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03화 (103/254)

나만 빼고 다 재능충 (1)

새벽 4시 30분.

다들 잠든 이른 시간이지만,

나는 그 시각에 일어나야만 했다.

오늘은 내가 새벽 시간대에 양조장에 나가는 순번이다. 하지만 예전부터 이렇게 새벽에 일어나진 않았다.

전에는 이보다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오풍주를 빚기 시작한 후부터 시간대가 매우 애매해졌다.

일반 막걸리보다 중간에 한 번씩 저어줘야 하는 간격이 더 짧아진 탓이다.

2시간 30분의 간격.

최소한 그 간격은 지켜야만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 룰을 지키지 않는다고 숙성이 크게 잘못되진 않는다.

향이도 있고 요정도 항상 양조장과 숙성 창고에 상주하며 지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사소한 것이 모여 술맛이 좌우된다.

그래서 자동으로 저어주는 설비를 들여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무작정 정해진 시간에 젓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술의 상태를 봐가면서 해야 한다.

그래서 이 일은 수호와 나 그리고 호세가 3교대 형식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남들은 우리가 이렇게 새벽잠까지 줄여가며 술을 빚는 줄도 모를 거다.

역시 돈을 버는 게 쉽진 않아.

“어휴··· 왜 이렇게 춥냐.”

한파 특보 때문일까.

오늘따라 너무 나가기 싫었다.

이런 날에는 전기 장판 틀어 놓고 따끈한 이불 속에서 늦잠을 자는 게 최고인데.

이불 밖은 너무 위험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얼마 전에는 폭설이 와서 마을 전체가 고립될 위기도 살짝 경험해봤다.

외진 곳이라 여기까지 제설차가 오려면 꽤 기다려야 했다. 이장님이 왜 그렇게 비상식량을 강조했는지 알 수 있었다.

추위도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새벽에 느껴지는 강원도의 추위는 정말이지 살이 찢겨나가는 기분이다.

이러다가 눈알까지 얼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하지만 망설임은 잠시뿐이었다.

후딱 다녀와서 다시 자면 되니 미룰 이유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고 나선 나는 양조장 앞에 보이는 실루엣을 보고 깜짝 놀랐다.

희끗희끗한 뭔가가 보였다.

잠시나마 귀신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테넌트가 서 있었다.

이미 그는 완전 무장을 한 채로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는데 내가 본 것은 그의 풍성한 수염이었던 것 같았다.

그사이 테넌트와 꽤 친해졌다.

밤늦게까지 찐하게 술을 마신 덕분이다.

그 과정에서 꽤 많은 오풍주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함께했던 시간이 보람되었기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

유명한 마스터 디스틸러와 인맥을 쌓는 기회가 흔하게 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예 선생님 댁의 방 하나를 내드려서 양조장에 머물게 해드렸다.

차도 안 가져온 터라 매일 택시를 타고 오가는 것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우리가 매일 픽업하기도 애매했다. 그리고 당장 오늘부터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이제 일어났나 보네.”

“어휴! 깜짝 놀랐잖아요. 이렇게 이른 시간에 안 주무시고 왜 나와 계세요?”

“늙으니 새벽잠이 없어지더군. 그리고 어제 이 시각에 일하러 나온다고 했잖아.”

이걸 부러워해야 하나.

새벽잠이 많은 나로서는 상상이 안 되었다. 하긴 선생님도 예전에 테넌트와 비슷한 말을 자주 하시기는 하셨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내게는 그런 날이 가능한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

“잠자리가 불편해서 잠을 설치신 것은 아니고요?”

“얼굴은 조금 시려웠는데 온돌이 있어서 따뜻하게 잘 잤어. 내가 술에 대해서는 까다롭게 굴어도 잠자리는 안 가리는 편이라 걱정하지 마.”

“다행이네요. 그런데 스코틀랜드의 겨울도 여기와 비슷한가요?”

양조장의 문을 열며 나는 테넌트에게 고향의 날씨에 대해 물어봤다.

영국은 대충 감이 오는데 스코틀랜드는 어떤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잉글랜드의 북단이고 그 위로 아이슬란드가 있다.

그 정도면 여기와 비슷하거나 더 심하지 않을까?

“있기는 한데 이 정도는 아니지. 영하로는 안 떨어져.”

“그래도 이곳보단 따뜻하네요.”

“비가 많이 와서 체감 온도는 매우 낮은 편이라 겨울 말고 날씨 좋은 날에 직원들이랑 같이 스코틀랜드로 한 번 와.”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가볼 생각이었다.

몇 년 후가 될지는 모를 일이나 여유가 생기면 테넌트처럼 다녀보고 싶었다.

각국의 증류소를 견학해 보고 좋은 것들은 오저당에도 적용해봐야지.

일종의 벤치마킹이라고 보면 된다.

역사와 전통을 지닌 해외의 증류소는 뭐가 다른 건지 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테넌트와 함께 양조장 안으로 들어선 나는 묵묵히 오풍주를 살폈다.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말은 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동안 내 모습을 지켜보던 테넌트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정성을 들이니 오풍주나 벽향주가 맛있을 수밖에 없지.”

“그런가요?”

“우리 증류소는 정말 편하게 일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야.”

“마스터가 계신 증류소는 거의 모든 과정이 기계화되어 있죠?”

“인력이 들어가는 부분은 오크통 옮기는 게 거의 전부지. 그마저도 지게차 같은 걸로 요즘은 거의 다 해.”

에이··· 부러우면 지는 건데.

나도 언젠가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손맛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수제 생산의 한계는 분명히 있기는 했다.

그 정도 규모가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 하지만 그리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며칠 후에 맞게 되는 새해가 그 시작점이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설레는 기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 내년이 너무 기대되는걸.’

*

테넌트의 열정은 대단했다.

완공된 숙성 창고를 채우기 위해서 오전부터 벽향주를 빚었는데 그 모든 과정을 함께했다. 심지어 쌀 포대까지 옮겨가며 한 사람 몫을 해냈다.

우리 입장에서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

위스키를 빚는 장인인 데다가 국내 양조장도 많이 다녀봐서 그런지 술 빚는 것을 배우는 것도 무척이나 빨랐다.

대신 그의 일당은 술로 치러야 했다.

오히려 배우는 것은 우리였다.

오저당에 머물며 그는 수십 년 동안에 쌓은 그만의 철학과 평소 마음가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그렇게 삼일이란 시간이 지난 뒤에야 숙성 창고의 옹기를 모두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사흘째가 되는 날.

테넌트는 스코틀랜드로 떠났다.

떠나는 순간에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으나 한국에서 머문 지 한 달이 거의 다 되었으니 오래되긴 했다.

증류소 식구들과 지인에게 맛보여줄 오풍주와 벽향주를 양손 가득 들고 떠난 그는 내게 한 가지의 숙제를 주었다.

그건 바로 우리 술에 어울리는 페어링(Pairing) 혹은 마리아주(Mariage)라 불리는 영혼의 단짝을 찾는 것이었다.

술과 음식.

두 가지는 떼놓을 수 없다.

생선은 화이트 와인이 어울리고,

고기 종류는 레드 와인을 주로 마신다.

그건 마치 비 오는 날의 파전과 막걸리 조합과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되었다.

그 관계를 이해하는 순간.

실력이 한층 높아질 거라 장담했다.

당연히 나는 그런 테넌트의 조언을 흘려듣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술에는 어떤 음식이 가장 잘 어울릴까.

아직 알 수 없었다.

이제부터 알아가야 했다.

더구나 이제는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새로 지어진 숙성 창고와 양조장 안에는 우리가 빚은 벽향주와 오풍주가 가득 채워져 숙성되고 있는 중이다.

더 빚고 싶어도 빈 옹기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신난 것은 이모다.

온갖 식자재를 거의 무제한으로 사다 드리고 있었고 그걸로 평소 못 만들어본 다양한 음식을 시도하고 계셨다.

여름에 주막을 운영하며 음식 솜씨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신 것 같았다.

간단한 샐러드부터,

조금 화려한 스테이크까지.

심지어 제철 음식인 과메기도 등장했다.

하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조리된 음식은 모두 우리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거의 사육 당한 탓에 몸무게의 변화도 생겼다.

“확실히 오풍주는 진한 풍미와 부드러운 목 넘김이 장점이라 헤비하거나 느끼한 음식과는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내가 내린 결론에 다들 동의했다.

치즈 같은 것은 잘 안 어울렸다.

오히려 상큼한 맛이 느껴지는 샐러드 같은 종류가 더 오풍주에 어울렸다.

막걸리와 샐러드라니 조금 매칭이 잘 안 되었으나 그건 고정 관념에 불과했다.

과연 이걸로 끝일까.

아니, 최대한 활용해야만 했다.

고작 우리만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갈 거면 시작도 안 했다.

적어도 블로그 같은 곳을 통해서 팁을 주는 형식으로 써먹을 생각이었다.

SNS의 활용은 기본 중의 기본이잖아.

돈이 안 들어가는 홍보 수단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라고 보면 되었다.

괜히 요즘 모든 기업들이 SNS 등에 콘텐츠를 올리고 있는 게 아니다.

당장의 효과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나중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한두 차례만 조회수가 터져서 사람들 뇌리에 남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이다.

호세와 수호가 모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자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부분은 SNS가 아니라 내가 예로 든 블로그였다.

“블로그? 요즘 누가 그걸 봐?”

“그럼 어디가 좋을 것 같아?”

“별스타그램이나 너튜브 있잖아. 나도 요즘 어지간한 거는 다 거기서 검색해.”

“누가 그걸 모르냐. 사진을 찍는 것도 버거운데 영상을 어떻게 만들어.”

별스타까지는 이해한다.

거기까지는 내 계획에도 있었다.

하지만 너튜브는 넘사벽에 가까웠다.

우리 실력으로 영상 편집은 무리다.

사진 찍는 것도 제대로 못 해서 오풍주 역시 지철이 형한테 촬영을 부탁했다.

수호도 그걸 알기에 현실을 인정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거 쌍둥이한테 맡겨보세요.”

그때 호세가 끼어들었다.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라 의아하게 바라보자 호세는 우리가 전혀 모르던 녀석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알고 보니 쌍둥이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 영상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았다.

나름 수상도 몇 번 해서 용돈 벌이도 제법 쏠쏠하게 했다고 한다. 그것도 화질이 좋지 않은 스마트폰으로 이룬 성과였다.

“그런 재능을 왜 여기서 썩히고 있어?”

“썩···는다는 말은 좀 거슬린다.”

“아아! 쏘리. 그 말은 금기어지.”

여긴 숙성하는 곳이다.

썩는다는 말은 절대적인 금기어다.

초창기 당시에는 종종 예상치 못한 균이 들어가서 통째로 버린 적도 있었다.

그걸 잘 알기에 수호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한쪽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유야 뻔한 거 아니겠어.”

무엇보다 생계가 급했겠지.

선택의 여지가 있지 않았을 것이다.

삼척과 태백 주변에 영상에 관련된 일을 하는 회사가 과연 있기는 할까.

있다고 하더라도 전공자도 아니고 수상 몇 번이 전부인 쌍둥이가 고용될 가능성은 그리 높진 않았다.

그렇다고 영상을 전공으로 공부를 하자니 대학교 등록금을 마련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진학하는 것도 쉽지는 않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해된다.”

“하긴 수호 너도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알바해서 버느라 꽤 고생했었지.”

“대학교 안 가도 잘 사는 사람 많아요.”

호세는 자신을 보라며 손짓했다.

하지만 좋은 본보기로 삼긴 어려웠다.

이 녀석 알고 보니 미국으로 치면 하이 스쿨을 중간에 자퇴하고 한국에 왔단다.

“많이 배울수록 좋지. 호세 너 올해 안에 한국어 능력 시험(TOPIK) 4급 못 따면 보너스 없다고 분명 말했다.”

“걱정 마요. 4급 정도는 제 한국어 실력이면 식은 죽 먹기니까요.”

“그렇게 호언장담하다가 너 혼자만 보너스 못 받았다고 나중에 울지마.”

“넵! 밤마다 실장님과 함께 열심히 공부 중입니다.”

요즘 수호는 실장이라 불렸다.

직원이 늘었는데 같은 선상에 녀석을 둘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이사나 부사장 같은 자리를 주는 것도 조금 애매했다.

그래서 팀장과 실장 중에 고민하다가 녀석은 실장을 택했다.

“일단 쌍둥이들한테 맡기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그들이 베스트다.

대단한 결과물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당장은 시작만 해놓고 나중에 오저당이 훨씬 더 커져서 중소기업 규모가 된다면 전문가를 뽑아서 붙이면 되겠지.

“그거 시키면 다른 업무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어떻게 조율할 거야?”

“원한다면 시간 외 근무 수당을 주고 저녁에 개인 시간 활용하게 하려고.”

“만약에 싫다고 한다면?”

“오늘 같이 숙성하는 텀에 걸려 있는 한가한 날에 하라고 해야지.”

그건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이다.

둘 중에 어떤 것을 골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쌍둥이라면 개인 시간을 활용하고 수당을 더 받아 갈 것이다.

벌써 첫 월급 계획도 짠 녀석들이다.

월급을 받으면 자신들을 보살폈던 시설의 선생님과 동생들 설날 선물을 사려고 논의하는 것을 얼핏 들었다.

얼추 그와 관련된 논의가 마무리되자, 호세가 가장 중요한 지적을 했다.

“채널명은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러게 뭘로 하지?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단순하게 오저당으로 채널명을 하기에는 너무 밋밋했다. 나 같아도 핵노잼이라 절대 클릭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며칠 전에 테넌트가 했던 발음 실수 덕분에 꽤 웃었던 게 기억났다.

한 번만 들어도 뇌리에 남을 것 같기에 나는 그걸 우리의 너튜브 채널명으로 정했다.

[채널명 : 오졌다, 오저당]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