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대신 닭 (3)
뫼리스는 소주를 싫어한다.
첫 만남에서 그가 직접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소주는 증류식이 아닌 저렴한 희석식을 의미했던 것이었다.
한국의 전통주를 다루기 시작하며 소주에 대한 편견은 오래전에 없어졌다.
“이거 기대되는군요.”
다른 곳도 아닌 오저당의 술이다.
뫼리스는 그걸 생각하면 기본 이상은 할 것이 분명하다며 우리를 추켜세웠다.
그리고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며 내가 따라준 잔을 들이켰다.
입에서 잠시 오물거린 뒤.
서서히 한 모습을 마신 그는 자연스럽게 깊은 탄성을 뱉으며 우릴 바라봤다.
어떻게 이런 술을 빚을 수 있냐는 그런 눈빛이었다.
“역시 오저당에서 빚은 술은 어떤 술이든지 기본 이상은 확실히 하는군요.”
“마음에 드십니까?”
“이거··· 벽향주와 비교해도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인데요.”
하지만 한계가 분명히 있기는 했다.
1년 숙성한 퍼플 라벨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방금 마셔봤기에 확실히 차이를 느끼는 것 같았다.
“당연하죠. 그거랑 비슷한 수준이면 1년이나 숙성해가며 퍼플 라벨을 빚을 이유가 없잖아요.”
“하하! 그렇기는 하죠.”
“이 정도 술이면 돈 레오넬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내 질문에 뫼리스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당장 돈 레오넬의 확보가 어렵다면 차선책으로 소담 소주를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혹시 돈 레오넬은 언제쯤 저희쪽에도 출고가 가능한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전혀 예상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어느 정도 팔릴지 아직 예측할 수가 없어요.”
“적어도 올해 안에는 불가능하겠죠?”
확실히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년은 조금 기대를 해도 될 거라고 작게나마 희망은 주었다.
OGD 멕시코의 증류소 바로 옆에 새롭게 건물 하나를 다시 지을 예정이다.
월간 생산량을 지금보다 몇 배 이상으로 더 늘려야 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다행히 추가 투자는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바크모에서 들어온 대금만으로도 자체적으로 공사가 가능했다.
3개월도 안 되는 사이.
순수익만 수십만 달러가 넘어갔다.
한화로 몇억 정도는 되니 건물을 짓고 설비를 추가하는데 부족하진 않았다.
지금 목표는 기존 생산량이던 10만 병을 최소 50만 병까지 늘리는 것이다.
카를로스가 해준 조언 때문이다.
이 기세를 타고 테킬라 판매량 상위권에 안착해야 한다. 그러려면 적어도 그 정도 생산량은 확보해줘야 한다고 했다.
나도 그와 의견이 같았기에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나마 희소식이네요.”
“서운하실 필요가 없는 것이 한국도 돈 레오넬 정식 수입되려면 멀었습니다.”
“혹시 한 병도 안 들어온 건가요?”
그렇지는 않다며 고개 저었다.
몇 박스 정도는 국내에도 들어왔다고 밝히자 뫼리스의 표정은 밝아졌다.
그걸 본 나는 웃으며 한 병은 선물로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무슨 맛인지 정말 궁금했는데 구할 방법이 없었거든요.”
“우리가 남도 아니고 그 정도의 부탁은 언제든지 하셔도 됩니다.”
“소담 소주의 초기 생산량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한 설명은 수호가 해줬다.
제품은 40도와 20도로 나누어지고 매달 50만 병 가까이 생산할 수 있다고 하자 뫼리스는 상당히 반가워했다.
“그러면 끌루소에서는 소담 소주를 10만 병 주문하겠습니다.”
“첫 주문인데 그렇게 많이요?”
“오저당 덕분에 승진해서 추가로 얻은 바잉 버짓이 제법 됩니다.”
그 외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벽향주나 오풍주에 비해 소담 소주는 유통할 수 있는 기간이 훨씬 길다.
아무리 판매가 부진해도 그 정도는 문제없이 팔 수 있다고 했다.
“경험해보니 오저당의 술은 기회가 있을 때 선점해야지 마음이 편하더군요. 제가 작년에 그것 때문에 꽤 후회했습니다.”
“저희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죠.”
“그리고 요즘 끌루소에서 오프라인 영업을 공격적으로 하고 있어서 매장을 통해 파는 양도 제법 늘었습니다.”
나도 그 부분은 인정했다.
프랑스에 사시는 분들의 제보에 의하면 이제는 제법 규모가 큰 마트에서 우리 술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출시 일정에 대한 양해를 구해야 했다.
“소담 소주의 출시일은 4월 말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은가요?”
“퍼플 라벨과 거의 맞물리는군요.”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차라리 잘됐네요. 한국에서 물건을 실을 때 두 가지 술을 한 번에 싣죠.”
길어야 1주 정도 차이가 난다.
뫼리스는 그걸 분리하지 말고 동시에 끌루소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도 그게 편하기에 뫼리스의 의견대로 하기로 했다.
“혹시 끌루소에서 소담 소주 런칭 프로모션을 진행할 수 있을까요?”
“일단은 제가 제안서를 올릴 생각이긴 합니다만, 지금 당장 어떻게 될 거라고 확답을 드리긴 어렵습니다.”
“만약 진행하시게 되면 오저당에서 일정 부분은 부담할 의향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죠.”
지금까지 오저당은 주류 상사에서 진행하는 오프라인 프로모션을 지원하고 있었으나 해외 쪽은 그런 적이 없었다.
끌루소나 KR 마트의 경우에는 우리가 신경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팔아주었다.
굳이 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벽향주였기에 가능했다.
수출 전에 국내에서 대통령상까지 수상하며 어느 정도 인지도와 셀링 포인트가 확실하게 잡혀 있었던 술이다.
반면에 소담 소주는 그런 게 없다.
정말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인지도를 끌어 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그게 쉬울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혹시 어떤 형태로 지원하실 생각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보통 여기서 선택지는 별로 없다.
공급 가격을 낮춰서 준다거나 나중에 빽마진을 챙겨주는 방법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는 돈이 아닌 사은품 형태로 지원을 해줄 생각이었다.
나는 일단 그와 함께 사무실로 갔다.
여기서 입 아프게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편했다. 회의실에 들어간 나는 라니부터 안으로 불러들였다.
“끌루소에서 온 뫼리스입니다.”
“반갑습니다. 메일을 주고받고 통화도 자주 했는데 이렇게 실제로 뵙는 거는 처음이네요.”
“그러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라니는 작년부터 뫼리스와 업무적인 소통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상당히 반갑게 그를 맞아주었다. 그러는 사이 회의실에 온갖 판촉물이 하나둘 들어왔다.
기존에 만들었던 ‘오졌다 오저당’ 술잔은 시작에 불과했다.
스프라이트 컬렉션 판촉물.
그 종류는 상당히 다양한 편이었다.
향이와 판초를 캐릭터로 삼아 전용 술잔도 만들었고 열쇠고리부터 머그잔 그리고 오프너 같은 것도 만들었다.
“와··· 이런 거는 언제 준비한 겁니까?”
“소담 소주 출시와 함께 판촉물로 사용하려고 몇 개월 전부터 준비했죠. 일부는 판매를 할 용도이기도 합니다.”
“엇! 그러고 보니 소담 소주와 돈 레오넬 라벨이 비슷하던데 맞나요?”
캐릭터 판촉물을 본 뫼리스는 조금 뒤늦게 스프라이트 컬렉션을 눈치챘다.
보틀 같은 것보다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 술의 맛이기 때문에 놓쳤던 것 같았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테킬라인 돈 레오넬 그리고 소주인 소담은 같은 컬렉션으로 묶어서 홍보를 할 예정입니다. 아마 소담 쪽이 당분간은 돈 레오넬의 덕을 조금 보겠죠.”
거기에 버번위스키도 나중에 추가할 거라 이야기를 하자 뫼리스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버번 증류소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라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건 무슨 소리인가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OGD USA에서 버번 증류소를 복원할 예정입니다.”
나는 지난번에 미국 출장에서 버번 증류소 자리를 사들였다고 설명해주었다.
폐건물을 샀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옛 증류소에서 빚던 레시피가 거래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뫼리스는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역시 뫼리스는 그 가치를 알아봤다.
옛 레시피 그대로 만든다고 지금 시대에 먹힐 거라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스토리가 흥미롭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러다가 이탈리아의 와이너리나 스코틀랜드에 있는 스카치 증류소도 오저당에서 인수하시는 거 아닙니까?”
뫼리스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나는 진심을 담아 좋은 매물이 있다면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기회가 닿는다면 매입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진심이신 건가요?”
“물론, 지금 당장은 어렵고요. 우선은 버번 증류소부터 생산 가능한 수준으로 복구하는 게 우선이거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좋은 매물이 있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좋은 술이 사라지는 일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며 뫼리스는 내게 그런 곳이 생기면 연락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무 데나 막 찔러주시면 안 됩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여기 있는 판촉물 중의 몇 가지를 소담 소주 런칭에 지원해드릴 생각인데 어떻습니까?”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대화를 하면서도 뫼리스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있는 판촉물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는 곧 마음에 드는 것을 쇼핑하듯 골라서 자신 앞에 놓았다.
“혹시 사진을 찍어서 끌루소의 직원에게 공유를 해도 될까요? 이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얼마든지 찍으셔도 됩니다.”
나는 흔쾌히 그 부탁을 승낙했다.
끌루소에서도 담당 직원이 따로 있을 테니 그들과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뿌듯한 얼굴로 라니가 바라보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오늘이 오저당 식구 외에 다른 이에게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지난 겨우내 마케팅 부서 사람들과 함께 고생했던 보람이 느껴진 것인지 라니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니 기다려 봐.’
*
뫼리스가 다녀간 이후.
소담의 본격적인 생산이 시작됐다.
기존에 어느 정도 레시피를 완성해놔서 마지막 조율 정도는 금방 마무리되었다.
증류기를 통해서 만들어진 알코올은 숙성 탱크에 저장되었고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숙성을 진행하면 될 뿐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최근에 한 가지 기술이 추가됐다.
몇 년 전에 농업기술원에서 개발한 기술인데 증류주에 공기를 주입해서 화학 반응을 끌어내는 방식이었다.
기존 방식에 비해 숙성 기간이 짧아지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 헛소리는 아니었다.
가뜩이나 오저당은 요정의 효과를 보고 있는데 거기에 그 기술까지 더해지니 조금 더 깊은 맛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기다림의 시간을 가질 무렵.
오저당은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내 구지노 배우가 한국에 입국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지노가 입국하는 당일날.
나는 라니와 호세 그리고 촬영팀으로 쌍둥이와 류미진 대리 등과 함께 인천 공항까지 픽업하기 위해 나갔다.
인원이 많아 차량 두 대로 움직여야 했는데 내가 운전하는 허머에는 액션캠이 네 대나 달려 있었다. 그게 은근히 신경이 쓰여 운전을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거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카메라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은 구도가 나온다고 쌍둥이가 강조했잖아. 그러니 네가 며칠만 참아.”
라니는 지금 상황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 키득거리며 다독여줬다.
나름 할리우드에서 꽤 유명한 구지노 배우를 처음 보는 건데 전혀 긴장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하긴 긴장할 필요가 없지.
이번 촬영은 할리우드 스타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놀러 온 친구를 만나는 듯이 자연스러운 게 컨셉이다.
다음 달에 한국에서 오디션을 보는 역할 이미지에 최대한 맞춰야 하기에 오히려 구지노가 요청한 사항이었다.
당연히 우리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인천 공항에서 얼마나 대기했을까.
수많은 이들이 입국하는 것을 지켜보고 서 있던 나는 한 무리의 인파 속에서 구지노를 간신히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 속의 구지노는 정말 흔한 외국인 관광객처럼 보일 정도로 평범했다.
할리우드 파티에서 보았던 화려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구지노를 직접 보았던 나조차 긴가민가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라니가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정말 저 사람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