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09화 (109/254)

SF 고라니 (1)

백 마디의 말보다,

직접 맛보는 게 빠르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우리는 달변가처럼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카피라이터처럼 강력한 문장으로 제품을 돋보이게 할 수도 없다.

설득을 하려면 진심이 중요하다.

나의 진심은 벽향주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 홍보 자료를 보여주기 이전에 뫼리스라는 이 남자에게 술부터 따랐다.

그러니 일단 한 번 잡솨봐!

“좋습니다. 제품부터 확인하고 이야기를 나누시죠.”

뫼리스는 사양하지 않았다.

첫인상만 봐도 그럴 사람 같았다.

주당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얼굴에서 누룩 내가 나는 사람이 있다.

그 말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뫼리스였다.

그는 곧장 술잔을 집었다.

가장 처음에 맛본 것은 벽향주였다.

입에 머금고 있는 술에서 느껴지는 향과 청아한 맛을 확인한 그는 저절로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얼마 전에 품평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좋군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거 전혀 소주 같지 않네요. 제가 원래 한국의 소주는 특유의 냄새 때문에 그리 좋아하진 않거든요.”

“이 술은 소주가 아닙니다.”

소주와 청주 그리고 사케.

세 가지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술을 빚는 방식의 시작점부터 다르고 가장 중요한 숙성하는 과정도 달랐다.

그러니 그걸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동안 내 설명을 듣던 뫼리스는 사과부터 했다.

“제가 아시아 술에 그리 박학한 것은 아니라 실수를 했군요.”

“아직 세계 주류 시장에서 아시아의 전통주가 그리 큰 포지션은 아니라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최근 유럽 트렌드에 딱 맞는 술이기도 하죠. 대표님이 왜 한국으로 곧장 가라고 한지 알 것 같습니다.”

뫼리스는 최근 유럽 시장의 동향에 대해 내게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전염병이 한창이던 몇 년 전부터 유럽 주류 시장에서 무알코올과 도수가 낮은 술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요즘 젊은 유러피언은 과음을 하기보다는 자주 가볍게 마시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그 저알코올 시장을 노리고 들어가면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나도 동의했다.

이미 그 보고서는 본 적이 있었다.

매일 하는 일이 세계 주류 시장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해외로 진출하겠다는 것은 욕심이지.

적어도 어느 곳을 어떤 방식으로 공략할 것인지는 알아봐야 했다.

“문제는 가격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오래 숙성한 위스키 같은 술과 같은 가격이면 경쟁이 안 될 겁니다.”

20년 가까이 숙성한 술들과 비벼볼 생각을 한다는 것부터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요정이 있더라도 보름밖에 안 되는 숙성으로는 그 긴 시간에서 생기는 갭을 메꿀 수는 없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벽향주는 11유로 정도에 판매 중입니다.”

“그러면 유럽에서는 적어도 15유로 이상은 받아야 하겠군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우리가 대기업도 아니고,

소량으로 시작할 게 분명했다.

당연히 유럽까지 보내는 비용도 작진 않을 거라 현지 판매 금액에 녹여야 했다.

서민의 술이라 불리는 소주가 해외에서 보드카 가격과 괜히 맞먹는 게 아니다.

“벽향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 자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쯤에서 준비한 자료를 건넸다.

이곳에 오면서 술만 가져오진 않았다.

적어도 담당자가 가져가서 체크할 수 있는 자료를 줘야 했다. 영문으로 작성된 자료는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조선 시대부터 내려오는 벽향주의 역사와 대대로 벽향주를 빚어온 장인에게 직접 전수를 받았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이거 만들려고 밤마다 잠도 제대로 못 잤을 정도였다.

“예상보다 역사가 긴 술이군요. 스토리텔링을 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뫼리스는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술의 세계는 단순하게 맛만 가지고 가치가 매겨지는 것은 아니다.

브랜드와 증류소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진 오풍주는 그리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유럽과 한국 간의 거리가 가장 큰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현재 오풍주의 유통 기한은 가능한 한 달 이내에 마시는 것을 권장 중이다.

그 이상 기간이 지날 경우.

맛에서 변질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탁주가 해외에서 판매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고 멸균 장비를 들이기도 애매한 것이 맛이 변할 가능성이 높았다.

“유럽에 생산 시설이 있었다면 제가 어떻게든 유통해보고 싶은 술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풍주가 더 마음에 들었는데 아쉽네요.”

“유럽에서 우리나라 쌀 품종이 생산되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죠.”

그 뒤로는 벽향주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됐다. 아직 국내 소비량에 비해 생산량이 살짝 부족한 상태다.

당장 많은 물량을 끌루소에 배정하는 것은 어려웠는데 그건 뫼리스도 어느 정도 양해를 해주었다.

“저희도 벽향주의 반응을 봐야 조금 더 큰 거래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끌루소의 스타일이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술을 계약해도 처음부터 대량의 주문은 넣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 나름의 리스크 관리였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서로 부담 없이 2천 병으로 시작하는 거로 하시죠. 그 정도가 지금 당장 제 선에서 제시 드릴 수 있는 한계입니다.”

그리 많은 수량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만족스러운 제안이었다.

더구나 이게 완전한 확정은 아니었다.

이번 주문은 뫼리스에게 주어진 권한 내에서 진행되는 주문이었다.

국제 택배로 샘플을 보내주면 본사에서 자세한 논의를 시작한다고 했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으나 그런 과정을 거쳐서 종종 추가 주문이 들어갈 수도 있다고 내게 미리 알려주었다.

“좋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이번에는 반드시 대박을 내야 합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갑자기 눈빛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내 질문에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알고 보니 지난겨울에 늦둥이 셋째 딸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와이프가 올해는 반드시 승진해야 한다고 난리도 아닙니다. 작년에 한껏 기대했는데 물 먹었거든요.”

“하하! 득녀 축하드립니다.”

“제가 어떻게든 팔아볼 테니 오저당은 지금의 품질만 유지해주면서 공급만 원활하게 해주시면 됩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뒤로는 세부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계약서는 추후에 변호사를 통해서 작성하기로 했고 운송에 관련된 것은 전적으로 끌루소가 알아서 하기로 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물류 회사를 끼고 선적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것 같았다.

우리는 그들이 보낸 차에 실어주기만 하면 되기에 어려울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중요한 용건이 남아 있었다.

나는 아래 놔뒀던 쇼핑백에서 다른 병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1년 숙성한 벽향주가 담겨 있었다. 내가 그 부분을 설명하자 뫼리스는 흥미를 보였다.

다만, 몇 년 숙성한 지는 밝히지 않았다.

대부분의 증류소는 자신들의 술이 어떤 블랜딩을 하는지 몇 년 숙성한 원액을 쓰는지 전혀 밝히지 않는다. 그게 그 증류소의 핵심 자산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잭 다니엘 같은 경우에도 대략 몇 년 정도인지 추측할 뿐이지 공식적으로 제품에 표시하거나 그렇지는 않는다.

위스키 중에서 그렇게 연산 표시를 안하는 것들을 NAS라 부른다.

네트워크 드라이브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No Age Statement를 뜻한다.

몇 개월을 숙성한 것일 수도 있고,

몇 년을 숙성해서 만든 것일 수도 있다.

블랜딩 기법으로 맛을 창조해낼 수 있다면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NAS라고 저숙성 제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조니 워커에서 최고 클래스에 속하는 블루 라벨도 NAS로 표기되나 들어가는 원액은 최소 15년에서 60년 정도 숙성된 것이라고 들었다.

“벽향주 보틀과 같아 보이는데 아직 정식 출시는 되지 않은 술인가 봅니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이건 내년 여름 무렵에 숙성을 마칠 예정인 프리미엄 제품의 샘플입니다.”

“테이스팅부터 해봐도 되겠습니까?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 없네요.”

“물론이죠.”

뫼리스는 곧장 잔을 들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수호가 발을 떨었다.

딱 봐도 긴장한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뫼리스는 한 모금 마시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하아··· 이게 진짜였군요.”

“아마 완성될 무렵에는 향과 색이 조금 가미될 예정입니다.”

“아니요. 제 생각엔 그러지 않으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벽향주만의 색을 잃게 될 것 같네요.”

“그런가요?”

내가 너무 위스키를 따라가려고 했던 걸까. 이 부분은 충분히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았다.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뫼리스가 말한 방향이 더 편하긴 했다.

굳이 새 오크통을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생산량이 어느 정도 됩니까?”

“아직은 그리 많이 준비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미리 선주문을 하시면 오직 끌루소만 이 술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독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꼭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주문량에 따라 충분히 그렇게 될 가능성은 있겠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이건 본사에 들어가서 협의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결과가 금방 나오진 않을 겁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은 먼저 내고 나중에 받아 가라는 말이나 다를 게 없었다. 이제 막 거래를 시작하는 단계라 신뢰도 쌓이지 않았다.

당연히 끌루소에서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걸로 협상은 모두 마무리됐다.

우리는 뫼리소와 인사를 하고 나온 뒤에 협회 직원에게 간단하게 이번에 협의된 계약에 대한 세부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들도 이번 상담회의 성과를 기록해야 하니 귀찮아도 어쩔 수 없었다.

당연히 협회의 반응은 좋았다.

계약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유럽에서 유통하는 대형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성과였다.

잠시 후에 협회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수호와 함께 밖으로 나오자 늦은 오후의 햇살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부디 오저당의 미래도 저 햇살처럼 찬란하길 바랐다.

‘드디어 해외 진출인가···.’

*

끌루소와 계약은 했지만,

당장 뭔가 바뀌는 것은 없었다.

우리는 기존처럼 꾸준히 술을 빚었고 끌루소에 보낼 물량을 확보해놨다.

현재 오저당의 생산량에서 2천 병은 큰 비중은 아니라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다시 서울로 와야 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서울을 거쳐서 인천으로 향하는 공항버스를 탔다. 그동안 계속 미뤘던 미국으로 가는 날이 오늘이었다.

공항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왔던 게 도대체 언제더라.

아마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겠다고 4년 전쯤에 짐을 싸 들고 왔던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10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무척 오랜만에 미국 땅을 다시 밟았다.

부모님과 함께 이곳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는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은 또 달랐다.

살짝 그리웠던 것 같았다.

이곳에서 몇 년이나 살았으니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라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싫었던 미국 생활도 추억 보정이 된 것인지 그리운 얼굴도 여럿 떠올랐다.

이방인이었던 내게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줬던 너무나 착한 친구들이었다.

우선 수화물부터 찾은 나는 곧장 집이 아닌 어머니의 회사로 찾아갔다.

집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부모님의 집은 공항 반대편 해안 지대의 몬타라(Montara)라는 교외에 있다.

차 없이 거기까지 가려면 몇 번이나 갈아타야 하기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행히 퇴근 시간이 다 되긴 했다.

요즘은 칼퇴근을 하고 계신다고 하니 재빨리 움직이면 어머니 차를 얻어 탈 수 있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중심지로 향하니 우버 본사가 보였다.

이 도시는 뭐랄까···.

조용하면서도 뜨거웠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이 많으나 한국처럼 거대한 빌딩이 많지는 않았다.

더구나 인구도 백만 명이 안 되니 서울과 비교하긴 어려웠다.

“더럽게 무겁네··· 조금 빼놓고 올걸.”

버스에서 내린 뒤부터.

나는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보따리장수가 따로 없었다.

내 덩치만 한 크기의 이민 가방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안에는 부모님이 요청한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원래는 삼촌이 택배로 보내는 편이나 이번에는 내가 가져왔다.

기왕에 가는 길에 가져가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오케이한 탓에 생긴 일이다.

가방 안에는 온갖 것들이 있었다.

요즘은 미국에서도 대부분 구할 수 있으나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는 것은 오저당에서 빚은 술들이었다.

우리 술이 70도가 넘지는 않아서 가져오는 데는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이것 때문에 공항에서 관세를 적지 않게 물어야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오풍주 없이는 집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협박이 있었다.

아마 삼촌이 자랑을 엄청한 것 같았다.

더구나 품평회에서 대상까지 받았으니 어떤 술인지 무척 궁금해하셨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해.

오풍주는 가져오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생막걸리 특성상 기성품을 보내면 중간에 흐르거나 터질 가능성이 있어서 택배로 보내기도 애매했다.

완전 밀폐 뚜껑을 사용하지 못하는 탓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술을 적게 넣고 온갖 방법을 다 써야만 했다. 그런데도 한두 병은 샜는지 술 냄새가 진동했다.

가방 안쪽은 완전히 난장판이겠지.

도저히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안 되겠다. 저기서 좀 쉬었다가 가야지.”

마침 카페테리아가 보였다.

외부에 놓인 테이블이 비어 있는 덕분에 나는 그곳에서 잠시 땀을 식혔다.

어머니의 회사가 근처라 문자를 보내 놓고 여기서 기다리기로 했다.

차가운 음료 한 잔을 시켜 놓고 그늘에서 쉬었더니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렇다고 멍하니 앉아 있을 수는 없기에 마케팅 관련 책을 읽고 있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내 앞에 섰다. 구두를 보니 이곳의 웨이트리스는 아닌 것 같았다.

딱 봐도 제법 비싼 느낌이었다.

서빙하는데 누가 빨간 구두를 신겠어.

슬쩍 고개를 들자 고급진 흰색 스커트와 정장을 단정하게 입은 여성이 보였다.

커다란 모자와 진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나 누군지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다고 못 알아볼 사람은 아니었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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