.

우리 술에 대한 테이스팅 노트를 작성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향을 맡고 맛을 보는 자세도 좋았다.

뭔가 경건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는데 모든 상황을 조합해 보면 저 거인 같은 남자는 동종 업계 사람인 것 같았다.

옆에서 내가 진행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라니도 그쯤 되자 눈치를 챘는지 내 곁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저 사람 때문에 그러는 거야?”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서.”

“혹시 다른 양조장에서 오저당의 비결을 알아내려고 스파이를 보낸 것은 아닐까?”

“훗! 대화도 잘 안 통하는 외국인을?”

차라리 찾아와서 견학을 하고 싶다고 했으면 더 자세하게 보여줬을 것이다.

다른 주종을 빚는 이들과의 교류도 꽤 재미있다는 것을 테넌트가 알려줬다.

나 같아도 다른 나라에 가면 어떻게 술을 빚는지 궁금해서 증류소의 투어 프로그램 같은 것을 신청했을 거다.

두어 달 전에 미국에 갔을 때.

시간이 있었으면 버번으로 유명한 켄터키와 테네시 같은 증류소로 유명한 지역을 한 바퀴 돌고 귀국했겠지.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스마트폰을 꺼내서 확인하니 조택훈 공장장의 전화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그는 곧장 내 위치부터 확인했다.

목소리만 들어 봤을 때는 뭔가 문제가 있어서 찾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디에 계십니까?]

“체험 프로그램 진행을 잠시 도와주느라 양조장에 있는데 무슨 일이시죠?”

[시간 되시면 잠깐 이쪽으로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그런 거는 아닙니다. 설치가 거의 다 끝나서 시운전을 해볼 생각인데 아무래도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걸 벌써 끝냈다고?

적어도 며칠 더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조택훈은 다시 한번 테스트란 사실을 강조했다. 아직 설비 조립이 완전한 상태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래도 처음으로 벽향주를 빚을 설비가 돌아가는 것이니 그걸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라니에게 먼저 가보겠다고 눈짓을 보내며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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