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 양조장 (3)
구두 계약은 의미가 없다.
적어도 인주 정도는 묻혀줘야지.
만년필로 써 내려간 간이 계약서에는 지금껏 협의한 것들로 가득 채워졌다.
금액은 그대로 2억 2천만 원이고 설비는 두 달 이내에 오저당이 지정한 장소에 설치까지 책임진다는 내용이었다.
“정식 계약은 며칠 후에 변호사를 모셔와서 다시 작성하는 거로 하시죠.”
계약서를 접으며 말을 하자,
조택훈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걸로 모든 용무가 끝나진 않았다. 생각해 보니 여기서 가져갈 것이 설비 외에도 몇 가지 더 있었다.
일단은 의식을 잃은 요정들.
걔들은 오저당으로 데려가야지.
슬쩍 밖을 보니 이미 향이가 낑낑거리며 요정들을 하나씩 주차해 놓은 차 앞으로 옮기고 있었다. 도와주고 싶어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요정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너는 요정부터 챙겨라.
나는 이 사람 좀 납치해야겠으니.
조택훈이 가진 가치는 생각보다 컸다.
새로 들이는 설비를 그만큼 잘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오저당의 막걸리 설비를 써보니 은근히 잔고장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 중에 기계와 친한 이는 아무도 없기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생산 일정도 덩달아 밀려버리는 일이 생겼다.
설비의 추후 관리까지 고려해볼 경우.
아예 조택훈까지 오저당으로 데려가는 게 여러모로 장점이 많았다.
더구나 설비 원툴도 아니잖아.
나름 양조장을 이끌어봤고 그걸로 수상까지 했기에 주조 실력도 충분했다.
그에게 공장장 자격을 주고 일반 벽향주와 영귀주 생산을 통째로 맡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러면 수호도 오풍주와 프리미엄급 벽향주에 완전히 매진할 수 있겠지.
현재 상황으로서는 그렇게 생산 라인을 양분하는 것이 가장 나이스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양조장 외에는 다른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 막막하네요. 다시 본업인 설비로 돌아가자니 그것도 쉽진 않고요.”
“환경이 바뀐 탓에 벌어진 일이니 사장님의 잘못은 절대 아닙니다.”
“그래도 같이 일하던 식구들이 눈에 밟히네요. 그중에서 오저당이 있는 삼척까지 갈 사람이 몇이나 될런지···.”
이곳 홍천에서 삼척까지.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아예 주거지를 옮겨야 하는데 가정이 있는 집들은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쯤에서 슬쩍 그를 떠보기로 했다.
“사장님이 데리고 함께 오시면 되죠.”
“저도 오저당에 합류하라고요?”
“제가 제안한 고용 승계에는 바오 양조장의 디스틸러와 설비 담당자도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조택훈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오히려 지금껏 잠자코 지켜만 보고 있던 소정우 주무관님이 안타까웠는지 나섰다.
“조 사장님. 정말로 영귀주를 여기서 포기하실 건가요?”
“그건 여기 오저당 사장님이 앞으로 잘해주실 거라 믿는 수밖에 없죠.”
“사장님.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저에게 1순위는 벽향주와 오풍주입니다.”
작은할아버지와 선생님.
두 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말해주자 그는 곧장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었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이건 내 손이 아닌 남의 손가락이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나 지금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오셔서 직접 영귀주를 빚으시며 저와 같이 한번 키워나가 보시죠.”
조택훈을 설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책임감을 살살 건드리며 생산 책임자로 세우겠다고 하니 생각보다 쉽게 넘어왔다.
거기에 한 가지 더하자면 우리가 최근에 국내 양조장 중에 가장 핫한 오저당이란 사실도 큰 도움이 되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
그리고 그날 저녁.
오저당은 발칵 뒤집혔다.
잠시 다른 양조장을 다녀오겠다며 나갔는데 뜬금없이 설비 전체를 뜯어올 예정이라니 다들 조금 어이없어했다.
“와··· 무슨 쇼핑 하듯 양조장을 사들여? 그것도 2억이나 쓰는 게 말이 돼?”
“없던 일로 할까? 언제는 업무량이 너무 과도하다며 오풍주처럼 자동화 설비 좀 들여놓자고 달달 볶은 거는 누구더라.”
“그래도 2억이 넘어갈 줄은 몰랐지.”
“무려 1억이나 깎아서 그 정도야.”
나는 그쯤에서 내 구상을 알려줬다.
수출용 벽향주를 제외하면 모두 대량 생산 체계로 바꾼다는 말을 듣자 그나마 수호와 호세 등의 안색이 펴졌다.
확실히 작업량이 많이 줄어들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벽향주 리뉴얼 타이밍도 조금 더 빨라져야 하는 거 아니야?”
고라니의 질문에 나는 고개 저었다.
6월 전까지 설비가 모두 이전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테스트를 몇 차례 진행한 뒤에 제품을 내놔야 했다.
내 예상으로는 그 과정을 끝내려면 적어도 한두 달 정도는 걸릴 것이다.
“그리고 대량 생산으로 바뀌면 벽향주의 가격을 내리거나 용량을 높여서 리뉴얼을 할 생각이야. 라니 네 생각은 어때?”
“네 말대로 진행하면 제품의 아이덴디티가 완전히 바뀌는 거잖아. 이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어. 그래서 말인데 둘 중에 어느 방향이 더 좋을지 의견을 내놔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가격 인하를 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만오천 원이나 되는 소비자가는 부담된다는 결론이었다.
문제는 가격을 얼마나 낮추냐는 것에 있었다.
“이천 원 미만의 인하는 의미 없지 않을까. 뭔가 임팩트가 없어 보여.”
“그렇기는 하지.”
“누구보다 원가를 잘 아는 게 너잖아. 이건 사장인 네가 알아서 정해.”
수호는 결정을 내게 미뤘다.
마음 같아서는 확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산량이 증가되는 요정의 효과를 본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분명히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경계선을 만이천 원 정도로 보았다.
그러나 지금 결정짓지 않았다.
적어도 태백과 현송 등의 주류 상사 사장님들과 논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가격대에 따라 변동되는 판매량에 대한 부분은 나보다 그분들이 훨씬 더 잘 아시니 조언을 받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장 2억 2천만 원을 어디서 구하려고? 창고 임대하는 비용도 나가야 하는데 우리 그 정도 돈 없잖아.”
“이번 달에 주류 상사에서 정산되는 돈 있잖아. 부족하면 삼촌한테 잠시 빌려도 되니 걱정하지 마.”
그 부분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현재 오저당의 판매량을 봤을 때.
두어 달 정도만 허리띠를 졸라매면 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더구나 당장 2억 전부를 줄 이유는 없었다.
선수금은 5천만 원으로 잡아놨다.
설비 이전에도 돈이 적지 않게 들어가고 당장 조택훈 사장도 급한 불을 꺼야하는 상황이라 그 정도는 바로 줘야 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설비 이전이 진행되는 중간과 마무리된 이후에 줘도 되었다.
“바오에서는 몇 명이나 넘어올 것 같아?”
“조택훈 사장님까지 포함해서 세 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어. 설비 관련해서는 모두 그분에게 맡길 생각이야.”
“그건 정말 다행이다.”
수호는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그분이 계시면 곧장 수리도 가능하고 시간과 돈만 있다면 업그레이드 같은 것도 문제가 없다니 녀석은 꽤 기뻐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설비가 멈출 때마다 가장 애태우던 것이 녀석이었다.
주류 상사의 화물차는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술이 나오지 않는 진땀 나는 그런 상황은 항상 실장인 수호가 해결했었다.
다른 이들도 다를 게 없었다.
벽향주는 수동으로 병입을 하는 까닭에 바쁜 날에는 늦은 밤까지 일해야 했다.
하지만 설비가 들어오면 더 빠르게 그것도 자동으로 모든 단계를 거치니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아! 이번에 오픈하는 찾아오는 양조장 프로그램은 다들 숙지 잘했지?”
“물론이지.”
“맡겨만 주세요. 이번에 라니 실장님이랑 같이 준비를 철저하게 했어요.”
호세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외국인 체험 프로그램은 라니와 호세가 각각 영어와 스페인어로 맡기로 했고 내국인은 이모님이 담당하실 예정이다.
나는 호들갑을 떠는 호세 곁에 담담하게 앉아 있는 이모에게 괜찮으신지 여쭤봐야 했다.
“겨울 동안 닫아놨던 주막도 오픈해서 거기 관리도 하셔야 하는데 힘드실 것 같으면 저나 수호가 맡아도 돼요.”
오저당의 주막은 다시 열렸다.
어느덧 봄이 되어 계곡을 찾는 이들이 생기고 있었기에 더 미룰 수 없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작년보다 더 좋아졌다.
수호가 평소에 화초를 심어 놓았던 것이 이제야 결실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숙성창고와 양조장 사이.
참나무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만든 정원은 지나칠 때마다 그 아래 누워서 한숨 자고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그곳에는 나무에 매달아 놓은 그네도 하나 있어서 고라니를 비롯한 여직원들은 종종 그 아래서 휴식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휴식처는 꽤 많았다.
주변 환경만 본다면 찾아오는 양조장이 아니라 휴양림에 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
계곡은 코앞에 있고 한쪽에는 가볍게 산책이 가능한 오솔길도 마련되어 있었다.
“아니야. 주막에 사람이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 택배 업무도 빼줬잖아. 일단은 내가 맡아서 열심히 해볼게.”
“일거리가 많아지시면 작년처럼 마을 어르신들한테 부탁 좀 드릴게요. 대신 일당은 섭섭하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동네 할매들이 작년 여름에 용돈 벌이가 꽤 쏠쏠했는지 그 이야기 많이 하시기는 하더라.”
길을 가다가 지나칠 때마다 유난히 반겨주시던 이유가 아마 거기 있겠지.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가끔 오는 손주들 용돈을 쥐어주시는 게 낙인 분들이었다.
“하하, 조만간 막걸리 들고 인근에 있는 마을 회관들 한 번 돌아야겠네요.”
“안 그래도 그럴 필요가 있어 보이긴 하겠더라. 요즘 큰 차들이 마을 안쪽까지 오가는 터라 불만도 조금씩 생기고 있어.”
“그렇겠네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뭐든 지원해드릴 테니 말씀해 주세요.”
나는 그쯤에서 회의를 마쳤다.
갑자기 모이라고 한 탓에 퇴근 시간을 넘겼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다들 작업을 마무리하러 나가자 수호는 나를 잠시 불러냈다.
“무슨 생각인 거야?”
“뭘 물어보는 건지 정확하게 말해야 내가 그에 맞는 답을 해줄 거 아냐.”
“양조장 설비를 사들인 거는 충분히 나도 이해해. 하지만 우리 술만으로도 바쁜데 왜 바오 양조장의 영귀주까지 사들인 건지 이해가 안 가.”
녀석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영귀주의 판매량은 그리 많지 않다.
벽향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적어도 연간 매출이 15억 내외는 된다고 장부에서 확인했다.
“나는 오저당이 단순하게 양조장으로 머물게 할 생각이 없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기회가 된다면 계속 확장할 거야. 바오 양조장이 아니었더라도 좋은 매물이 나왔다면 어떻게든 사들였을 거야.”
와인을 빚는 와이너리.
맥주를 만드는 브루어리.
어떤 술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언제든 사들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덩치를 불리다 보면 언젠가 우리도 종합 주류 회사가 되겠지.
오저당을 제대로 해보겠다고 생각한 이후부터 내 최종 목표는 언제나 같았다.
그게 불가능한 거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오히려 국제 트렌드를 보면 국내 시장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 글로벌 1위 기업 오션.
오션은 브랜드 파워 상위 20위 중에 9개 이상을 보유한 거대 주류 회사다.
이름만 들어도 대부분의 사람이 아는 것들이 모두 오션이 보유한 술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역사가 불과 25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압도적인 자본과 공격적인 투자가 이룬 성과였다.
‘우리라고 못 할 거는 뭐야.’
국내에 있는 수많은 술.
나는 그걸 품에 안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는 장사였다.
새로 제품을 개발할 필요도 없고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전통도 덩달아 따라오게 된다.
“그렇게 모은 제품을 우리가 개량해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판매한다면 얼마나 보람되겠냐.”
한동안 내 설명을 듣고만 있던 수호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떼려고 하는 순간 라니가 안으로 다급하게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녀는 뫼리스에게 전화가 왔었다며 내게 전달해주었다.
“지난번에 가져간 벽향주 반응이 좋다고 끌루소에서 추가 주문 들어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