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97화 (97/254)

더는 우연이 아니다 (1)

품평회 접수 전까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뒤늦게 확인한 항목 때문이었다.

올해는 심사할 때 술 품질인증을 받은 양조장은 약간의 가산점이 있다고 했다.

“인증을 꼭 받아야 하는 건가?”

“아니, 그렇지는 않아.”

“그러면 패스하는 거는 어때? 이거 내용 읽어 보니까 제법 귀찮을 것 같은데.”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있으면 좋겠지.”

앞날은 알 수 없지 않은가.

아주 미세할지 모르는 그 차이 때문에 수상을 놓칠 가능성도 분명히 있었다.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받아놔야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수호는 귀찮게 됐다며 투덜거렸다.

“언 발에 오줌 누는 것도 아니고 굳이 왜 이런 항목을 넣은 건지 이해가 안 되네.”

수호의 마음은 이해가 되었다.

술 품질인증은 강제되는 것이 아니다.

2011년도부터 농림축산식품부가 전통주 품질 향상을 위해 시작한 제도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주류제조 업체가 그 제도를 외면하고 있는 중이다.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걸 받는다고 바뀌는 것은 없다.

여러 항목에 대해 검증까지 받아 가며 인증을 받는 이유는 고객에게 우리 술은 잘 관리되고 있다고 어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홍보가 안 되었다.

사람들은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른다.

당연히 판매량에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증을 받더라도 3년이란 인증 기간이 끝나면 대부분이 재인증을 포기할 정도다.

오저당도 거기 포함되어 있었다.

여길 인수 받으며 확인했던 자료에는 작은할아버지도 그걸 한번 받았는데 재작년쯤에 인증 기간이 끝났다.

당연히 재인증은 하지 않았다.

“제도 자체가 사라질 위기니까 다시 활성화하려고 하는 노력인 거지.”

“접수하는 날이 코앞인데 그전까지 인증을 받을 수 있을까?”

“전화해서 물어봤는데 다행히 대부분 일주일 이내에 끝난다고 하더라. 그 정도면 접수 기간을 넘기진 않을 거야.”

그쪽도 나름대로 난리였다.

갑자기 인증이 폭증했다고 한다.

당연히 주류 품평회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누가 기획한 건지 몰라도 의도가 적중하긴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었다.

술만 그쪽으로 보내면 되는 게 아니라 제조 시설을 확인하러 직접 온다고 했다.

거기에 품질 관리를 위해 만든 여러 항목도 통과해야 했다.

“뭐, 그건 내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 너랑 호세는 오풍주 빚는 거나 신경 써. 바쁜 것만 처리되면 나도 곧장 갈게.”

“이제는 너 없어도 알아서 잘 하거든.”

응, 전혀 걱정 안 하고 있어.

벽향주는 몰라도 오풍주는 수호에게 맡겨도 불안하지 않았다. 제품 개발부터 참여한 탓인지 이해도가 상당히 높았다.

선생님이 알려주신 그대로 움직이는 수준은 이제 벗어났다.

오풍주를 매일 빚는 것은 아니다.

일주일 중에 서너 번은 일반 막걸리를 빚고 단 하루만 오풍주를 만들었다.

나중에는 반대로 역전될 수도 있으나 이제 런칭하는 단계인지라 아직 생산량을 무턱대고 늘릴 수는 없었다.

막걸리라 더 조심스러웠다.

벽향주는 안 팔리면 숙성시키면 되나 오풍주는 관리도 어렵고 적정 숙성 시기를 넘으면 산패되기 시작한다.

괜히 추가 숙성을 한 달까지만 잡은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연스럽게 호세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요즘 종종 멍하니 앉아 있는 일이 자주 생기고 있는 탓이었다. 혹시나 멘탈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다.

“향수병 걸린 게 아닐까?”

“하긴 그 녀석 혼자 한국에 온 지 벌써 2년 가까이 되었다고 하더라.”

“걱정이네.”

남 일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도 그랬거든.

10대 중후반에 미국에서 살 때.

어떻게든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 시기에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던 친구들도 모두 이곳에 있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낯선 이국의 땅에서 사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더구나 내가 내린 결정도 아니었다.

부모님이 선택권을 주기는 했으나 한국에 혼자 남는 것은 10대 초중반이던 나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환경이었다.

당연히 부모님을 택해야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리 나쁜 결정은 아니었다. 초반에는 여러모로 개고생을 했으나 영어도 능숙할 정도로 배웠고 보는 시야도 넓어졌다.

“푸훕! 걱정하지 마. 그 녀석 요즘 인생 계획 세우는 중이야. 대충 이야기 들어 보니 나중에 멕시코로 돌아가면 너처럼 데킬라 증류소를 인수하고 싶다더라. 포부가 장난이 아니야.”

“확실해?”

“내가 곁에서 유심히 살피고 있는 중이니 걱정 말고 네 할 일이나 열심히 해.”

“알았어. 그건 너한테 맡길게. 그나저나 품평회에 보낼 택배는 준비 다 됐어?”

“물론이지.”

수호가 잠시 후에 가져온 박스에는 벽향주와 오풍주 그리고 일반 막걸리가 각각 열 개씩 들어 있었다. 출품하는 제품당 열 개씩이라 보내라고는 했다.

하지만 너무 부족해 보였다.

혹시 모자랄 수도 있잖아.

이왕이면 여유분까지 넉넉하게 보내야지. 나중에 남을지도 모르나 협회 쪽에서 나눠서 마시든지 하겠지.

설마 버리기야 하겠어.

“이런 데 아끼는 거 아니야. 그냥 한 박스씩 보내버리자.”

*

대한 주류 협회의 나태영 대리.

그는 요즘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칼퇴근을 하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그 혼자만 유독 바쁜 것은 아니었다.

“네, 대한 주류 협회입니다.”

“꼭 인증을 받아야 하는 거는 아니고 가산점이 조금 더 생기는 겁니다.”

“출품하시려는 제품이 있으시면 각각 열 개씩 보내주셔야 합니다. 그보다 적으면 심사하는데 부족할 수 있습니다. 네네, 그럼 수고하십쇼.”

다들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평소 잠잠하던 전화도 계속 울렸다.

주류 품평회가 곧 열릴 예정인데 그 진행은 협회가 대행하고 있었다.

협회의 일 년 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라고 봐도 되었다.

첫 품평회는 4년 전에 시작됐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태영은 신입 사원에 불과했는데 이게 이렇게 커질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참가하는 업체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업체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어느 정도 관심을 받는 수준이 됐다.

품평회를 진행하는 모든 과정을 영상으로 투명하게 공개한 덕분이다.

그 모든 일의 중심에는 그가 있었다.

지금도 그가 촬영하고 편집한 영상은 너튜브에서 볼 수 있는데 조회수가 무려 수십만 회에 달하는 클립도 있었다.

‘영혼을 갈아 넣은 덕분이지.’

처음에는 취미처럼 시작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서서히 욕심이 났다.

구독자가 어느덧 10만 명에 달할 정도이니 결코 작은 채널은 아니었다.

무슨 협회 채널을 그렇게 많은 이들이 구독하냐고 하겠지만, 평소에는 국내외의 다양한 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술에 대한 히스토리를 재미있게 썰을 풀듯이 말하니 은근히 팬들이 많아졌다.

“나 대리! 이거 옮기는 것 좀 도와줘.”

그때 고석 과장이 그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니 택배 상자 수십 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딱 봐도 무게가 상당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는 뻔했다.

십중팔구 전국 각지의 양조장에서 보낸 술일 것이다.

“오늘도 엄청나네요.”

“난 벌써 내년이 걱정된다.”

“올해가 아니고요?”

“품평회 때문에 협회에 가입하는 양조장이 계속 늘어나고 있잖아. 이대로 가면 내년부터 진짜 박 터질 것 같아.”

고석 과장의 말대로 매년 협회에 가입하는 양조장의 수가 느는 중이다.

그들의 목적은 대부분 비슷했는데 품평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나태영의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 덕분에 내년에 협회장님이 재임하실 거라는 소문이 자자하잖아요.”

“충분히 자격이 있으시지. 협회 규모가 3년 전에 비해 거의 두 배는 커졌잖아.”

“거기에 우리 지분도 있다는 거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너도 알다시피 그렇게 쪼잔한 분은 아니야. 지난해에도 품평회 끝내고 일주일씩 휴가도 주셨잖아.”

당연히 잊지 않고 있었다.

정말 꿀 같았던 일주일이었다.

품평회를 하며 쌓인 피로를 씻고 가족과 함께 보내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고 과장님한테는 비밀이지만, 따로 휴가비를 챙겨주시기도 하셨다.

그러는 중에도 둘은 쉬지 않고 입구에 쌓인 박스를 안으로 옮겨야만 했다.

“으랏차, 더럽게 무겁네.”

“다들 뭐 이렇게 많이 보내는 건지 모르겠네요. 분명히 제품당 열 개만 보내면 된다고 했는데 말이죠.”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잖아.”

“그나저나 이제 더 들어갈 공간이 없는데 어쩌죠?”

협회에는 두 개의 거대한 업소용 냉장고가 있지만, 이미 그곳도 거의 차서 더는 술을 넣을 공간이 없었다.

냉장 보관이 필요 없는 청주와 소주 등을 제외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그만큼 탁주와 약주의 숫자가 많았다.

“어쩌기는 뭘 어째. 품평회에 사용할 것들 제외하면 우리가 마셔서 없애야지.”

“또 집에 가져가라고요?”

“야야. 우리 집 냉장고도 막걸리로 가득 찼어. 내가 그것 때문에 우리 와이프한테 얼마나 잔소리 듣는 줄 아냐?”

“저는 혼자 살아서 냉장고가 훨씬 더 작잖아요. 이제 물 넣을 공간도 없어요.”

버리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주류 협회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일이 아까운 술을 폐기 시키는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 술을 흘리는 것조차 조심하는 이들이다. 술을 빚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아파트 경비실 돌아다니면서 퇴근하고 드시라고 경비 아저씨들한테 하나씩 돌리고 있지.”

“저는 빌라인데···.”

“그건 알아서 하고, 내일 스코틀랜드에서 이언 테넌트 마스터 디스틸러 온다고 하지 않았어?”

“아침 7시에 인천 공항에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나태영 대리가 한숨을 내쉬자 고석 과장은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협회에서 그나마 영어가 가능한 직원이 나태영 밖에 없어서 이런 일은 그가 담당했다.

다른 심사 위원들은 직접 가서 모셔오진 않으나 테넌트는 어렵게 섭외한 위원장이라 직원들이 챙겨줘야 했다.

경력도 다른 이들에 비해 거의 15년 이상은 많았고 연세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벽부터 움직이는 것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하려면 5시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

상당히 피곤한 날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 양반은 사람 피곤하게 맨날 그런 시간대에 오는 거야? 호텔은 작년에 머물던 거기로 다시 잡아뒀지?”

“네! 공항에서 픽업해서 곧장 그쪽으로 모실 거예요.”

“내일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하니 오늘은 일찍 퇴근해.”

반가운 소리였다.

알겠다고 대답을 한 뒤.

나태영 대리는 곧 퇴근길에 올랐다.

집 앞에 도착한 그는 차에 싣고 온 박스를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온기조차 없는 집이었으나 그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안식처였다.

퇴근 후에 마시는 맥주 한 잔.

그거만 있으면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맥주가 아니라 막걸리를 마셔야 할 것 같았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던진 그는 박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여러 막걸리가 있었다.

과장님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서둘러서 나오느라 어느 양조장 것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이것저것 종류별로 담아왔다.

그런데 그중에 조금 독특한 막걸리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 막걸리 조금 독특했다.

일반적인 막걸리는 확실히 아니었다.

디자인도 남달랐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이 가격이 조금 있어 보였다.

잠시 라벨을 확인해본 나태영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오··· 이거 오저당 막걸리잖아? 처음 보는 건데 새로 출시한 제품인가?”

오저당이 최근 꽤 유명해졌지만, 나태영은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국내 전통주에 관련된 조사를 하던 프로젝트가 있어서 직접 가보기도 했다.

올해 오저당이 문을 닫았다고 해서 안타까웠는데 보기 좋게 재기했다.

그곳을 물려받은 사장이 상당히 젊다고 들었는데 수완이 꽤 좋은 것 같았다.

과연 벽향주만큼 괜찮을까.

이미 그는 벽향주를 맛보았다.

여전히 쉽게 구하기 어려웠으나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겨우 구할 수 있었다.

그때 느낀 감정은 정말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웠다.

모처럼 두근거릴 정도였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기에 그는 곧장 잔을 하나 꺼내와 오풍주라 이름이 붙여진 막걸리를 가득 따라서 단숨에 들이켰다.

그 순간에 느껴지는 맛은 뭐랄까.

크리미한데도 불구하고 무척 깔끔했다.

자신이 도대체 뭘 마신 건지 의심될 정도였다. 아주 잠시나마 우유 맛도 살짝 감도는 느낌이었다. 이걸 과연 막걸리의 범주 안에 넣어도 되는 걸까.

“우···와! 이건 도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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