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02화 (102/254)

기쁘다! 산타 오셨네 (2)

크리스마스가 언제였더라.

이미 지난 지 며칠쯤은 되었다.

내일모레면 새해가 밝아올 시기다.

우주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수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너는 아직 낭심··· 아니 동심이 남아 있구나.

“루돌프는 주차 잘해놓으셨다니?”

“일단 네가 지금 나가서 직접 봐봐. 외모가 완전 산타 그 자체라니까.”

“뭐라는 거야.”

콧방귀를 뀌며 밖으로 나가자.

수호의 말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하얀 턱수염이 풍성한 외국인 할아버지 한 명이 양조장 앞에서 서성거렸다.

심지어 붉은색의 점퍼까지 입고 있어서 수호가 말한 것처럼 산타를 닮긴 했다.

확실히 관광객은 아닌 것 같았다.

이곳은 겨울에 사람이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길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았다.

일부러 찾아오는 것도 쉽지 않은 곳이라 현송 주류도 처음 화물차를 보냈을 때 근방에서 꽤 헤맸었다.

‘수호 이 녀석 공부를 헛했네.”

호세와 함께 열심히 공부하더니,

외국인이라고 도망쳐서 들어온 거였다.

아마도 우주 역시 마찬가지였던 거겠지.

언어는 자신감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줬는데 아직 거기까진 무리였나.

이럴 때는 영어를 써야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곳에 떨궈 놓으면 확실히 늘어난다.

당연히 그건 내 경험담이기도 했다.

어쨌든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나눴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반갑습니다. 여기가 오졌다 양조장이 맞습니까?”

“크음··· 맞습니다만.”

발음상의 문제 때문일까.

오저당이 오졌다처럼 들렸다.

난데없이 양조장 이름이 바뀌었으나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긴 우리 술이 좀 오지기는 해.

어감도 나쁘지 않아서 이참에 오졌다로 바꿀까도 살짝 고민되는걸.

“다행이네요. 오늘 아침부터 계속 전화드렸는데 통화가 안 되더군요. 그래서 무작정 오긴 했는데 양조장에 아무도 안 계셔서 조금 난감했었습니다.”

“다들 창고에 있어서 손님이 오신 줄도 몰랐네요. 그런데 혹시 누구시죠?”

“저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이언 테넌트라고 합니다.”

아··· 맞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더라.

주류 품평회에서 자주 카메라가 잡았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대화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 혹시 심사 위원장님 아니십니까?”

“하하. 맞습니다. 제가 그때 맛을 본 술맛을 잊을 수 없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무려 마스터 디스틸러다.

선생님도 명인 수준에 올랐지만,

해외에서 오신 분이라 더 특별했다.

우리보다 수십 년 이상이나 술을 빚어오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하신 분이었다.

테넌트와 안으로 들어서자.

수호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다들 이 외국인 할아버지가 왜 나타난 것인지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이 익숙한지 테넌트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다.

“신기하네요. 이곳은 한국의 다른 양조장과 많이 다른 느낌입니다.”

“뭐가 다른지 알 수 있을까요?”

“일단··· 기본적으로 다들 너무 어려요.”

테넌트는 우주와 유성 쌍둥이 형제를 바라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보통의 양조장에서 우리 같은 연령대는 쉽게 찾아보긴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쌍둥이들은 방학 중이라 그렇지 2월에 졸업 전까지는 아직 학생 신분이다.

“저 친구들은 이제 곧 성년이 되어서 어제 첫 출근을 했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래도 다른 한국의 전통주 양조장에 비해서 젊은 것은 확실하죠.”

그에 관련된 통계는 없지만,

최소 40대에서 50대 이상은 될 것이다.

저번에 품평회에서 보았던 양조장 관계자분들의 연세는 다들 적지 않았다.

그나마 새로 유입되는 젊은 층은 전통주가 아닌 맥주 쪽으로 많이 갔다.

나 같아도 그랬을 것 같았다.

대중성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유통 기한이 짧은 막걸리보다 맥주가 주류 상사 입장에서도 편했고 전통주보다 값이 싸다는 장점이 있다.

더구나 요즘은 편의점 같은 곳에서도 쉽게 다양한 맥주를 접할 수 있잖아.

우리도 종종 시내에 나갈 때마다 새로 들어온 맥주가 있으면 하나씩은 사 왔다.

“그런데 마스터 디스틸러께서 어떻게 이렇게 먼 강원도까지 오신 겁니까?”

“그냥 편하게 테넌트라 불러주세요. 여기 온 이유는 순수한 호기심과 개인적인 욕심이 살짝 생겨서 참을 수 없더군요.”

“우리 술에 대한 호기심은 알겠는데 개인적인 욕심이란 것은 뭘까요?”

테넌트가 유별나다는 것은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심사위원장은 핑계에 불과했고 국내 양조장을 찾아다닌다나.

저번에는 최우수상을 수상한 안동의 어느 양조장을 찾아갔다고 들었다.

“이번에 심사하면서 마신 거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이걸 도대체 구할 수 있어야죠.”

“벽향주를 찾으시는 건가요?”

“아니요. 저는 탁주가 더 맛있더군요.”

“오풍주가 더 좋으셨다고요?”

“하지만 결국에는 벽향주가 더 많이 득표해서 대통령상을 탔지요. 어차피 둘 다 오저당의 술이니 상관없겠지만요.”

아니요, 저는 무척 기뻐요.

오풍주가 더 아픈 손가락이거든요.

역시 마스터 디스틸러 정도는 되어야 오풍주의 진가를 알아보시는군요!

이 사람 생각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대로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면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은데, 남은 오풍주가 있으신가요?”

너무나 애절한 눈빛이었다.

추위에 노출되어 붉게 달아오른 뺨과 코 때문인지 몰라도 더 처량하게 보였다.

그만큼 오풍주에 대한 진심이 엿보일 정도라 온풍기 앞에 의자를 놔주었다.

“잠시 몸부터 녹이고 계세요.”

우선은 따뜻한 차부터 드려야 할 것 같았다. 양조장에서 머그잔에 녹차를 타오니 그의 곁에는 호세가 있었다.

영어도 제법 잘하는 녀석이기에 나 없는 사이에 테넌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제는 특별할 게 없었다.

역시나 술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호세는 테넌트가 일하는 스코틀랜드 증류소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묻고 있었다.

그건 나도 궁금하기에 녹차를 건네고 그의 옆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마스터가 일하고 계신 곳은 스코틀랜드의 어디에 있는 건가요?”

“제가 일하는 글렌아워는 하이랜드 지역에 있는 스페이사이드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딘지 잘 모르겠죠?”

“글렌피딕과 맥캘란 증류소가 있는 곳이죠.”

스카치 위스키에 대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두 증류소는 워낙 유명해서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었다.

참고로 글렌이란 단어는 게일어로 계곡이란 뜻이고 글렌이 포함된 상표만 백칠십여 곳에 달한다고 들었다.

“마스터가 빚으신 글렌아워의 위스키를 마셔본 적이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위스키만의 특유한 과일 풍미와 달곰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내가 그의 증류소에 대해서 아는 것들을 이야기하자 테넌트는 꽤 기뻐했다.

아직 글렌아워는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증류소는 아니라 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는 절대 짧지 않았고 유럽과 현지에서는 꽤 명성이 높은 편이었다.

“역시 오저당의 오너이자 디스틸러답게 아시는 것이 많으시군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틈틈이 여러 술에 대해 공부하는 중입니다.”

“그건 너무 겸손한 거죠. 오풍주와 벽향주만 보더라도 이미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것으로 보입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대화는 오래가진 않았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당장 오늘 끝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

이걸 어서 끝내놔야 내일부터 벽향주를 빚을 수 있기에 미룰 수는 없었다.

하루가 늦을수록 출고가 밀리는 터라 나는 테넌트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옹기 세척 작업을 재개해야 했다.

그러자 그는 우리 옆으로 다가와서 일을 하는 모습을 아무런 말 없이 지켜봤다.

상당히 흥미로워하는 눈빛이었다.

‘마스터가 위스키를 빚을 때 사용하는 오크통과는 완전히 다르겠지.’

그렇게 두어 시간쯤 작업했을까.

해가 살짝 기울어질 무렵이 되자 마침내 옹기의 세척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젖은 상태로 놔둘 수는 없기에 건조를 위해 숙성 창고의 온도를 최대한 올려놨다.

숙성 창고의 높이가 다른 일반적인 창고에 비해 낮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숙성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적정 온도를 맞추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때까지도 테넌트는 아무런 말 없이 우리의 작업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중간에 내가 내드린 오풍주를 마시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얼마 되지 않는 양이라 그런지 더 집중해서 천천히 음미하고 계셨는데 얼핏 보면 와인을 마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이죠.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시간을 내서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네요.”

“언제 출국하십니까?”

“연말은 여기서 보내고 일주일 후에 귀국하는 것으로 일정을 바꿨습니다.”

마스터 디스틸러가 그렇게 길게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걸까. 나는 오저당에서 전혀 벗어날 수 없기에 그게 궁금했다.

그러자 테넌트는 오히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디스틸러가 혼자이신 겁니까?”

“그건 아니고···.”

“다른 디스틸러의 실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마스터의 책임이랍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위스키를 만들지 않습니다.”

시기가 다 정해져 있다고 했다.

가장 바쁜 그 기간이 지나면 나머지 시간은 관리하는 데만 힘쓴다고 했다.

그리고 증류소에는 그 말고도 다른 디스틸러가 여럿 있기에 어느 누가 맡아도 문제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야 제가 이렇게 한 번씩 나와서 활동을 하면서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죠. 연봉 받는 만큼 일하는 게 쉽진 않습니다.”

“요즘 글렌아워가 대형 마트에서도 보이던데 그 덕분인 것인가요?”

“아니라고는 할 수 없죠.”

테넌트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여러모로 참 유쾌하신 분이었다.

특히 술 이야기를 할 때는 눈이 반짝이는 느낌이었다. 삼촌도 여기 있었으면 2박 3일쯤 지치지 않고 이야기꽃을 피웠겠지.

아니 일주일쯤도 가능할 것 같았다.

나도 이런 경험이 꽤 즐거웠다.

언제 대형 증류소를 책임지는 마스터 디스틸러의 경험을 들어볼 수 있겠어.

하지만 모든 대화는 영어로 이뤄졌기에 대화에 끼어들 수 있는 이는 호세가 유일했고 수호는 듣기만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예정에 없던 술자리가 시작됐다.

어제 남은 고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쌍둥이는 식사만 마치고 피곤하다며 일찍 숙소로 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 본격적인 음주의 세계에 발을 딛게 해주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머지않아 테넌트의 주량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고래라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하긴 그러니까 엄청나게 많았던 다양한 종류의 술을 심사할 수 있었겠지.

심사도 주량이 약하면 할 수 없다는 것은 뒤늦게 깨달았다.

“이렇게 즐겁게 술을 마시는 것도 정말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젊은 친구들과 마시니 십 년쯤 젊어지는 기분입니다.”

“이왕에 젊어지시는 거 그냥 이십 년쯤 젊어지십쇼.”

“내일 벽향주를 빚는다고 하셨는데 괜찮으시다면 술을 빚는 과정을 제가 옆에서 참관해도 되겠습니까?”

테넌트는 분위기가 무르익자,

나에게 오저당에 잠시 머물며 술을 빚는 과정을 참관해도 되냐며 물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거라 놀랍지는 않았다. 이곳에 온 목적 중에 아마도 그게 가장 주된 이유이지 않을까.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우리가 대단한 비결을 숨겨야 하는 것도 아니고 오저당의 핵심은 요정이다.

요정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감춰야 할 게 전혀 없었다.

더구나 봄부터는 찾아가는 양조장에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앞으로 많은 이들이 오저당을 찾아와 우리가 술을 빚는 과정을 체험할 것이다.

하지만 그냥 승낙하면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기에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대신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뭘 해드리면 될까요?”

“그리 어려운 거는 아닙니다. 나중에 스코틀랜드에 가게 될 일이 있으면 저희도 마스터가 일하시는 글렌아워 증류소의 작업 과정을 참관하게 해주시면 됩니다.”

교류의 장을 열자는 의미다.

당연히 테넌트는 고민할 것도 없이 내가 제안한 딜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평소에도 글렌아워는 외부에서 교육생을 받아서 프로그램을 돌린다고 한다.

그러니 별로 힘든 것도 아니라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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