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64화 (64/254)

< 이삭 줍는 남자 (2) >

다음날 태백시의 연화 건설.

연화 건설 사무실은 낯설지 않았다.

지난해 숙성 창고 건축 이후에도 연화의 신정배 사장님과는 꽤 자주 만났다.

아니 우릴 찾아오셨다는 말이 맞겠지.

적어도 2주에 한 번씩 조기 축구회에서 마실 술을 말통 가득 받아 가셨다.

더구나 경리 교육도 해주셨다.

연화 건설에서 착실하게 일을 배워온 주윤 씨가 도와주는 덕분에 요즘은 영수증을 잡고 씨름할 일이 없어졌다.

은근히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 그것 하나만 제외하더라도 숨통이 트였다.

“이게 저희가 구상한 오저당의 전체적인 설계도입니다.”

신정배 사장은 설계도를 펼쳤다.

그곳에는 오저당의 기존 건물 두 곳과 함께 새로운 창고이자 주조 공장의 위치가 그려져 있었다. 몇 번의 수정을 거친 상태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 바뀐 것이 있다면 창고의 크기가 조금 더 커졌다는 것이다.

“250평 창고가 들어가긴 하네요.”

“사장님이 추가로 땅을 구매하신 덕분에 가능했죠. 기존 그대로였다면 아마 200평도 조금 애매했을 겁니다.”

“운이 좋았죠.”

양조장 남쪽에 있는 오천 평의 땅.

우리 땅과 맞닿아 있는 그곳을 이번에 사들이는 데 성공했다. 면적 자체는 넓진 않았으나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가격이 문제는 아니었다.

그 땅에 남아 있던 집 때문이었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아서 폐가가 되어버린 곳이나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셨다.

그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이장님이었다.

중간에서 계속 설득을 해주시며 많은 노력을 해주셔서 문제가 해결됐다.

그곳을 확보한 덕분에 창고도 더 크게 지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사무실 용도의 모듈러 건축물을 지을 공간도 나왔다.

머지않아 겨울이 다시 찾아온다.

그 시린 겨울을 컨테이너에서 일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모듈러는 짓는 것도 빨라서 늦가을 전에 끝낼 것이라 했다.

당연히 그런 나의 결정을 가장 반긴 것은 라니와 주윤 씨 같은 사무직이었다.

“3층까지 물건을 올릴 화물 승강기는 이쪽 편에 설치되는 건가요?”

“맞습니다.”

“위험하진 않겠죠?”

“안전장치는 최대한 신경 써서 준비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3층으로 건물을 올릴 생각이라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승강기였다.

그 외에도 도면 한쪽 편에는 40여 대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지난여름에 가장 문제가 되던 것이 바로 주차 공간이었다.

안 그래도 휴가철이 되면 휴양객이 많이 오는데 찾아가는 양조장에 오는 분들도 제법 많아서 주차난이 꽤 심각했었다.

주변에 공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물이 잘 빠지지 않았다.

비가 내리면 진창이 되어버려서 바퀴가 빠지는 터라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에 아예 넓게 주차장을 따로 만들기로 했다. 직원의 숫자도 점차 늘어나면서 은근히 우리 쪽 차량의 숫자도 많아졌으니 필요한 부분이기는 했다.

당연히 그만큼 공사비는 더 커졌다.

출장 중에 멕시코에서 12만 달러의 계약도 맺은 터라 현재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하지만 수출 계약을 맺은 것도 있었고 완공되기 전까지 몇 개월이란 여유도 있었다.

“언제쯤 완공이 가능할까요?”

“허가가 곧장 떨어진다고 해도 내년 2월 이후 정도로 보셔야 할 겁니다. 겨울철은 아무래도 변수도 많고 양생도 어렵죠.”

“폭설이라도 내리면 며칠씩 중단되니 어쩔 수 없죠.”

신정배는 가능하면 내년에 날이 풀린 뒤에 공사를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나도 고민을 꽤 해봤는데 그러면 너무 늦었다.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공간을 마련해서 퍼플 라벨을 준비해야 했다.

지금 빚어 놓은 것들은 대부분 선주문한 끌루소로 납품이 될 예정인데 반응이 좋아도 추가로 밀어 넣을 물량이 적었다.

더구나 미국 쪽의 판매 루트도 생겼으니 조금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상황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보겠습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거는 안전이에요. 2층과 3층에 올라갈 하중이 클 겁니다.”

“물론이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정배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과설계에 가까운 설계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다.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그의 방식이 틀리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신정배 사장과 인사를 나눈 뒤.

곧장 이삭 기획을 찾아 삼척으로 향했다.

이삭 기획은 죽서루 부근에 있다는데 그 근처에 가보는 거는 처음이었다.

오저당의 주소지는 삼척이나 주요 활동은 대부분 태백에서 이뤄지고 있다.

30분과 1시간의 차이는 꽤 컸다.

더구나 태백에도 대형 마트가 있기에 장 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래서 삼척에 나오는 것은 굉장히 드물었다.

가끔 삼척 시청의 주무관님을 뵈러 나오거나 행정 처리를 할 때가 전부였다.

죽서루에 주차하고 삼거리 쪽으로 나와 골목으로 들어가니 가정집이 나왔다.

그 골목에 있는 오래된 집 중의 하나가 바로 이삭 기획이었다.

“주 사장님, 여깁니다!”

그리고 곧 황동선 대표가 보였다.

그는 대문 밖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서 볕을 쬐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동네 한량처럼 보일 정도였다. 요즘 일이 없다고 하소연하더니 정말인 것 같았다.

“매번 통화만 하고 이렇게 뵙는 거는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요.”

“미국 출장은 잘 다녀오셨나요?”

“덕분에요. 이건 음료수랑 과일인데 직원분들이랑 드세요.”

나는 준비해온 선물부터 내밀었다.

이삭 기획을 찾아갈 거라고 했더니 이모가 뭐라도 사가라고 조언 해주셨다.

그게 예의라고 하셨기에 태백에서 출발하기 전에 사놔야 했다.

“뭘 이런 것까지··· 일단 들어오시죠.”

황동선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강아지였다.

풍성한 새하얀 털을 가진 아이였는 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다.

포메를 닮은 것 같으면서도 푸들 느낌이 나는 것이 부모가 누군지 예측되지 않았는데 시고르자브종인 것 같았다.

그런데 어찌나 깨방정을 떠는지 요리조리 폴짝거리며 뛰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하하! 물진 않으니 걱정 마세요.”

“물어도 전혀 안 아플 것 같은데요.”

“이제 막 2개월쯤 된 솜털이에요. 우리 이삭 기획의 막내이자 보안 책임자죠.”

“든든하시겠어요.”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에 향이는 솜털에게 관심을 갖고 주변을 맴돌았다.

강아지를 처음 보는 거는 아니었으나 녀석의 눈으로 봐도 귀여웠나 보다.

[히히힛! 얘 너무 귀엽지 않아요?]

아니, 그러는 니가 더 귀여워.

솜털이는 뭔가가 자신의 털을 쓰다듬자 그걸 찾아보겠다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꼬리를 잡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쟤가 가끔 저러는데 오늘따라 격하네요.”

“종종 그런 날도 있는 거겠죠.”

“마실 거라도 내드릴 테니 잠시 앉으셔서 기다려주세요.”

황동선은 주방으로 향했다.

그가 권한 곳은 집안 한쪽 편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모두 합쳐서 네 개의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하나가 비어 있었다. 아마도 며칠 전에 퇴사한 직원의 자리인 것 같았다.

현재 남은 직원은 두 명.

그 두 사람은 부부라고 들었다.

원래는 황동선 밑에서 일을 배우던 직원들인데 일하던 중에 눈이 맞았다나.

어쨌든 그들은 오늘 양양 쪽에 외근을 나가서 자리를 비웠다고 들었다.

“커피 믹스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이거밖에 내드릴 게 없네요.”

“그냥 지금 나가서 술이나 한잔 할까요? 낮술 하기 딱 좋은 날이잖아요.”

“차를 끌고 오셨는데 괜찮겠어요?”

“그냥 오늘은 삼척에 방을 잡고 내일 아침에 들어가면 돼죠.”

“그럽시다. 안 그래도 술이 땡기는 날이었어요. 마침 주변에 괜찮은 집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죠.”

합의는 금방 이뤄졌다.

황동선이 타준 커피는 종이컵에 옮겨 담아서 나섰는데 그가 권한 가게는 걸어서 10분쯤 떨어진 작은 횟집이었다.

아직 손님 하나 없는 가게에 자리 잡고 앉자 그는 냉장고에 있는 벽향주를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삼척에서는 우리 술을 찾기 쉬운 편이었다.

“벽향주를 마실까요?”

“저 때문이라면 굳이 오저당 술을 마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하나라도 더 팔아드려야 여기 사장님도 오저당 술을 많이 들여놓을 거잖아요. 저기요! 사장님 주문할게요.”

그렇게 시작한 술자리는 순식간에 3시간이 흘러 저녁 7시까지 이어졌다.

당연히 나는 물론이고 황동선 대표도 그쯤 되니 얼큰하게 취해버렸다.

지금까지 4시간 가까이 대화한 결과.

나는 몇 가지의 사실을 추가로 알아냈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잘나가던 회사를 그만두고 왜 이곳에 내려왔냐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AD 회사 내에서 펼쳐진 사내 정치와 코로나 여파였다.

그가 잡고 있던 줄은 썩은 동아줄이었고 위에 있던 상무부터 싹 다 정리되며 그 영향으로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놈의 사내 정치는 어떻게 하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더라고요. 뭐··· 지긋지긋했는데 오히려 잘 됐죠.”

“그럼, 지금 일하시는 분들도 같은 팀원이셨던 건가요?”

“원래는 저 혼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작게 1인 회사를 차리려고 했는데 이놈들이 죽어도 같이 죽자는 거 있죠.”

“그러셨구나···.”

“등신 같은 놈들이죠. 죽을 자리인 거 알면서도 그놈의 의리가 뭔지.”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그건 나도 황동선 대표만큼은 안다.

매번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몇 번이나 고심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여기서 망하면 나 혼자 슬퍼하고 끝낼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나는 다행인 편이다.

수호와 라니도 있고 향이도 날 지켜줬다.

종종 흔들릴 때가 있으면 이장님과 이모님이 중심을 잡아주기도 했다.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을 나 혼자가 아닌 모두가 같이 헤쳐 나가고 있다고 봐야겠지.

그 외에도 황동선은 우리 오저당에 대한 충고도 많이 해줬다. 그의 눈높이에서 보면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았겠지.

대부분 다 맞는 말이었고 일부는 내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들이었기에 나는 그쯤에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선배님이 오저당에 들어오셔서 그것들을 직접 해주시면 되겠네요.”

“하하! 저 스카우트 당하는 겁니까?”

“맞아요. 오저당의 마케팅 CMO 자리에 모시고 싶어서 온 겁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 표정을 살피더니 이내 그게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오저당의 규모라면 사외 이사로도 충분하실 텐데 굳이 저를 필요로 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왕에 일하시는 거 올인하시라고요.”

나는 이번에 새롭게 확장한 멕시코의 테킬라와 미국 시장 진출 그리고 소주 신제품에 대한 계획을 밝혔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황동선은 점차 내 이야기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새로운 브랜드와 리뉴얼이 예정되어 있었고 현재의 오저당은 백지에 가깝기에 다양한 마케팅 기법을 사용할 기회였다.

그건 광고 대행사를 다니던 이들에게는 항상 꿈꿔오던 로망에 가까웠다.

고객사 위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리 잘해서 광고를 터트려도 성과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걸 보고 다른 광고주가 와도 다시 처음부터 시작되는 곳이 AD회사다.

나의 회사, 우리의 브랜드.

직접 키워내는 참맛은 느낄 수 없다.

장기 거래를 하는 고객사가 있더라도 익숙함은 곧 단조로움으로 변하기에 몇 년쯤 지나면 떠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AD회사를 떠나 제조업을 하는 회사의 마케팅 쪽으로 옮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바뀐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황동선 대표뿐만 아니라 이삭 기획의 직원들까지 데려가겠다는 제안 때문이다.

경력 그대로 모두 인정해주고 연봉 책정을 후하게 해주겠다고 하니 황동선은 마음의 결심을 어느 정도 내린 것 같았다.

“저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네요. 우리 직원들도 일 마무리하고 거의 도착했다니 이쪽으로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죠.”

“잠시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황동선 대표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러더니 한참 동안 안 들어왔는데 향이가 나가 보더니 밖의 상황을 알려줬다.

[이삭 직원들이랑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에요.]

“혹시 분위기는 어때?”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어요.]

“다행이네.”

그렇게 10분쯤 더 지났을까.

황동선은 직원 두 명과 함께 들어왔다.

그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에 자리에 앉자 밖에서 논의한 결과를 알려주었다.

“좋습니다. 오저당으로 들어가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신 조건이 두 가지 있는데요.”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간단했다.

아까 보았던 솜털이를 오저당으로 데리고 가도 되냐는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어려서 혼자 놔두기 애매했던 것 같았다.

뭘 그런 것까지 미리 허락을 받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저당은 술을 빚는 곳이라 조금 예민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크게 문제 되는 일은 아니었다.

한옥 마당 구석 쪽이나 컨테이너에서 머물면 될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도 오히려 내가 반길 만한 이야기였다.

“지금 이 자리부터는 제가 쏘는 거니 더는 지갑 꺼내시면 안 됩니다. 이거슨 선배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학연 따위는 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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