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귀주의 진가 (2)
술의 세계는 정말 알 수 없다.
같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빚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더구나 재료마저 다르다면 그 차이는 훨씬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벽향주와 영귀주.
두 술의 재료는 조금 달랐다.
영귀주의 경우에는 강원도 서부 지역의 쌀을 썼고 우리가 빚던 벽향주는 고성과 삼척 등의 동부 지역 쌀을 써야 했다.
더 좋은 쌀이 있는 것은 나도 알지만, 지역 특산주를 유지하려면 방법이 없다.
작년에는 지방무형문화재이신 선생님이 계셨기에 큰 문제가 없었으나 정식으로 전수 받기 전에 떠나셔서 어쩔 수 없다.
농산물마저 다른 지역의 것을 쓰면 벽향주는 화이트 라벨마저 전통주의 지위를 잃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 탓에 증류를 마친 뒤 숙성 과정 중에 차이가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이거 그냥 청주가 아니라 소주로 만들어서 파는 거는 어때?”
“나도 방금 같은 생각을 했어. 이걸 제품으로 내놓지 않는 거는 수많은 주당 선생님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거야.”
굳이 청주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이미 오저당에는 벽향주라는 대체 불가능한 청주 제품이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아예 소주라는 새로운 분야로 진출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한국인이면 역시 소주잖아!
그쪽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선생님에게 전수 받은 벽향주와 탁주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오풍주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벽향주의 생산이 자동화가 된 후부터 오저당에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영귀주의 런칭을 진행했던 건데 그걸 소주로 바꾼다고 문제 될 것은 없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해결할 게 있었다.
“조택훈 공장장님 의견부터 물어보자.”
영귀주에 대한 권한은 사 왔지만,
그래도 뭔가를 결정하기 전에 그분의 의견은 한 번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누구보다 영귀주에 대한 애정이 강하던 분이라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예측이 안 되었다.
그 길로 바로 조택훈을 찾아간 뒤.
우리는 현재 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고 그 결과가 어떤지 증류된 술부터 따라줘서 맛을 보여줬다.
신중한 표정으로 영귀주의 변화를 맛본 그는 내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영귀주를 청주가 아닌 소주로 만들고 싶단 말씀이시죠?”
“직접 맛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게 훨씬 더 상품성이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되시면 당연히 그래야죠. 이제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 놓을 수 있겠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내 질문에 그는 이런 답을 내놨다.
영귀주의 제조법과 상표권을 돈까지 받아 가며 팔았는 데 제품화가 안 되니 돈을 돌려줘야 하나 고민했다고 한다.
우리가 아예 시도조차 안 했던 것도 아니고 재료의 값은 둘째치더라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계속 들이고 있던 터라 더 신경 쓰였던 것 같았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식구끼리 그런 말은 안 해도 됩니다. 어떤 길로 가든 좋은 술만 만들 수 있다면 그걸로 됐잖아요.”
“그럼 이제부터 영귀주를 빚는 거야?”
수호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그러자고 할 줄 알았던 두 사람은 의아하게 나를 바라봤다.
“숙성 기간을 정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이제 겨우 한 달 지났잖아. 조금만 더 지켜보고 결정하자.”
“얼마나 더 숙성하려고?”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더 지켜 봐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그 이상은 무리다.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다.
벽향주 퍼플 라벨을 숙성하기 위해서 아주 작은 공간조차 활용하는 중이다.
그리고 생산 사이클은 가능하면 짧은 편이 여러모로 편했다.
하지만 확인은 해야 했다.
훨씬 더 맛이 좋아진다면 한 달을 더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숙성이 빠른 오저당이니 한 달이지 만약에 다른 양조장이었다면 몇 개월 이상은 더 두고 보자고 했을 것이다.
“사장님이 말한 대로 일단은 해보고 정하죠. 그리고 증류 과정도 다시 한번 체크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증류주 설비도 가능하신가요?”
“상압식은 전혀 문제없는데 감압식은 복잡해서 저도 어느 정도 공부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감압식으로 빚은 술이 부드러운 장점이 있다고 하던데요.”
수호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상압식과 감압식의 차이는 꽤 크다.
그 차이는 압력에서 생기는 데 감압식의 경우는 낮은 온도로 증류하기에 탄내도 적고 맛도 상압식에 비해 부드러워진다.
향에서도 제법 큰 차이가 있다.
감압식은 제품 자체가 지닌 향은 줄어드나 고비점 성분이 거의 생기지 않아서 누룩취를 없애는 효과가 있다.
예전에 본 통계가 있는데 여성과 젊은 층은 특유의 냄새가 적고 부드러운 감압 증류주를 더 선호한다고 한다.
어떤 방식을 택하냐에 따라 마케팅 타깃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걸 여기서 정하기는 어렵고 일단은 감압식 증류기도 추가로 마련해서 두 가지 방식 모두 테스트해보고 정하죠.”
“그건 어디에 설치하려고?”
“시작부터 크게 할 필요는 없잖아. 옹기 몇 개쯤 빼내고 소형으로 넣으면 돼.”
“대신 감압식이 증류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상압식보다 조금 더 걸릴 겁니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그때 수호가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공장장님. 이번 기회에 영귀주란 이름도 바꾸는 거는 어떤가요?”
“하하! 저는 상관 없습니다. 제가 그거 지을 때도 직원들이 촌스럽다고 반대 많이 했거든요.”
“혹시 염두에 두고 있는 이름이라도 있는 거야?”
내 질문에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직원들한테 새로운 이름을 공모하는 거는 어떠냐고 제안했다.
거기에 보상으로 약간의 보너스도 걸자고 했는데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그렇게 하자.”
*
그날 저녁 퇴근할 무렵.
나는 전 직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앞으로 오저당에서 새로운 술을 빚을 거란 이야기에 다들 무척이나 반겼다.
그만큼 일이 늘어날 것이 분명한데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오저당도 제품 라인을 더 늘려야 하긴 했어요. 지금 나가는 게 벽향주랑 오풍주 제외하면 일반 막걸리가 전부잖아요.”
“맞아요. 그나마 일반 막걸리는 거의 생산하지 않으니 사실상 두 개가 전부죠.”
벽향주의 라벨이 두 개로 나눠지나,
퍼플 라벨은 내년 여름에 출시 예정이다.
그러니 사실상 세 가지에 불과했고 직원들 말처럼 일반 막걸리는 거의 생산하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들어가는 노동력과 수익성.
여러 가지를 고려한 결과였다.
그래도 예전의 오저당을 기억하는 분들과 저가의 막걸리를 마실 수밖에 없는 처지인 분들도 있기에 아예 접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영귀주의 이름을 바꾸려고 하는데 증류식 소주에 어울리는 이름이 있으시면 제안해주세요.”
“다행이다! 영귀주는 도저히 영감이 안 떠올라서 죽을 것 같았어.”
그 소식을 반긴 것은 라니였다.
이제 슬슬 리뉴얼을 시작할 때였다.
하지만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해서 라니도 꽤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 같았다.
1년 사이에 두 제품을 완전히 리뉴얼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지.
어머니도 차라리 새로 제품을 런칭하는 게 쉽지 리뉴얼은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공모를 받아서 채택되신 분에게는 사장님이 보너스로 200만 원 쏜답니다.”
“오! 정말로 이번에 제품명으로 선정되면 200만 원을 주시는 건가요?”
“물론이지. 그러니 많은 참여 부탁해.”
“예쓰, 그 돈이면 멕시코 왕복 비행기표는 충분히 살 수 있겠네요.”
“200만 원이면 눈여겨보던 카메라 렌즈도 새로 살 수 있고···.”
내가 말할 때는 다들 잠자코 눈치를 보고 있더니 수호가 200만 원의 보너스를 언급하자 태세 전환이 우디르급이었다.
우주와 유성이는 벌써 어떻게 보너스를 쓸까 고민하고 있었고 호세는 이미 태평양 건너로 휴가를 떠난 것 같았다.
다른 직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벌써 여러 가지 이름이 생각나는 대로 툭툭 튀어나오고 있었기에 나는 두 손을 들어 진정하라며 자제시켜야 했다.
“시간은 넉넉하게 8월 말까지 줄 테니 다들 심사숙고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누가 심사를 보는 건가요?”
“실장님들과 제가 투표로 정할 겁니다. 당연히 우리들은 공모전에 참가하면 불공평하니 빠져야겠지?”
“에이··· 좋다 말았네.”
수호는 투덜거렸지만,
딱히 아쉬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어차피 네이밍 실력은 녀석도 그리 좋지 않았기에 약간의 기대도 없어 보였다.
그걸로 회의는 끝났기에 다들 퇴근을 시작했고 나는 수호와 가볍게 술자리를 갖기로 했다.
“아까 그 술이나 마저 마시자.”
“흐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추가 숙성 테스트할 양은 충분하지?”
“물론이지.”
걱정 말라며 수호는 술을 꺼내왔다.
직원들에게 맛을 보여주기 위해서 네 병을 가져왔는데 두 병이나 남았다.
우리는 안주도 없이 그 술을 나눠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증류주를 누구에게 맡길 건지 의논했다.
“나랑 공장장님은 벽향주 라벨 하나씩 맡고 있고 호세는 오풍주를 맡고 있어서 증류주까지 담당하기는 조금 어려워.”
“나도 알고 있어.”
“그렇다고 네가 하기도 애매하잖아.”
“누가 가장 적당할까?”
딱히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쌍둥이는 너튜브도 맡고 있어서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모나 라니가 술을 빚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건 재능 낭비에 가까웠다.
“그럼 누가 남지?”
“택배 일을 해주시는 아주머니들도 제외하면 공장장님이랑 같이 입사한 두 분이랑 나희 밖에 없지.”
“이런··· 어쩌면 좋지? 새로 사람을 뽑아야 하나?”
그러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가능하면 현재 직원들이 성장해서 한 자리씩 차지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괜히 실장급 하나가 잘못 들어오면 파벌이 생기고 개판 나기 쉬웠다.
“셋 중에 누가 가장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나희는 경력이 너무 짧아서 책임자급 자리를 줄 수 없지.”
“그럼 정영재 씨랑 윤가람 씨 둘 중에 하나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네.”
“아무래도 바오 양조장 출신이 영귀주와 소주까지 맡는 게 좋지 않겠어?”
지금 우리가 마시고 있는 증류식 소주를 만들려면 일단 영귀주를 빚은 후에 다시 증류 과정을 두 번이나 거쳐야 한다.
그러니 바오 양조장에서 경험을 쌓은 이들이 가장 현실적으로 적합하긴 했다.
문제는 둘 중에 누구한테 맡기냐는 것이다.
정영재와 윤가람.
두 사람의 경력은 거의 비슷했다.
바오 양조장이 세워질 무렵부터 일을 해서 5년째 술을 빚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이도 동갑이고 같은 대리 직급이라 누가 맡아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수호 너는 누가 적당할 것 같아?”
“같이 일하는 거는 영재 형이 편하지만, 나는 가람 형이 맡았으면 좋겠어.”
“나도 같은 생각이야.”
결정적인 차이는 술에 대한 열정이다.
가람 씨는 우리가 영귀주를 빚을 때마다 옆에서 도왔고 쉬는 날에도 다른 양조장을 돌아다니며 더 배우려고 했다.
그리고 한 번 파기 시작하면 끝을 보려는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혼자 증류주를 빚을 수 있을까?”
“제품 출시 전에 당연히 사람을 뽑아서 붙여줘야지. 가람 대리님이 빠지면 벽향주 생산에도 차질이 생기잖아.”
“여기는 다 좋은데 사람 구하는 게 너무 어려워서 큰일이야.”
“그건 내가 알아서 준비할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여러 곳에 접촉하는 중이었다. 그중에는 인근에 있는 고등학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졸업 예정인 학생을 선발하기 위한 것인데 생각보다 호응이 좋은 편이었다.
일부 특성화고 학생들은 가을부터 현장 실습을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직 학생이라 술을 빚는 일을 맡길 수는 없고 기계 설비와 사무 업무 보조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이러고 있을 줄 알았어.”
그때 라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녀석은 우리끼리 술을 마시는 걸 보고 눈을 흘겼다. 녀석의 손에는 종이가 쥐어져 있는 것을 보니 저녁을 먹으라고 부르러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직 퇴근 안 하고 일하고 있었어?”
“정리하고 나가려는데 메일이 하나 와서 그것 좀 확인하느라 못 갔다.”
“무슨 메일이었는데?”
라니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내게 내밀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했다.
“뉴욕이 우릴 부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