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귀주의 진가 (1)
KR 마트와 계약이 성사된 후.
만 오천 병의 벽향주와 오천 병의 오풍주를 심양 머천트를 통해 미국으로 보내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만들어 놓은 벽향주가 제법 많았던 탓에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당연히 오저당 식구들을 미국 진출에 성공했다는 말에 모두가 환호했다.
끌루소를 통해 유럽에 술이 소개된 이후에 두 번째로 성사된 수출이었다.
이번에 KR 마트에 물건을 보내며 얻은 수익은 현재 오저당 매출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 물량이 끝이라 여기는 이는 없었다.
당연히 추가 주문이 들어올 거라 여겼다.
일단 한 번 잡솨봐!
한 번 마셔보면 또 생각나는 술.
그게 바로 우리 오저당의 술이다.
우리 마케팅 포인트도 그와 비슷했다.
올해는 여름 휴가철을 맞아 인파가 몰리는 삼척의 해변가에서 오저당의 술을 시음하는 행사도 진행했다.
원래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나,
지자체에서 만든 홍보관은 예외였다.
삼척시는 여름을 맞아 지역 특산물 홍보를 위한 장소를 만들어 주었는데 우리가 그곳을 며칠간 활용하기로 했다.
당연히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한때는 없어서 못 사던 술이었다.
그걸 공짜로 맛볼 수 있게 해주겠다는데 마다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벽향주나 오풍주를 맛본 이들은 우리 술의 매니아가 되어갔다.
하지만 그걸 우리가 직접 하진 않았다.
안 그래도 바쁜 직원들을 거기까지 내보내서 일을 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번 일은 삼척에 있는 이삭 기획이란 작은 마케팅 회사에 맡겼다.
그 회사는 정말 다양한 일을 했다.
온라인 마케팅부터 시작해서 오프라인 행사까지 못 하는 일이 없어 보였다.
직원은 고작 세 명에 불과했는데 다들 일당백의 능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매번 나와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삼척에 나올 일이 있기에 행사를 하는 해변에 들러봤더니 다들 우리 술에 대한 공부를 하고 온 건지 언변이 엄청났다.
실제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인근에 있는 가게에서 우리 술을 사 가고 있었다.
“직원분들도 그렇고 오늘 오신 행사 도우미분들도 정말 능숙하네요.”
“다들 경력이 상당하니까요.”
“황동선 대표님도 이쪽에서 일하신 지 상당히 오래되신 것 같은데요.”
“나이 먹었다고 흉보시는 거는 아니죠? 올해까지는 아직 30대랍니다.”
“그런 말은 아니었습니다.”
절대 아니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 경험이 많아 보인다는 뜻이었다.
행사에서 벌어지는 온갖 잡음과 예상하지 못한 일들은 대부분 그가 직접 해결했다.
그렇다고 현장 경험만 있는 것 같지 않은 것이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게 보여준 PPT는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고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잘 만들어서 하나의 작품 같았다.
“제가 지금은 삼척에서 구르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 국내에서 가장 잘나가는 광고 대행사에서 일하던 AE였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조언 하나만 해드려도 될까요? 같은 학교 후배님이라 그런지 제가 신경이 조금 쓰이네요.”
며칠 전 첫 행사를 마친 후에 술자리를 가졌는데 알고 보니 황동선 대표는 나와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당연히 학과는 달랐으나 학번 차이가 상당한 대선배님이셨다.
“조언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죠.”
“오저당을 검색을 해보면 품평회 수상 이후로 관련 기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데 홍보 기사를 활용하실 필요가 있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신경 쓰이긴 했다.
종종 포털사이트에서 오저당을 검색하면 블로그 등에서 우리 술에 대한 언급은 되고 있으나 언론 기사는 거의 없었다.
아무리 세월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뉴스는 모두 진실이라 믿는 이들이 있기에 간과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SNS와 블로그 같은 곳에 올라오는 글과는 무게감이 확실히 달랐다.
물론, 기사 하나 올리는 게 어렵진 않다.
요즘은 돈만 주면 이게 홍보인지 아니면 기사인지 알 수 없는 내용을 올릴 수 있다.
대부분 인터넷 언론사들이 그런 식으로 영업을 많이 하는데 그들은 돈과 함께 다양한 트래픽도 덤으로 얻게 된다.
하지만 그들만 욕할 수는 없다.
대형 언론사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더 교묘한 것이 그들이었다.
예전에 삼촌 가게에서 알바를 하며 대형 언론사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정말 기가 찰 정도였다.
그래도 자랑할 거는 자랑해야지.
우리만 만족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저절로 알아주는 것은 아니다. 오저당의 제품이 세계로 나가고 있다고 알릴 필요가 있다.
당장 큰 효과를 바라는 게 아니다.
그런 정보들이 쌓이고 쌓여서 오저당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우리의 가치를 조금 더 높여줄 것이다.
“안 그래도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혹시 언론 홍보 마케팅이나 보도 자료를 뿌릴 수 있는 루트가 있을까요?”
“멀리서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자기에게 맡기라는 의미였다.
은근히 영업을 하는데 밉진 않았다.
가격만 맞고 성과만 제대로 낸다면 굳이 다른 홍보 대행사를 찾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면 오풍주의 수출 소식을 알리는 홍보 기사를 부탁드릴게요.”
“KR 마트 이야기도 포함하실 거죠?”
“그 부분은 살짝 언급하는 정도만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괜히 길게 써봤자 오저당에는 아무 의미 없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KR 마트를 부각시킬 이유가 없다.
국내에는 그냥 미국에 수출을 시작했고 대형 마트 체인에 납품되었다고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끌루소와 프랑스 마트에 입점했다는 것도 알려야겠지.
대충 어떤 내용의 기사가 필요한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기사에 들어갈 내용은 정리해서 드릴 테니 살짝 손봐주실 수는 있죠?”
“물론이죠. 기사답게 손 보는 것도 저희가 해야되는 일인걸요.”
“그럼 오늘 저녁에 기사 초안 메일로 보내드릴 테니 견적 부탁드립니다.”
비용은 그리 많이 나오진 않을 거다.
행사 마무리까지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선 나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허머에 올라탄 뒤에 시동을 걸려고 하자 향이는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이거 차 안에 놔두고 가셨는데 연락 온 게 있었어요.]
고맙다는 말과 함께 화면을 켜자,
아버지가 보낸 몇 개의 메시지가 보였다.
내용은 안 봐도 뻔했는데 미국에서 벽향주와 오풍주가 언제부터 팔리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오전에 KR 마트와 계약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뒤늦게 확인하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도 그것까진 알지 못한다.
아직 오풍주를 실은 컨테이너는 인천에서 출항도 하지 않았기에 적어도 한 달쯤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았다.
참고로 뫼리스도 꽤 안타까워했다.
그는 미국 쪽으로 수출이 성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유통기한이 한 달만 더 길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한탄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향이에게 방법이 없는지 물어봤다.
“지금보다 유통기한을 더 길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지?”
[같은 능력을 가진 중급 요정이 여럿 붙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요.]
“상급 요정으로 성장하면?”
[흐음··· 저도 이번 생이 처음이라 모르는 것이 많아서 그 부분은 장담할 수 없어요.]
향이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녀석이 미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입을 뗀 지도 얼마 안 되었고 대화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어쨌든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고 있기에 보상도 꾸준히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성장을 위해 400여 종의 막걸리를 주었지만, 그와 별개로 계속 술을 사다가 요정에게 줄 생각이었다.
아직 구하지 못한 막걸리만 수백 종에 달했고 청주와 약주 그리고 소주까지 합치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남았다.
그런 과정이 요정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
이번에 느끼는 바가 많이 있었다.
개중에는 정말 보물 같은 술도 있었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양조장인데 술맛이 기가 막혔다. 하지만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기에 안타까울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싹 다 가져오고 싶었다.
이건 술의 품질과 맛의 문제가 아니다.
리뉴얼과 개량 과정을 거쳐서 감수성을 자극하는 마케팅을 하면 먹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하는 숙제가 있었다.
“향아. 너는 영귀주 어떻게 생각해?”
[그냥 무난무난한 수준인 것 같아요. 한 마디로 특색이 없다고 봐야겠죠.]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게 참 애매하네.”
영귀주를 손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홍천에서 사용하던 물이 아니라 생기는 차이인지 개선하는 과정이 지지부진했다.
예전에 오풍주를 개발했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때는 완전히 레시피를 해부해서 다시 재조립을 했기에 자유도가 높았다.
거기에 선생님도 옆에서 많은 조언을 해주었기에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었다.
반면에 영귀주는 조택훈이 옆에서 돕고 있음에도 예전만큼의 맛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오저당으로 돌아가자.”
볼 일은 다 봤기에 돌아가야 했다.
허머에 시동을 걸고 곧장 오풍리로 향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확실히 여름이 된 게 실감이 났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차들이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거의 1시간 만에 돌아오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라니였다.
녀석의 손에는 선물 세트 패키지가 들려 있었다. 얼마 전에 디자인이 결정되었는데 샘플이 나온 것 같았다.
“어떤 것 같아?”
“디자인을 물어보는 거야? 아니면 패키지가 잘 나왔냐고 물어보는 거야?”
“당연히 패키지를 묻는 거지! 이제 와서 디자인을 손보라고 하면 죽일지도 몰라.”
“하하. 잘 나왔네.”
실제로 꽤 마음에 들었다.
선물 세트의 디자인은 한국적인 창살 무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렇다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있는 그대로 가져다 쓴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규칙적인 패턴 디자인처럼 보였다.
“그러면 이대로 주문한다.”
“주문량은 얼마나 하기로 했어?”
“2천 세트만 하려고. 쌀 쌓아둘 곳도 부족하다고 난리라 그 이상은 무리야.”
“저번에 창고를 지을 때 무리해서라도 200평으로 할 걸 그랬나 봐.”
뭐···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삼촌과 아버지 돈까지 빌려 가며 창고를 지어야 했다.
그나마 지금은 다시 여유 자금이 생겨서 당장이라도 100평짜리 창고 한 동 정도는 지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걸로 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안 될 것 같았다.
기왕에 짓는다면 이번에는 훨씬 더 크게 그리고 2층이나 3층 정도로 올려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벌어서 훨씬 크게 몇 개쯤 지으면 되잖아.”
“그래. 네 말이 맞다.”
“아! 아까 수호가 찾던데 들어가 봐.”
“무슨 일 있었어?”
라니는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 올리더니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녀석을 뒤로하고 오저당으로 들어가니 마침 수호가 벽향주 한 병을 손에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걸 보니 지레 겁이 났다.
나날이 더워지면서 술을 관리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나마 작년 여름에는 선생님이 계셔서 수월했다.
하지만 올해는 수호와 함께 우리 둘이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거 맛 좀 봐볼래?”
“혹시 술에 문제가 생긴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잔말 말고 이것부터 일단 마셔봐.”
수호는 곧장 뚜껑부터 땄다.
그러자 향이가 날아가서 녀석이 손에 쥔 병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결국에는 얼굴까지 처박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흐아아··· 좋다!]
그러다 아예 안으로 들어가겠다.
보다 못한 나는 수호에게서 병을 받아서 한쪽 편에 놓인 서랍장 안에 있던 종이컵 하나를 꺼내 술을 반쯤 따랐다.
그런데 냄새부터 뭔가 달랐다.
“이거 벽향주 아니잖아?”
“예전에 영귀주 2차 증류해서 옹기에 담아 놨던 거 기억나?”
“우리가 그랬었나?”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랬던 것 같았다. 증류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 신기한 마음에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다.
나중에 퍼플 라벨을 주정 강화할 용도라 당연히 베이스는 벽향주가 되었는데 종종 영귀주로도 증류기를 돌린 적이 있었다.
그렇게 테스트한 증류주는 당장 사용할 것은 아니라 대부분 마셨고 일부는 옹기에 담아놨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향이의 반응은 왜 저런 거지?
일단은 한 모금 마셔 봤다.
그제야 향이의 반응이 이해됐다.
코에 감도는 향긋한 향부터 마지막까지 혀끝에 남는 여운 그리고 목 넘김까지 모든 것이 기대 이상이었다.
그래, 이게 진짜 소주지!
희석식 소주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이걸 우리가 빚었다니 신기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우리가 몰랐던 영귀주의 진가는 청주가 아니라 소주였던 것 같았다.
“와우···! 이거 도대체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