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82화 (82/254)

버번의 흔적 (4)

렉싱턴에서 계약을 마친 뒤.

우리는 시내 증류소 투어까지 일정을 마치고 LA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곳에서 수호는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고 나는 뉴욕에서 온 슈미트와 합류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많은 질문을 했다.

대부분은 렉싱턴에서 계약한 버번 증류소에 대한 것이었다. 어디서 들은 건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카를로스에게 들으신 겁니까?”

“당연하죠. 아니, 이제 겨우 테킬라를 미국에 런칭하는 중인데 버번이라니 추진력이 너무 강한 거 아닙니까?”

“이게 당장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몇 년 뒤를 보고 투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래도 주 사장님과 일하려면 워크 홀릭이 되는 수밖에 없겠네요.”

어감이 조금 묘했다.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슈미트는 멋쩍게 웃으며 예전에 내가 언질을 주었던 것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주었다.

“기회가 왔는데 잡지 못하면 바보죠.”

나와 같이 일하겠다는 의미였다.

사사건건 견제를 받는 심양의 뉴욕 지사장 자리보다 미국 전역을 총괄하는 오저당의 지사장이 더 매력적이긴 했다.

더구나 벽향주의 미국 내 판매량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고 곧 들어올 예정인 돈 레오넬도 기대하는 바가 상당히 컸다.

거기에 버번위스키도 추가되었다.

“제가 오저당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아도 심양의 총판 권한을 회수하고 바크모와 직접 거래하실 거잖아요?”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죠.”

“그러면 어차피 그 책임을 저에게 물을 게 뻔하거든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그렇게까지 할까요?”

“확실합니다. 그 자리가 비면 심양 사장의 아들이 지사장으로 오게 되겠죠. 요즘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더군요.”

슈미트도 LA 지사에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지 그들을 통해 여러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심양과 트러블이 안 생길 수 없겠군요.”

“그건 제가 잘 준비하겠습니다.”

“가능하면 깔끔하게 해주세요.”

당연한 권리의 행사지만,

괜히 적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한동안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당장 처리해야 할 일부터 슈미트와 논의했다.

“아무래도 법인 설립은 지금 당장 해놔야 할 것 같습니다.”

“벌써요? 급하게 진행하셔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법인을 세워야 한국에서 돈을 보낼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 카를로스 돈을 갚죠.”

미국에서 법인을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본금도 필요 없고 미국 내 주소가 없어도 가능할 정도다.

정관도 한국의 것을 가져와서 약간 고치면 되고 아버지의 제자 중에 변호사 한 명을 소개 받아서 진행해도 된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계속 미국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 부분을 언급하자 슈미트는 곧장 무슨 말인지 알아챘다.

“미국에 상주하는 직원을 두고 일을 맡기실 생각이시군요.”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나중에 아래 두고 손발을 맞춰야 하니 적당한 사람으로 추천을 해주시죠.”

내가 사람을 뽑아도 결국에는 슈미트 아래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슈미트는 오저당의 미국 법인 문제에 직접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단순한 이직이라 볼 수 없다.

심양 입장에서는 슈미트가 거래처를 들고 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자칫 배임 행위처럼 보일 수 있는 일은 가능하면 하지 않아야 뒷말이 안 나온다.

그러니 수족처럼 그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여줄 인물이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슈미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내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우선 오저당의 미국 지사는 어디에 두실 건지 먼저 알려주시겠습니까?”

아··· 그걸 말 안 했구나.

미국에 세울 법인은 서부여야 한다.

한국과 멕시코에서 오는 화물선 모두가 서부 해안 쪽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가장 적절한 곳은 역시 LA였다.

롱비치나 다른 항구도 고려해봤으나 KR 마트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

그쪽에서 화물을 내리는 것이 그나마 운송 비용의 절감이 가능했다.

“LA라면 적당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슈미트는 자신의 밑에서 일을 배웠던 직원 한 명을 추천했다. 지금은 팀장급이 되어서 물류 회사에서 일한다고 했다.

“팀장급이요? 당분간은 혼자 일하게 될 텐데 이직을 할까요?”

“아마도 할 겁니다.”

“무슨 이유 때문이죠?”

“얼마 전까지 다니던 직장이 찰스턴에 있었는데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고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왔거든요.”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역색이 강한 나라다.

동부는 보수적이고 겨울에는 춥지만, 서부를 대표하는 캘리포니아는 진보적인 분위기에 날씨도 온화한 편이다.

날씨가 사람들의 행동에 주는 영향력은 꽤 큰 편이다. 미국 내에서 그 정도의 이동은 이민 가는 것과 흡사한 수준이다.

“마침 지금 LA에 있다고 하니 직접 만나보시고 채용하시죠.”

어차피 돈 레오넬이 미국에 들어올 때까지 미국에서 체류할 예정이다.

그전까지는 딱히 할 일도 없기에 시간 여유가 많았다. 내가 알겠다고 답을 하자 그는 깜빡 잊었다며 한 마디를 보탰다.

“그런데 그 친구 성격이 워낙 직설적이라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물론, 그만큼 일 처리 하나는 깔끔합니다.”

“문제를 끌어안고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 오히려 그게 더 편합니다.”

옆에 두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과 미국이란 거리와 시차를 뛰어넘어 같이 일하려면 모든 일 처리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대답을 들은 슈미트는 다행이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러면 약속 잡겠습니다.”

*

약속은 다음 날 바로 잡혔다.

LA 번화가 지역에 있는 카페 안으로 슈미트와 함께 들어서자 한 남자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아프리칸 아메리칸이었다.

짧게 자른 곱슬머리.

동그란 안경과 고급 정장.

외모만 봐도 지적인 느낌이 강했다.

실제로 슈미트와 인사를 나누는 말투도 상당히 차분했다.

동부가 싫어서 돌아왔다더니 말투나 모든 것이 동부 깍쟁이 같은 느낌이었다.

캘리포니아 출신인 것을 몰랐다면 나도 동부 출신으로 오해할 뻔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반갑습니다. 프란시스코 페레즈라고 합니다.”

그는 슈미트와 잠시 인사를 나눈 뒤.

내게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 역시 명함을 꺼내 그에게 건넨 뒤에 일단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 미국에 법인을 세우신다고요?”

“올해는 준비 단계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인다고 보면 됩니다.”

“그건 내가 설명해줄게.”

슈미트는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한국과 멕시코에서 수입되는 주류와 총판 상황 그리고 버번 증류소까지 설명하려니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이십여 분 정도 흐르자.

페레즈는 잠시 손을 들어 슈미트의 말을 멈추게 한 뒤에 한 가지 질문을 했다.

꾹꾹 누르고 있던 인내심의 한계가 온 것 같았다.

“그래서 제가 OGD USA에서 해야 할 일이 정확하게 뭐죠?”

그 부분에 대한 답변은 내가 해줬다.

내년에 본격적으로 지사 설립을 하기 전에 나를 대신해서 미국에서 업무를 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심양과 바크모가 제대로 일을 하는지 지켜보고 문제가 생길 경우에 해결을 하는 것이 그가 해줘야 할 일이다.

당연히 대우는 기존 그대로 팀장급으로 맞춰줄 생각이었다.

“그러면 업무에 대한 오더는 제가 직접 사장님에게 받는 건가요?”

“평소에는 슈미트 씨의 지시를 받으시면 됩니다. 다만, 필요한 일이 생기면 제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셔야겠죠.”

“두 분이 동시에 서로 다른 업무 지시를 내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건 당연히 사장님이 우선이지.”

슈미트는 그 부분에 대해서 깔끔하게 정리를 해줬다. 한동안 고민하던 그는 이번에는 내게 질문을 했다.

어설프게 슈미트만 믿고 따라가겠다는 그런 마음가짐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 부분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뇌를 빼놓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직원은 필요 없었다.

“1년 후에 모든 총판 권한을 OGD USA로 회수하는 거는 확실합니까?”

“그런 확신도 없이 너를 부를 것 같아?”

“그런데 렉싱턴에 계약된 증류소는 추후에 누가 생산 관리하는 건가요?”

“생산 관리는 사람을 따로 뽑아서 맡길 생각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이야기를 듣자 두 사람의 반응은 엇갈렸다. 페레즈는 다행이란 표정을 지었고 슈미트는 꽤 아쉬워했다.

증류소를 직접 운영해보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라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버번 증류소만 따로 법인을 만들 생각은 없으니 OGD USA 밑에 두고 관리 정도는 해주셔야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까?”

내 질문에 페레즈는 고개 저었다.

그는 슈미트와 같이 일하는 것은 택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업무 능력 하나는 슈미트도 인정했기에 나도 그와 함께 일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따로 사무실을 얻진 않았다.

1인 사무실 정도는 구해주려 했으나 페레즈는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다.

길바닥에서 시간을 버릴 바에 그 시간에 일을 하나라도 더하겠다는 주의였다.

어차피 내가 없더라도 슈미트가 그의 업무를 지시하고 컨트롤할 테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능력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소개 받은 변호사와 함께 그는 미국 현지 법인을 곧장 신청했다.

승인이 나오는데 1주일에서 2주일 정도 걸리는 데 나는 앉아서 결과만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중간에 한 가지 변수가 생기긴 했다.

처음에는 해외 지사로 만들려고 했으나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만류했다. 소송의 나라라고 불리는 미국이기 때문이다.

해외 지사는 한국 법인의 지점으로 분류돼서 막대한 소송이 벌어지면 본사인 오저당이 책임을 져야 한다. 반면에 현지 법인은 그런 책임은 없으나 발생하는 이익을 배당금 형태로 지급받는다.

나는 안전한 형태를 택했다.

상식적인 선에서 배당금만 책정한다면 투자금 회수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오션 코리아 같은 글로벌 주류도 순이익의 370%나 본사로 배당금 형식으로 보냈던 적도 있었다.

어차피 그건 나중의 일이다.

OGD USA에서 번 돈은 당분간 버번 증류소에 대부분 들어갈 예정이다.

수십 억이나 재투자하려면 오저당으로 배당금을 가져오는 것은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렇게 여러 일을 하는 사이.

기다리던 화물선이 LA에 도착했다.

돈 레오넬은 화물선에서 하역되자마자 곧장 바크모에 납품되었고 이내 전국에 있는 지점에 나눠서 보내졌다.

당연히 그중에는 현재 머무는 LA에 있는 바크모 매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판매가 시작되는 날에 맞춰서 페레즈 그리고 슈미트와 함께 매장을 찾아가자 입구 앞에서 카를로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어! 채무자 오셨는가.”

“돈 빌린 지 겨우 1주일 지났거든요.”

“빌려준 사람이나 빌린 사람이나 잊지 않으려면 계속 언급을 해줘야 하더군.”

“걱정하지 마세요. 법인 신청 해놨으니 저 귀국하면 바로 쏴드릴 거예요. 그나저나 돈 레오넬 반응은 어때요?”

나는 무엇보다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웃기만 할 뿐이지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진 않았다. 답답한 것은 슈미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냥 들어가서 직접 보죠.”

그가 앞장 서자 나와 페레즈가 뒤쫓아 들어갔는데 바크모는 수많은 술로 가득 채워진 곳이다. 그곳에서 우리 술을 단숨에 찾는 것은 쉬운 편은 아니었다.

그나마 주종에 따라 섹터를 나눠놓은 덕분에 테킬라만 따로 진열한 곳에서 돈 레오넬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는 한 병의 술도 진열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 진열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내가 카를로스에게 당한 걸까?

설마 지금 와서 우리 술을 짬시키고 등에 칼을 꽂은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 내 생각이 표정에도 나타난 건지 카를로스는 뒤늦게 배를 잡고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냐고 묻자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진열대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 ‘품절’ 보이지? 오늘 판매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500병은 오픈 1시간 만에 다 나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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