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4)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을까.
양조장에서 빚은 막걸리는 곧장 마시는 것보다 이틀 후가 더 맛있어진다.
그게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막걸리는 병입을 한 이후에도 계속 숙성되기에 차이가 조금 있다.
술에 있는 당분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효모는 계속해서 먹성 좋게 활동한다.
당분이 사라지며 막걸리는 점차 신맛이 강해지는 데 보통 그쯤에서 맛의 변질이 있으니 유통기한이 끝난다고 본다.
그래서 종종 우리 직원들은 막걸리를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소한테 음악을 들려주듯이 양조장에 음악을 틀자는 제안도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미 국내에도 그런 방식으로 클래식 음악을 틀어서 술을 숙성시키는 양조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중급 요정의 효과는 확실했다.
빛의 알갱이가 들어간 오풍주는 그 뒤로 추가 발효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어디에 놔둬도 거의 비슷했다.
다만, 햇빛에 오래 노출시키면 상하는 것은 피할 수 없기에 그건 조심해야 했다.
[막걸리에 들어있는 효모와 유산균이 잠시 잠든 상태라고 보시면 돼요.]
향이는 그렇게 이 현상을 설명했다.
그 기간은 한 달 정도가 될 것이라 했다.
그러면 오풍주의 유통기한이 두 배로 늘어나 이제 두 달이 된다는 의미였다.
그 정도면 유통을 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유럽 수출은 아직 불가능했다.
알아보니 한국에서 프랑스까지 아무리 빨라도 두 달 정도는 걸린다고 한다.
항해 기간만 40일 가까이 된다고 하니 도착과 동시에 유통기한이 끝날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곳이 가장 좋을까.
당연히 한국에서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동남아가 수출하기는 제일 좋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곳은 다른 나라가 아닌 미국이었다.
LA로 항해하는 시간과 통관까지.
모두 합쳐서 20일이 걸린다고 한다.
현지 운송 시간을 고려해도 두 달이란 유통 기한이 그리 짧게 느껴지진 않았다.
국내의 막걸리 상당수가 그보다 더 짧은 기간 내에 유통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마침 미국에서 오저당에 관심을 보이며 찾아오겠다는 이가 있었다.
당연히 나는 그들의 방문을 기꺼이 허락했고 전화가 온 바로 다음 날 두 명의 남자가 오저당을 직접 찾아왔다.
“KR 마트에서 오신 분들이라고요?”
“저는 KR 마트에서 주류와 음료 제품의 해외 소싱을 담당하는 필립 최라고 하고 이쪽에 계신 분은 심양 머천트의···.
“마해진 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시원한 차를 내올 테니 잠시만요.”
어느덧 7월이 넘어서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계절이다.
실제로 오저당을 찾아온 두 남자의 와이셔츠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차를 타고 들어와도 되는데 공장 앞에 주차를 하고 걸어와서 저 모양이었다.
아마도 공장에서 오저당까지 거리가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당연히 차는 이모님이 준비해주셨다.
요즘 이모님은 주막에 다시 집중하고 계셨는데 은근히 손님이 많이 오고 있다.
대부분은 찾아가는 양조장을 찾아온 이들이었고 다른 몇 명은 트레킹 코스를 걷다가 쉬러 내려온 이들이었다.
잠시 뒤에 냉차를 들고 돌아가자,
필립이라는 남자는 자신이 속해 있는 KR 마트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며 만류했다.
캘리포니아 지역에 살았던 한인치고 그곳을 모르는 이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저도 KR 마트 단골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떤 곳인지 설명은 안 해주셔도 됩니다.”
“단골이셨다니 무슨 말이죠?”
“몇 년 전까지는 미국에서 살았거든요. 주말마다 KR 마트에 가서 한국 과자를 사 먹는 게 저에게는 유일한 행복이었죠.”
겉치레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한때 한국 생활을 그리워하며 향수병에 시달리던 내게 KR 마트는 잠시나마 한국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해줬다.
그곳을 찾는 이들 대부분이 한국어를 썼고 친구들과 즐겨 먹던 간식거리도 마트에 가득했기에 현실을 잊게 해줬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도피처와 같았다.
“아하! 그러셨군요.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오신 분인지 몰랐습니다.”
필립은 꽤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수 시장에 집중하는 한국 기업은 미국에 있는 KR 마트를 전혀 모르는 일이 많다고 했다.
하긴 미국에서 살다 온 나와 라니 정도만 KR 마트에 대해서 알지 나머지 오저당 사람들은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서부 지역이 아닌 다른 곳에 사는 미국인 대다수도 KR 마트는 잘 모를 거다.
한 마디로 로컬 체인이었다.
아직은 미국을 대표하는 유명 체인들과 비교하는 것은 어려운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지금 이 자리에서 굳이 꺼낼 필요는 없었다.
“양조장 구경을 해봐도 되겠습니까?”
필립이란 남자는 내부를 궁금해했다.
일반 방문객에게도 오픈된 양조장이라 나는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오저당과 숙성 창고 등을 보고 나온 두 사람은 마을 입구에 있는 공장까지 합치면 생각보다 규모가 크다며 놀랐다.
“최근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이번에 벽향주를 리뉴얼하신 뒤로 반응이 매우 좋다고 들었습니다.”
“운이 좋았죠. 제가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합니다.”
계속 시간을 허비할 수 없기에 나는 본론으로 들어가길 재촉해야 했다.
최근에 수호와 나는 영귀주의 리뉴얼을 대비해서 제품 개량에 힘을 쏟고 있었다.
하루이틀만에 이뤄지는 일은 아니었으나 우리는 오풍주를 통해 얻은 경험이 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오지 않았다면 오늘도 다양한 방식으로 술을 빚고 있었을 거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셨겠지만, 오저당의 술을 저희 KR 마트에서 유통하고자 제안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왜 같이 오신 거죠?”
“심양 머천트는 주류 수입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기에 KR 마트로 입점되는 술은 대부분 저희를 통해서 들어갑니다.”
“그렇군요.”
내가 미국에서 살기는 했지만,
주류 수입이 되는 과정까지 알진 못한다.
마해진 팀장은 간단하게 관련 내용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미국은 0.5% 이상의 알코올이 들어가면 주류로 본다.
하지만 모든 술이 주류담배무역국(TTB)의 소관은 아니었다.
알코올 7% 미만은 FDA의 통제에 따르고 그 이상은 TTB의 권한이었다.
당연히 오저당의 술은 일반 막걸리 외에는 7% 미만이 없기에 TTB의 규정에 따라서 수출을 해야 했다. 한동안 이야기를 듣던 나는 내용을 정리해봤다.
“심양 머천트가 수출에 필요한 TTB 관련 서류 작업과 라벨링에 대한 도움을 주실 수 있다는 이야기 맞으시죠?”
“맞습니다. 그리고 알코올 제품이기에 바이오테러리즘법에 따라 식품 시설등록도 미리 해놓으셔야 합니다.”
“생각보다 복잡하네요.”
“단순하게 수입하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 그런 번잡한 일을 돕는 게 저희 일이죠.”
더구나 콜드 체인도 가능하다고 했다.
콜드 체인은 생산부터 최종 소비자에게 도착하는 과정 내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물류 시스템을 의미한다.
상온 보관이 가능한 벽향주와 달리 오풍주는 온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에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둘 다 말빨이 장난 아니네.’
둘이 왜 같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심지어 이런 상담을 많이 했는지 두 사람의 호흡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한 번씩 치고 빠지는데 정신없이 듣고만 있다 보면 곧장 사인부터 하고 싶은 정도였다.
그만큼 그들의 제안은 달콤했다.
다른 양조장이었다면 해외에서 자신의 제품이 판매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져 조건이고 뭐고 안 따졌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저당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오풍주의 수출을 생각하면 좋은 기회인 것은 맞으나 오저당 전체를 놓고 본다면 무턱대고 제안을 받을 이유가 없다.
아메리카보다 먼저 유럽에 벽향주가 발을 디딘 상태라 당장은 그쪽에 집중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미국의 인구가 상당하다지만,
유럽 전체의 인구보다 1억 명이 적다.
냉정하게 KR 마트를 평가하자면 전체 인구 중에서 극소수인 2천만 명 남짓한 아시안을 타깃으로 영업하는 곳이다.
“일단 조건부터 들어보죠.”
내가 그쯤에서 선을 긋자.
필립은 자신의 구상을 내게 밝혔다.
초기 발주는 만오천 병이었는데 그 정도면 40피트 컨테이너 절반쯤은 채울 수 있는 꽤 큰 주문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거기에 오풍주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는 이미 수출에 성공한 벽향주가 아니라 오풍주의 수출을 위해 마련한 것인데 이러면 의미가 없었다.
“오풍주는 관심이 없으신가 봅니다.”
“처음에는 주문량의 절반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달이란 유통 기한을 고려하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 최근에 공정을 바꿔서 오풍주의 유통기한은 이제 두 달로 바뀌었습니다.”
“멸균 공정을 도입한 겁니까?”
나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 저었다.
괜히 없는 설비를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나중에 문제만 키울 뿐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유통기한이 늘었다고 말하니 필립은 쉽게 믿지 않았다.
우리가 수출에 눈이 멀어 무리수를 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당장의 이득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지만, 나 같아도 그런 의심이 생길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걸 설명할 방법이 없잖아.
요정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행복한 일이나 종종 이럴 때마다 난감했다.
하지만 그걸 다 설명할 이유가 있을까.
탁주의 유통기한 설정은 양조장이 정할 수 있고 관련 자료만 만들어서 보관하면 될 뿐이다. 더구나 영업 비밀이라는 전가의 보도 같은 핑계가 있지 않은가.
당연히 관련 자료는 만드는 중이다.
성분이야 예전 그대로 나올 것이 뻔하고 애초에 우리 술에 첨가물 따위는 없었다.
그런 거를 넣고 비싼 돈을 받는다는 것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물이 나오는 데 시간이 걸려서 당장 가지고 있는 게 없기에 정면 돌파를 하기로 했다. 아무리 말로 떠들어봐야 납득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제가 오천 병의 오풍주를 드릴 테니 두 달 이내에 상하면 그 물량에 대한 돈은 안 받겠습니다.”
“서로 불편하게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죠.”
오풍주 5천 병의 원가는 3천만 원.
그 정도를 투자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 오저당이 한 달에 버는 순수익만 최소 4억이 넘어간다.
하지만 무모하게 이런 제안을 하는 게 아니었다.
스피릿 포인트가 우릴 도와줄 것이다.
평점을 그 정도로 받은 제품이라면 수천 병에서 수만 병 정도까지는 판매량이 일시적으로 증가하는 걸로 알고 있다.
5천 병 정도는 유통 기한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져버릴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우리 아버지도 있다.
적어도 수십 병 이상은 사서 마시겠지.
아들이 빚은 술이니 마셔서 응원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들어 하셨던 술이라 알아서 홍보까지 해주실 거다.
‘요즘도 술 좀 보내달라고 성화셨는데 KR 마트에 입점한다면 좋아하시겠네.’
아버지 제가 이렇게 효도합니다.
이런 효심을 알아주시려나 모르겠네.
필립과 마해진은 잠시 눈빛을 주고받더니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이 손해 보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하시죠.”
“대신 저한테도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이요?”
“유통 기한에 문제가 없음이 확인되면 당연히 추가 주문을 넣으셔야죠.”
나는 그걸 계약서에 넣어주길 바랐다.
먹튀하는 거를 방지하려면 적어도 그 정도는 해놔야지. 주류 상사 중에는 현송과 다르게 양아치들도 꽤 많았다.
최근에 새롭게 계약한 곳이 많다 보니 정말 다채로운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그런 곳들은 모두 쳐내고 있기는 했지만, 가능하면 깔끔하게 문서로 만들어 놓는 게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해결됐다.
필립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구체적인 수량까지 협의를 마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심양 머천트의 마해진 팀장 주도하에 빠르게 이야기가 진행됐다.
오저당은 KR 마트가 아닌 심양 머천트와 일을 해야 하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부분만큼은 의견 차이가 생겼다. 그건 바로 심양 머천트와의 계약 기간이 길다는 것이다.
“5년은 너무 깁니다.”
나중에 문제가 될 부분이 많았다.
몇 년 전에 막걸리 판매 1위 업체가 미국 총판권 때문에 분쟁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은 바가 있었다. 그로 인해 한때 불매 운동까지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때는 내가 어려서 잘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자회사에 총판권을 넘겨주기 위해 계약을 종료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우리도 같은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 장담하긴 어려웠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지면 5년 동안 미국 시장은 진입할 수 없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끌루소도 2년간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는데 그 이상은 넘길 생각이 없었다.
“2년 계약으로 하시죠. 그 이후는 매년 한 차례씩 연장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오저당보다 훨씬 큰 업체를 상대로도 그런 계약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예외는 있는 거니까요.”
마해진 팀장은 난색을 표했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최종 결정은 그가 아닌 필립 최에게 있다는 거는 눈치채고 있었다.
아마 이곳에 온 것도 그가 원해서 마련한 자리겠지.
KR 마트가 그렇게 해달라고 말하면 을인 심양에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필립은 누군가와 메시지를 계속 주고받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 팀장과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대충 분위기를 보니 심양의 마 팀장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돌아온 필립은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렇게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