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28화 (128/254)

영귀주의 진가 (3)

갑자기 뉴욕은 무슨 이야기지?

그곳으로 휴가를 가겠다는 뜻인가.

내가 한동안 의문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자 라니는 종이에 적힌 내용부터 확인하라며 재촉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브루클린에서 열리는 주류 박람회였는데 우리를 그 자리에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오저당의 술을 홍보할 수 있는 부스와 숙박 시설을 제공해주겠다고 했다.

“이거 스팸 메일 아니야?”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이런 메일은 수도 없이 온다.

대놓고 구걸하는 메일도 있고 클릭 한 번에 모든 걸 털어가는 놈들도 있지.

오저당 공식 메일을 통해서 사업 제의라며 사기를 치려고 접근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라니는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며 고개 저었다.

“그래서 내가 몇 번이고 확인했지.”

“담당자랑 통화도 해봤어? 참가하는데 비용이 진짜 무료인 거 맞아?”

“거기 시간이 지금 새벽인데 어떻게 통화를 해. 그건 내가 내일 오전 일찍 확인할 테니 걱정하지 마.”

“그런데 너는 브루클린 주류 박람회라고 들어봤어?”

나는 솔직히 처음 들어 봤다.

이런 박람회가 과연 존재는 하는 걸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모르는 것이 정상인 것이 해외 박람회 쪽으로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유명한 박람회 중에 몇 개는 이름 정도는 알고 있으나 대부분 와인이나 위스키에 특화된 곳들이었다. 애초에 오저당 술을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박람회는 많지 않다.

더구나 끌루소와 KR 마트 같이 벌여 놓은 일이 워낙 많아서 그 수습을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끌루소만 하더라도, 이번에 5만 병이나 주문을 했다.

뫼리스가 말해주었던 마트 쪽으로 입점에 성공해서 프랑스 남부 지역에 있는 수십여 개의 마트에 깔리게 되었다.

이번은 1차 주문에 불과했고 추가로 5만 병을 더 주문할 거라 예고까지 했다.

‘아마 KR 마트 때문이겠지.’

역시 경쟁은 좋은 거야.

아마 KR 마트가 아니었다면 이런 대량 주문은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뫼리스가 오저당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생긴 일이었다.

우리가 어느 정도의 생산량을 가지고 있는지 뻔한 상태인데 곧 미국에서도 벽향주가 판매되기 시작할 예정이다.

그때가 되면 필요한 물량을 확보하기 어려워질 거라 판단한 것 같았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거는 아니지.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자 라니는 브루클린 박람회의 정보를 알려줬다.

여기 오기 전에 검색을 제법 해본 것 같았는데 세계적인 박람회는 아니더라도 미국 내에서는 꽤 많이 참가한다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 왜 우릴 초청해? 우리를 아는 게 더 이상하잖아.”

이제 막 미국에 진출한 상태다.

한국에서도 우리 존재를 모르는 이들이 아직 많은데 미국에서는 정말 듣보잡 수준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라니는 메일 하단에 적혀 있는 부분을 짚어줬다.

“스피릿 포인트에서 추천해줬어.”

“고작 술 여섯 병에 매수당한 건가? 그럴 줄 알았으면 열두 병쯤 보낼걸.”

“장난치지 말고.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글쎄··· 우리한테 도움이 될까?”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오저당은 KR 마트를 제외하면 아직 전문 주류 판매점에 술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부분은 총판인 심양 머천트에서 알아보고 있기는 했지만, 그리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진 않았다.

“나는 한번 가보고 싶어.”

“너도 가려고?”

“안 되는 이유는 또 뭔데? 다양한 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잖아. 앞으로 새로운 제품을 디자인할 때 도움이 될 거야.”

이미지로 제품을 보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것이 훨씬 더 좋기는 하겠지.

라니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기에 조금 고민이 됐다. 잠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수호도 라니의 편을 들어줬다.

“이번 기회에 둘 다 다녀와. 곧 추석도 다가오는데 박람회를 보고 난 다음에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오면 좋잖아.”

“브루클린이 어딨는지 알고 말하는 거야?”

“미국 어딘가 있겠지. 내가 꼭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는 거야?”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운걸. 하긴 브루클린이 뉴욕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꽤 될 거다.

외국인이 강남과 서울을 별개로 놓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거겠지.

참고로 브루클린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거리만 거의 3천 마일 가까이 된다.

차를 타고 가면 43시간쯤 걸리고 비행기를 타도 7시간 정도는 걸린다.

대륙의 동서쪽에서 끝과 끝이니 당연한 일이다.

‘이번 기회에 KR 마트에 진열될 우리 술도 확인해보고 올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박람회가 9월 초라 그쯤이면 벽향주가 미국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걸 찍어서 너튜브 같은 데도 올리면 나름대로의 콘텐츠가 되겠지.

무엇보다 향이가 꽤 관심을 보였다.

예전에 내가 미국을 다녀왔을 때도 함께 다녀왔으나 그때는 거의 집에만 있었으니 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이번 기회에 미국에서 출시되는 술을 다양하게 맛보고 관련 분야의 사람들과 버번 증류소 같은 곳도 견학해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 여름휴가도 못 갔는데 한 번 다녀오자.”

*

나갈 때 나가더라도,

해야 할 일들을 하고 가야지.

박람회에 가기 전에 적어도 증류주에 대한 것은 어느 정도 정리가 필요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새로 증류기를 들여와서 레시피를 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하게 만들어 놓는 일이었다.

상압식과 감압식.

두 가지를 모두 해본 결과.

감압식이 가진 장점이 분명히 많기는 했으나 우리가 만들 증류주는 상압식 증류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숙성을 한 이후의 차이 때문이었다.

감압식이 처음에는 좋으나 숙성을 할수록 오히려 상압식의 맛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향에 있었다.

부담될 정도의 진한 향은 아니고 은은하게 퍼지는 느낌이 고급스러웠다.

그리고 숙성 기간과 도수.

이 두 가지는 아직 더 살펴봐야 했다.

일단 숙성 기간은 한 달로 정해졌다.

한 달 동안 더 숙성해봤으나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 것은 아니다.

과거 벽향주가 그랬던 것처럼 일년쯤 두고 볼 생각이었다. 그 정도까지 숙성하면 큰 차이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구두구! 이번 오저당 사내 공모전의 당선자는···.”

수호는 테이블을 두 손으로 두드리며 나름대로 긴장감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어느덧 8월 말이 되어서 오늘은 공모전에서 공약한 상금 200만 원의 주인공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직원들의 참여는 꽤 활발했다.

그사이에 모은 이름만 백여 가지가 넘어갔는데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성과는 분명히 있었다.

제법 좋은 이름도 많았고 전혀 생각지 못한 신박한 것들도 몇 가지 있었다.

“옥주윤 사원! 축하해요.”

“주윤아, 축하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윤이가 받아서 한턱 쏘라는 말은 못 하겠다.”

옥주윤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뽑힐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내가 현금을 두둑하게 담은 봉투를 건네자 실감이 났는지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그녀가 제출한 이름은 ‘소담’.

생김새가 탐스럽다는 의미가 있기도 했고 담백한 맛을 지닌 우리 술의 특성과 이미지가 잘 맞았기에 그걸로 결정됐다.

라니는 소담이라 내정된 후부터 영감을 받은 건지 벌써 새 제품의 컨셉을 잡고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영문 표기가 쉬워서 좋았다.

벽향주가 다 좋은데 영문으로 표기하면 상당히 길어서 읽기가 어려운 편이다.

입장을 바꾸면 우리도 비슷하잖아.

라프로익(laphroaig) 같은 위스키를 처음 보면 어떻게 읽을지 애매할걸.

이제는 수출도 고려해야 할 때다.

벽향주와 오풍주도 해외로 나가는 상황인데 소담이라고 수출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이미 유럽과 미국 쪽에 뚫어 놓은 루트가 있으니 어렵진 않을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앞으로 우리가 빚을 소주는 소담이라 정해졌으니 윤가람 대리님이 책임지고 빚어주세요.”

“최선을 다해서 소담을 국내 최고의 증류식 소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포부가 마음에 드네요. 저도 최대한 많은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그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미 소담을 빚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연화 건설에 설계를 부탁해놨다.

현재 자리 잡고 있는 오저당과 숙성창고 옆에 가을이나 늦어도 내년 봄쯤에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서였다.

최소 200평에 3층 정도로 지어야지.

그 정도되는 넓이면 숙성용 옹기를 보관하든 소담을 빚을 대형 증류기를 들여놓든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소형 증류기로는 극소량 생산 밖에 불가능했다.

당연히 본격적인 소담의 생산은 그곳이 완공되어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쯤에서 직원들을 각자의 자리로 보내려고 했으나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에 브루클린 박람회 출장 다녀오실 때 아시죠? 빈손으로 오시면 안 돼요.”

“오저당의 전통은 지키셔야 해요.”

“저는 버번위스키보다 제대로 된 프리미엄 테킬라를 마셔보고 싶어요.”

다들 뭐 이렇게 바라는 게 많아?

심지어 성인이 된 이후에 조금씩 술맛을 알아가고 있는 쌍둥이와 여직원들조차 옆에서 한마디씩 거들고 있었다.

“언제부터 오저당의 전통이 술 심부름이 된 거야?”

나는 수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이 모든 상황은 녀석 때문에 생긴 일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이 녀석의 버릇을 잘못 들여놓은 것 같았다.

“셋이나 빠지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호세는 출장이 아니라 휴가잖아.”

“우리가 호세한테 바라는 거는 아니잖아. 쩨쩨하게 그러지 마십쇼. 사장님.”

“그런데 정말 셋이 동시에 빠져도 괜찮겠어?”

이번에 출장은 세 명이 간다.

라니와 나 외에도 호세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왕에 가는 길에 멕시코도 들렸다가 뉴욕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샌프란시스코도 찍고 올 거라 이번 여정은 꽤 복잡했다.

“차질이 없게 만들어야지. 호세가 3년 만에 집에 간다는데 말릴 수 있겠냐.”

“그래, 네가 고생 좀 해라.”

“그러니 잔말 말고 저번처럼 캐리어 가득 채워서 오는 거 잊지 마.”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가 사 오지 말라고 해도 내 개인적인 돈을 들여서라도 사 왔을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온갖 술이 모이는 주류 박람회에 가는 거라 아마도 폭풍 구매를 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수호한테 미안한 거는 덤이고.’

원래는 녀석도 데려가고 싶었지만,

호세도 없는데 수호까지 빠질 수 없었다.

벽향주는 공장장님이 계시니 걱정 없으나 우리 모두 빠지면 오풍주는 생산이 멈추게 된다.

미리 많이 만들어 놓고 잠시 생산을 멈춰도 되겠지만, 숙성 중인 술을 관리할 사람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짐 다 싸놨으면 태워다 줄 테니 슬슬 나가자. 공항버스 놓치지 않으려면 여유 있게 가야지.”

“나는 다 끝냈는데 라니가 아직이네.”

“그러고 보니 라니는 뭘 하고 있길래 아까부터 안 보이는 거야?”

뭐 하고 있을 지는 뻔했다.

라니는 완벽하게 현지화에 성공했다.

일할 때는 거의 거지꼴을 하고 있으나 어딘가 나갈 때는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엄청났다.

분명히 화장을 했다는데,

전혀 티가 나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한 것 같으면서도 하지 않은 듯한 한국식 화장을 한 라니를 보면 미국에서 보았던 강한 스타일의 라니는 엿보이지 않았다.

잠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리던 나는 결국 이장님 댁에 가서 라니를 끌어냈다.

그냥 놔뒀다가는 오늘 중에 공항에 가는 것은 불가능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늦지 않게 출발한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인천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와··· 벌써 피곤해.”

“실장님. 아직 출발도 안 했는데 기운 좀 내요.”

“그냥 집으로 다시 돌아갈까?”

“아침부터 들떠서 돌아다니더니 그럴 줄 알았다.”

모처럼 산골에서 나온 탓일까.

라니는 아침부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산골 생활이 매 순간 만족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정된 공간에서 매일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살아야 한다.

더구나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곳이다.

그나마 호세와 내가 있고 한국어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늘고 있어도 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허다하게 있었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네가 선택한 길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하지만 라니는 부활했다.

녀석은 면세점 코너를 보더니 이내 눈이 초롱초롱해지기 시작했다. 폭풍 쇼핑을 하려는 라니를 말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무사히 비행기에 탈 수 있었고 우리가 향한 곳은 호세의 고향이자 테킬라의 원산지인 할리스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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