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멕시코 y 테킬라 (4) >
브루클린 주류 박람회 당일.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다.
멕시코에서 이동하며 쌓인 여독이 상당했으나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주최 측에서 잡아준 호텔은 시설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행사장 부근에 있다는 점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걸어서 행사장까지 갈 수 있었다.
“행사장 출입증 잘 챙겼지?”
“물론이지. 박람회 끝나면 캘리포니아로 가지 말고 여기서 여행이나 할까?”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다른 곳도 아니고 뉴욕이잖아. 나 여기는 처음 와봤단 말이지.”
뭐···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러고 보니 라니와 둘이서 여행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언제나 같이 다니던 패거리가 있어서 둘만 따로 어딘가를 갈 이유가 없었다.
그 생각이 들자 문득 다른 친구들 소식이 궁금해졌다.
“다른 녀석들은 요즘 뭐해?”
“나도 잘 모르지. 그냥 SNS에 올라오는 소식 정도만 알아. 대부분은 대학교 진학해서 공부하는 중이잖아.”
“로빈도 대학교에 간 건가?”
“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나한테 옛 남자 친구 소식을 묻는 거야?”
“그나마 너는 알 것 같아서.”
“걔 호주로 다시 돌아갔잖아.”
라니의 옛 남친이자 내 친구이기도 한 로빈 토마스는 우리 멤버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친구들처럼 연락이 끊긴지가 좀 되었다. 입대한 이후에 연락을 할 기회도 여유도 없었다.
라니도 오저당에 취업하지 않았다면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에는 호주로 갔구나. 요즘은 뭐 하고 지내는지는 알고 있어?”
“몰라. 알아도 말하고 싶지 않아.”
“너희 나쁘게 헤어졌던 거는 아니잖아.”
“제가 엑스 보이프렌드 SNS나 훔쳐보는 그런 여인은 아니랍니다.”
내가 모르는 뭔가 있기는 한 거 같은데 진짜 말하기 싫은 것 같아서 그만뒀다.
괜히 지금 심기 불편하게 만들면 박람회 내내 나만 개고생할 것 같았다.
대신 나는 라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비행기 티켓은 바꾸면 되니 뉴욕에서 하루쯤 더 보내자. 하고 싶은 거 있어?“
“글쎄··· 그건 킵해놓고 더 고민해볼게.”
“마음대로 하십쇼.”
어차피 뭘 하든 상관없었다.
라니만 만족하면 되는 일이었다.
앞으로 이 녀석이 해야 할 일이 많다.
현재 진행 중인 것들만 하더라도 소담 소주 런칭이 있었고 그게 끝나면 아이레스 테킬라의 런칭도 해야 한다.
멕시코에서 사용되고 있는 병은 투박한 투명 사각 병이었고 라벨도 별로였다.
그걸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증류소를 인수하기로 결정하자 자신의 운명을 눈치챈 건지 라니가 스스로 바꿔야겠다고 말을 했을 정도였다.
둘 중에 뭐가 우선이라 하긴 어렵다.
소담은 준공 후에 증류 설비까지 들여놓으려면 적어도 봄은 될 것이다.
반면에 아이레스는 투자를 해도 괜찮을 거란 확신을 호르헤가 주어야만 한다.
그 문제는 일단 한국에 돌아간 이후에 고심해서 천천히 정할 생각이었다.
한가지 염려되는 것이 있다면 멕시코와 같은 일이 자주 생길 것 같다는 것이다.
벌써 바오 양조장과 아이레스까지 두 번이나 비슷한 일이 생겼다. 향이가 부탁을 한다면 나는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걷자 곧 행사장이 나왔다.
“앞으로 2박 3일 동안 힘내보자고.”
“어제 그분은 테킬라 가지고 언제 오시는 거야? 늦으시면 안 되는데.”
“아까 연락 왔는데 슈미트 지사장님도 곧 오실 거야. 일단 들어가자.”
출입증을 보여준 뒤.
안으로 들어가자 꽤 분주했다.
사람들을 피해 가며 부스로 가자 벌써 그 앞에는 몇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아직 행사가 시작되진 않았기에 일반 관람객은 확실히 아니었다.
아마도 박람회를 진행하는 관계자이거나 다른 증류소에서 나온 직원들 같았다.
그들은 우리가 부스로 걸어가자 오저당 관계자임을 곧장 알아채고 다가왔다.
가장 외진 부스인데다가 아시아인은 나밖에 없어서 쉽게 예측이 가능했던 것 같았다.
“혹시 OGD 관계자이십니까?”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아··· 스피릿 포인트에서 봤는데 오풍주의 맛이 어떤지 너무 궁금해서요. 혹시 오늘 시음회도 진행하시나요?”
“당연히 해야죠. 행사가 시작되면 몇 차례 나눠서 진행할 겁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따가 다시 뵐게요.”
라니는 그 모습을 보고 꽤 기뻐했다.
뭔가 시작이 좋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잠시 후에 테킬라를 가지고 온 슈미트와 함께 술을 옮긴 뒤에 마침내 박람회가 시작되자 반응이 곧장 왔다.
“드디어 스피릿 포인트에서 극찬한 그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구나!”
“이 술은 어디에서 살 수 있는 거죠?”
“혹시 시음이 가능할까요?”
행사 시작과 동시에 적다고 할 수 없는 인파가 곧장 오저당 앞으로 몰려들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박람회 주최 측의 SNS를 통해서 홍보한 것을 보고 찾아온 이들이었다.
조금 놀라운 일이었지만,
우리는 각자 맡은 일을 시작했다.
일반 관람객 응대는 내가 맡았는데 소매처 문의는 KR 마트로 안내했고 바이어 상담은 슈미트가 맡았다.
라니는 시음용 술을 담당해야 했다.
술을 따라주는 잔은 소주잔 크기였다.
많은 양의 술을 준비하진 못한 터라 넉넉하게 따라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겨우 한 모금에 불과한 술이었으나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뜨거웠다.
위스키와 맥주 그리고 와인.
그 어떤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는 술이다.
당연히 낯설어하며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으나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진한 여운을 느끼며 한 모금에 불과하다는 것에 아쉬워했다.
“스피릿 포인트에서 말한 게 뭔지 알겠네. 이건 완전히 다른 신세계야.”
“여기서 사 갈 수는 없겠죠?”
“아쉽지만, 법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얼마 전에 뉴욕에 새로 오픈한 KR 마트에 가시면 사실 수 있습니다.”
나는 지도를 켜서 KR 마트의 위치를 보여주며 그쪽에서 구입하도록 안내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니는 고개를 저으며 내게 속삭였다.
“이 정도면 오저당이 아니라 KR 마트 직원 아닙니까? 언제 취직하신 거죠?”
“우리 술을 사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충성 고객 한 명이 더 늘어난 거잖아. 어디서 사든지 그건 고객의 맘이고.”
“눼눼. 알겠습니다.”
라니는 웃으며 빈 잔을 채웠다.
하지만 그 웃음이 지워지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줄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조금 줄어들 만 하면 다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우릴 찾아오는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 같은 곳에서 보았던 막걸리를 마셔볼 기회였고 누군가는 새로운 술을 찾고 있었다.
더구나 군중 심리도 한몫 했다.
사람이 사람을 부른다는 말이 맞았다.
저곳은 뭔데 바글거리는 거냐며 줄을 서서 시음을 하고 가는 사람도 꽤 있었다.
“줄은 이쪽으로 서주시면 됩니다.”
심지어 행사장 관계자들은 그 혼잡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오저당 부스에 직원까지 붙여줘서 줄을 정리해야 할 정도였다.
다른 부스에 비해 몇 배쯤 되는 인파가 몰려드니 어쩔 수 없었다.
힘든 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반복되는 안내를 계속하고 있으니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였다. 중간에 잠시 라니와 교대를 했으나 목이 칼칼했다.
이러다가 목이 완전히 나갈 것 같았다.
살면서 이렇게 말을 많이 한 적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오죽하면 향이도 걱정되었는지 술이 행사장에 잔뜩 깔려 있는데 안중에도 안 두고 내 곁에 머물렀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저희 직원을 이곳으로 부르겠습니다.”
슈미트도 한계가 온 것 같았다.
우리에 비해서 그나마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지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무조건 인력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업무에 지장이 생기시는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바이어 상담도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 제가 필요해서 그럽니다.”
그는 내게 명함을 보여줬다.
반나절도 안 되는 사이에 그는 십여 장 이상의 명함을 받았다며 웃었다.
대부분 그리 크지 않은 주류 판매점 체인이었으나 오저당의 술을 받고 싶다며 상담을 받고 갔다고 했다.
“진짜 관심이 있는 곳은 얼마나 될까요?”
“글쎄요. 몇 번 더 만나서 조건을 맞춰봐야 하는데 이중에서 절반 이상은 떠보는 수준이라 보시면 됩니다.”
“그거의 절반만이라도 성사되면 좋겠네요. 그리고 가능하면 동부 지역 체인 위주로 계약을 진행해주세요.”
그 부분은 슈미트의 권한이었지만,
오저당도 지지해주겠다는 뜻이었다.
KR 마트를 제외하면 서부보다 동부 쪽에 이벤트나 여러 조건을 맞춰주겠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게 어제오늘 그가 보여준 호의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슈미트는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금방 알아챘다.
아직은 소규모 사무실에 불과한 뉴욕 지사였으나 매출 규모가 늘어나게 되면 그만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갈 것이다.
“하하! 고맙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기다리던 지원군이 도착했다.
두 명에 불과하나 뉴욕 지사의 직원이 모두 동원된 덕분에 우리는 잠시나마 휴식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생수를 벌컥거리며 마신 뒤에 잠시 부스 구석에 앉아서 쉬고 있자 이번에는 라니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오늘 사용하려고 빼놓은 오풍주는 물론이고 벽향주까지 거의 바닥이라고 알려줬다.
하긴 예상보다 너무 많은 이들이 오저당의 부스를 찾아오고 있었다.
최대한 넉넉하게 준비한다고 했으나 이 정도까지 예상했던 것은 아니라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다 떨어진 거야?”
“오늘 사용하기로 한 술은 몇 병 안 남았어. 시음은 여기서 끝내고 바이어들에게만 제공하는 거는 어때?”
“지사장님! 혹시 오풍주랑 벽향주를 더 확보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일단 슈미트에게 확인부터 했다.
아직 부스에 술이 꽤 남아 있으나 이틀이나 더 행사장에서 부스를 운영해야 하기에 내일을 위해서 남겨둬야 했다.
가능하면 KR 마트나 심양이 보유한 술을 가져다가 쓰는 것이 바람직했다.
하지만 슈미트는 고개를 저으며 힘들 거라고 했다.
“벽향주는 어느 정도 가능한데 KR 마트 뉴욕 지점에 들어온 오풍주 수량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힘들 것 같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벽향주와 달리 오풍주는 냉장 트럭에 실어야 미국 동부까지 올 수 있기에 운송 비용의 압박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매장의 숫자가 서부에 쏠려 있는 탓에 유통 기한이 짧은 제품은 이곳 동부로 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어쨌든 그건 KR 마트의 결정이니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일단 벽향주라도 확보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2시간밖에 안 남았으니 그 시간 내에 가져오는 거는 무리고 내일 아침 일찍 가져오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앞으로 2시간 동안 뭘 하지?
쪼그려 앉아서 한동안 고민할 무렵.
내 시야에 들어온 상자들이 있었다.
온종일 오풍주와 벽향주를 찾는 사람들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것은 부스 구석에 쌓여 있던 아이레스 테킬라였다.
“자! 다들 주목하세요. 이제부터는 아이레스 테킬라를 홍보합시다.”
“맞다. 그게 있었지.”
“드디어 저도 맛을 볼 수 있는 건가요? 안 그래도 어떤 술인지 궁금했습니다.”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술맛 하나는 자신 있었다.
터무니없는 맛이라면 가져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둘러서 시음용으로 준비한 술병들을 치웠다.
그러자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항의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애원했다.
30분 이상을 줄 서서 기다렸는데 허탕을 쳤으니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하지만 없는 술을 만들어낼 수도 없는 터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해주었다.
그 대신에 나는 영업용 미소를 장착한 채로 비어있는 술잔에 테킬라를 따랐다.
테킬라도 그리 많지 않았으나 2시간 정도는 충분히 버틸 정도는 되었다.
그러자 대부분 호기심을 가졌다.
한국의 증류소인 오저당에서 테킬라가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 같았다.
멕시코에서 영입한 신인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데뷔하는 순간이었다.
‘이거 조금 흥분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