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고라니 (3)
부탁이란 말을 듣자마자,
어머니는 잔을 내려놓았다.
반면에 아버지는 신경도 안 썼다.
내가 하려는 부탁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눈치챈 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안 해. 그러니 입도 열지 마.”
“이야기도 안 들어보실 거예요?”
“또 일 시키려는 거잖아. 아무리 아들 부탁이라고 하더라도 더는 안 돼.”
“서운하게 왜 그러세요.”
“이미 엄마 카드는 한 번 썼잖아.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
나도 가능하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이게 쉽게 볼 일이 아니다.
디자이너인 어머니 탓인지 몰라도 어지간한 실력은 눈에 차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어머니 실력 정도 되는 이를 섭외하려니 찾기도 쉽지 않고 돈도 생각보다 너무 많이 들었다.
“공짜로 해달라는 거는 아니에요.”
“나 겁나 비싸. 옥토퍼스 최고 디자인 책임자(CDO) 연봉이 얼마인지 알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알죠.”
남도 아니고 내가 모를 리가 없지.
다양한 인테리어 용품을 생산하는 글로벌 그룹 옥토퍼스에서 디자이너로 정점에 서신 분이 어머니다. 그만큼 사내 정치에도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라 설득이 쉬울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슬쩍 아버지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은근히 내 시선을 외면했다.
하나뿐인 아들한테 이러실 겁니까?
하긴 평생을 꽉 잡혀서 사는 애처가인 아버지한테 그런 걸 바라는 게 무리였다.
더구나 지금은 벽향주에 완전히 빠져 계셔서 아무것도 안 들리시는 것 같았다.
아니, 듣기를 거부하고 계시는 건가.
왜 항상 내 편은 없는 건데?
“차라리 직원을 한 명 뽑아.”
“제품 리뉴얼 한 번 하고 선물 세트 패키징 디자인이 전부인데 사람을 뽑는 것도 조금 애매하잖아요.”
우리가 매년 제품을 새로 만들 것도 아니고 디자인이 중요한 업종도 아니다.
사람을 뽑아도 정작 시킬 일이 그리 많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나와 다른 것 같았다.
“그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너희 너튜브 같은 SNS 계정 보니 있어야 하긴 하겠더라.”
“너튜브는 또 왜요?”
“영상은 잘 만들면서 왜 섬네일은 그 모양인 거야? 보는 내가 안타까워서 한마디 하려다 참은 게 한두 번이 아니야.”
그건 저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쌍둥이의 능력은 영상에 한정되어 있었다.
섬네일을 만드는 실력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주 못 써먹을 정도는 아니고 평범한 수준이었다.
어머니 정도의 실력자가 보자면 당연히 성에 차지 않는 게 정상이다.
섬네일이 뭐가 중요하냐고?
신규 구독자 유입 요소 중에 제목과 함께 썸네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컸다.
일단 썸네일에서 시선을 잡아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너튜브의 알고리즘이라도 타고 사람들이 들어오지.
“강원도 산골에서 실력 좋은 직원 구하는 게 쉽나요. 아무도 올 생각을 안 해요.”
“사람을 구하기 힘들면 외주 업체에 디자인을 맡겨. 돈만 많이 주면 기막히게 만들어서 가져다 바칠 거야.”
“에휴··· 그냥 식사나 하시죠.”
그쯤에서 나도 포기했다.
안 된다고 하셨으면 그걸로 끝이다.
일단 마음먹으신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다운되자 아버지도 살짝 불편하셨다.
그쯤에서 어머니는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직원만 구하면 되는 일이잖아. 그거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데.”
“누굴 소개해 주시게요?”
“마침 추천해줄 만한 적당한 인재가 있어. 그 친구 데려가서 일을 시켜봐.”
아··· 오늘도 당한 느낌이다.
어머니가 원하는 결론은 이거였어.
손오공처럼 나도 어머니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확실히 아직은 내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분은 아니었다.
“한국 사람인 거죠?”
“아니, 히스패닉이야.”
“말도 안 통하는 한국까지 와서 일을 할까요?”
한국에 온다고 월급을 더 많이 받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머니가 인정할 정도면 대기업에서도 일할 수준이란 뜻이다.
아무리 내가 챙겨준다고 하더라도 그 수준까지는 불가능했다.
“사실 걔가 건강이 그리 좋진 않아.”
“제가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그런 사람을 왜 저한테 소개해주려고 하세요?”
“일하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야.”
무슨 큰 병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고 아토피가 심하단다.
당분간은 대도시를 벗어나 공기 좋은 곳에서 쉬려고 회사를 그만뒀다고 했다.
그쯤 되니 왜 우리에게 보내려고 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오풍리만큼 휴양하기 좋은 곳이 없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해가 안 되었다.
환경적인 요소만 본다면 미국도 공기 좋은 곳이 너무나 많다. 앵커리지나 하와이 같은 휴양지도 있잖아.
분명히 뭔가 이유가 더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요.”
“음··· 걔가 K-POP에 완전 푹 빠졌거든. 지난여름 휴가 때도 오빠들 콘서트 보러 간다고 서울에 다녀왔더라.”
“오빠들이요?”
“왜, 빌보드 차트에서 1위 했던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돌 있잖아.”
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하이 스쿨을 졸업할 무렵에도 K-POP을 듣고 콘서트까지 쫓아다니던 아주 열성적인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때 콘서트 예매 성공했다고 아주 난리가 났었지.
“요즘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던데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가능하더라.”
“쉬는 날마다 서울에 있는 기획사 앞에 앉아서 죽치고 있는 거는 아니겠죠?”
“그러면 뭐 어때. 쉬는 날에 뭘 하든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잖아.”
설마 엄마도··· 팬클럽 소속인가?
집에 야광봉이 있는 거는 아니겠지.
항상 트렌드를 유심히 살피는 분이라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더구나 덕질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어.
그 외에도 이유는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건강 보험이었다.
미국의 많은 이들이 직장을 통해 가입하는 보험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회사를 그만두게 될 때 생긴다.
회사가 부담하는 금액까지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데 그게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 진료비도 엄청난 편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차라리 한국에서 일하며 병원을 다니는 게 훨씬 저렴하기는 했다.
“그럼 언제 한국에 올 수 있는데요?”
“글쎄다. 일단은 그쪽 의사부터 물 어 봐야겠지. 하지만 비자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미쿡 사람이잖니.”
어머니는 양손을 들어 두 손가락을 까닥이며 미국 시민임을 강조했다.
하긴 다른 나라에 비해 미국인이 여러모로 혜택을 많이 받는 편이다.
천조국 클래스라는 말이 괜히 있겠어.
잠시 식사를 하는 사이.
검색을 해보니 비전문취업(E-9) 체류자격자로 들어와야 할 것 같았다.
3년 범위 내에서 취업 활동이 가능했고 한 차례 연장하면 2년이 추가된다.
그렇게 되면 최대 5년 동안 오저당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쁘진 않네.’
짧지 않은 기간이다.
오저당의 성장세를 본다면,
도무지 앞날을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니 5년 후의 일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솔직히 국내에서 사람을 구해도 1년을 넘기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 신입 사원 셋 중의 하나는 1년 이내에 퇴사한단다.
그런 점을 생각해본다면 5년까지만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이러다가 다국적 회사가 될 판이네요.”
“호세라는 친구는 교포라고 했잖아.”
“정체성은 멕시칸에 더 가깝죠.”
“오히려 잘됐네. 호세가 옆에서 라니를 많이 도와주면 되겠어.”
잠깐만!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라니는 내가 이곳에서 사귄 첫 친구이자 프롬 파티에 파트너로 데려갔더니 내 입술을 빼앗아간 파렴치한 녀석이다.
그 당시에 받은 충격은 정말··· 혜성이 머리를 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설마 저한테 소개해 주려는 사람이 고라니였어요?”
고라니는 라니의 별명이다.
뒤도 안 돌아보는 직진 본능을 가진 친구라 Go를 붙여서 고라니가 되었다···는 아니고 그냥 재미 삼아 그렇게 불렀다.
어차피 나만 아는 단어잖아.
그래도 나중에 궁금했던 걸까.
라니는 왜 자신을 고라니라고 부르는 건지 물었다. 그때 나는 사슴이란 뜻을 가진 한국어라고 알려주었다.
거짓말은 아닌 것이 고라니도 사슴의 일종 맞잖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아무리 별명이라도 친구한테 고라니가 뭐니?”
“고라니가 들으면 섭섭하겠네요. 사슴 같은 눈은 칭찬인데 왜 고라니만 차별하는 거죠?”
“시끄럽고 라니한테는 내가 연락을 해놓을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런데 걔가 원래 디자인 쪽이었나요?”
라니는 미술 쪽에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장래 희망을 쓰는 에세이도 항상 화가가 될 거라 썼던 녀석이 왜 갑자기 디자인으로 진로를 바꾼 건지 궁금했다.
설마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건가?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았다.
바로 옆집에 살던 라니는 항상 우리 집에 놀러 왔었다. 나를 보러 온 것은 아니고 어머니와 노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언제나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던 어머니도 라니를 딸처럼 여겼었지.
“너 한국으로 떠난 뒤에 디자인 쪽으로 전공을 정했어. 그때 이후로 한동안 못 봤는데 작년에 우리 회사에 취직했더라.”
“하여간 그 꼴통···.”
“회사에서 마주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몇 년 사이에 많이 바뀌어서 먼저 아는 척을 안 했으면 못 알아볼 정도였어.”
얼마나 심하게 역변했길래.
어머니가 보고 놀랄 정도인 거지.
예전에도 꽤 통통하긴 했는데 설마 거기서 더 찐 거는 아니겠지?
“그래봤자 얼마나 바뀌었겠어요.”
*
내 예상은 빗나갔다.
고라니는 확실히 바뀌었다.
기본적으로 살이 엄청나게 빠졌다.
최고의 성형은 다이어트라고 했던가.
뭐 그렇다고 엄청 예뻐졌다는 그런 말은 아니다.
그래도 어머니 말이 맞긴 했다.
몇 년 동안 매일 보고 살았던 친구지만,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못 알아볼 뻔했다. 라니는 그런 반응을 자주 겪었는지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쭈, 너 정말 오랜만이다.”
내가 녀석을 고라니라 부르는 것처럼 라니는 나를 쭈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당연히 나는 그걸 꽤 싫어했었다.
왠지 쭈구리 같은 어감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면 쭈꾸미던가.
“살 진짜 많이 뺐네.”
“길에서 마주치면 못 알아볼 정도지?”
“그러게 보기 좋다.”
“좋기는··· 다이어트를 하다가 아토피가 심해져서 회사 다니는 것도 어려울 정도가 됐는데. 적당히 좀 할 걸 그랬어.”
“전혀 그렇게 안 보여.”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얼굴만 보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라니가 긴소매를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녀석이 그걸 살짝 걷으니 엉망이 된 피부가 보였다.
“몸매를 얻은 대신에 피부를 잃었구나.”
“둘 다 포기할 수 없어. 그래서 최대한 회복하는 데 힘써보려고.”
“하지만 공기 맑고 물 좋은 곳에서 막상 살아보면 불편한 게 많아.”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라니의 의지는 꽤 강했다.
그 덕분에 이야기의 진도는 빨랐다.
이미 어느 정도는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듣고 온 덕분이었다. 나는 거기에 추가로 라니가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벽향주의 리뉴얼이고 그다음이 선물 세트 패키징 디자인이었다.
“제품 디자인은 내 전공이니 맡겨둬.”
“그리고 우리 회사가 아직 작아. 아마 디자인 업무만 하게 되지는 않을 거야.”
“나도 너랑 같이 술 빚어야 하는 거야? 한번 해보고 싶기는 했어.”
“그건 아니고 HR과 마케팅 업무 중의 일부도 네가 할 가능성이 커.”
“와우! 그 정도로 날 믿는 거야?”
“다들 필드에서 일하느라 바쁘니까. 아직 뒤에서 백업해주는 인력이 없었거든.”
현장 인력은 많이 충원됐지만,
아직 경리도 없어서 내가 직접 영수증 관리까지 모두 다 하고 있었다.
라니에게 그런 것까지 시킬 생각은 아니나 기본적인 것들만이라도 조금씩 도와주길 바랐다.
다행히 라니는 흔쾌히 동의했다.
리뉴얼과 패키지 디자인 외에는 디자인 업무가 많지 않다고 이미 듣고 왔는지 그 정도는 감수하겠다고 했다.
재미있는 거는 나는 모든 대화를 영어로 하고 있는데 정작 라니는 한국어를 섞어 쓰고 있었다.
“그런데 너 한국어 정말 많이 늘었네. 내가 떠나기 전에는 단어 몇 개만 알고 있었던 수준이었잖아.”
“다 너 때문이지. 너희 집에서 한국 드라마와 K-POP을 접했잖아. 나중에 완전히 빠져서 자연스럽게 한국어에 관심이 가더라고.”
“결국, 모두 다 내 덕분이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하지만 나도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이 모든 대화는 라니의 디자인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뤄질 수 없었다.
그런데 녀석이 가져온 포트폴리오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중에는 옥토퍼스에서 제법 판매량을 올린 무드등 제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도 네가 디자인한 거였어?”
“사내 공모전에 올렸는데 운 좋게 다들 괜찮게 봐주셔서 출시된 제품이지.”
“우리 집에도 하나 있는데 네가 디자인한 건 줄은 생각도 못 했네.”
그런데 뭔가 익숙했다.
어머니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롤모델로 삼은 어머니의 디자인 스타일을 그대로 물려받은 느낌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라니의 스타일이 더 도전적이란 것이다.
한동안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고 그러던 중에 끌루소를 통해 유럽에 벽향주가 납품되기 시작했다는 말도 나왔다.
“나도 거기 이름은 들어봤어. 오저당이 수출까지 하는 줄 몰랐네.”
“이제 시작에 불과해.”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한국 속담 맞지?”
“그렇지.”
라니는 그 부분에 꽤 흥미를 느꼈다.
로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유럽에도 자신이 만든 제품 디자인을 보여줄 기회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연봉과 근무 조건까지 순식간에 협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제법 긴 시간을 거쳐 조율한 끝에 마침내 나는 라니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저당에 입사한 것을 환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