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크모(VACMO!) (1) >
미국인은 테킬라를 사랑한다.
최근에는 테킬라의 생산지인 멕시코를 제치고 세계 최대 소비량을 찍을 정도다.
그 양이 무려 1억 3천만 리터에 달하는데 전체 생산량의 절반 가까이 미국에서 소비된다고 보면 된다.
거기에 할리우드 스타도 동참했다.
원래부터 그가 사업을 제대로 해보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친구들끼리 입맛에 맞는 테킬라를 만든 게 시작이었다.
술의 본질인 맛도 중요하지만,
스타 마케팅의 힘이 참 대단하긴 했다.
연간 12만 상자를 판매하는 데 성공한 그 브랜드는 결국 주류 시장의 포식자인 오션에게 10억 달러에 팔렸다.
무려 1조 4천억의 금액이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의미였다.
미국증류주협회(DSC)에 따르면 조만간 테킬라가 보드카의 1위 자리를 넘볼 수준이라니 오션의 투자 안목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9월의 평범한 어느 날.
테킬라 브랜드 하나가 브루클린에서 기지개를 켜며 세상에 명함을 내밀었다.
그것도 아시아에서 온 작은 양조장에서 내놓은 제품이라 사람들의 반응은 반신반의에 가까웠다.
아시아와 테킬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런 탓인지 대부분의 바이어들이 처음 보인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건 모처럼 박람회를 찾은 카를로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주류 판매점 체인 사업을 하는 그로서는 썩 달갑지 않았다.
히스패닉의 피가 흐르는 그는 누구보다 테킬라를 사랑하고 자부심이 강했다.
나름 제품 보는 눈도 좋았다.
소규모의 테킬라 브랜드를 키우는 데 성공한 덕분에 큰 이득을 보기도 했다.
그가 테킬라에 손을 댈 무렵에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으니 운도 제법 따랐다.
맨땅에서 시작해서 성공하는 일.
그것만큼 강한 자극을 주면서 성취감을 채워주는 일은 없었다. 한번 그 맛을 맛보면 카지노에 갈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런데 자꾸 중국 같은 곳에서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변수가 생겼다.
‘돈이 무슨 죄가 있겠어. 그걸 누가 어떻게 쓰냐가 문제지.’
최근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러시아와 중국이 테킬라를 마시기 시작한 후부터 시장이 많이 흔들렸다.
무엇보다 중국인이 문제였는데 그들이 한 모금씩만 마셔도 테킬라는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게 단순한 추측은 아니다.
과거에 위스키와 와인을 통해 시장이 얼마나 빠르게 망가지는지 경험해봤다.
이미 미국으로 들어오던 테킬라 중에 상당수가 중국으로 흘러가고 있다.
물론, 중국과 한국의 차이는 안다.
카를로스의 할아버지는 과거에 미군으로 복무하며 한국 전쟁에도 참전하셨다.
다행히 살아서 돌아오시기는 했으나 전쟁을 겪은 후에 남은 후유증이 상당히 컸다.
“한 잔 드릴까요?”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부스에서 일하는 여인이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테킬라가 담긴 작은 잔이 쥐어져 있었는데 자신을 향해 내밀었다.
거절하기도 전에 손에 쥐어진 터라 카를로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마신 뒤에 빈 컵은 저한테 주시면 돼요.”
“저는 시음하는 줄에 서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챙겨주시는군요.”
“아까부터 계속 지켜보고 계셨잖아요.”
“하하···.”
할 말이 없어진 카를로스는 그녀가 준 컵에 담긴 테킬라를 입에 털어 넣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레몬이나 라임이 없다는 것이나 어차피 그리 큰 기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테킬라를 머금은 순간.
그가 지금껏 가졌던 편견이 깨졌다.
다양한 테킬라를 마셔보았으나 오저당이 공개한 테킬라만큼 퀄리티 좋은 술은 정말 보기 드물기 때문이었다.
아가베 특유의 향.
강렬하게 느껴지는 풍미.
모든 것이 기준을 상회하고 있었다.
부스에서 150년의 역사를 운운하더니 그게 새빨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분명 좋은 테킬라였고 지금까지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도 꽤 좋았으나 카를로스는 크게 흥미가 생기진 않았다.
신뢰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미국에서 성과가 없는 곳이다.
종종 박람회에 실제 판매되는 술이 아닌 상위 등급의 술을 가지고 와서 장난을 치는 경우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일단 관심이라도 끌어보자는 의도였다.
그런 놈들과 계약을 맺어봤자 나중에 납품하는 술의 상태는 최악에 가까웠다.
거기까지 도달하면 지지부진한 소송이 시작되고 아까운 시간만 까먹게 된다.
하지만 무시하기도 애매했다.
그의 촉이 이건 성공할 거라고 계속 신호를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섯 번째 감각이 자신을 실망시킨 적은 없었다.
옆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가씨는 웃으며 빈 잔을 받아 갔다.
“생각보다 괜찮죠?”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습니다.”
“감사해요. 그런데 혹시 바이어신가요?”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요?”
“호호. 여기서 온종일 있다 보니 이제는 대충 감이 와서요. 마침 상담 자리가 비었는데 이야기를 나눠보실래요?”
그녀는 뒤에 있는 두 남자를 가리켰다.
상당히 젊은 동양인과 30대쯤으로 보이는 백인이 있었는데 누가 책임자인 건지 조금 헷갈렸다.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자 그녀는 동양인을 짚어줬다.
“술에 대한 것은 저 분한테 물어보세요.”
“이 테킬라를 저 사람이 빚은 건가요?”
“그건 아니고 오저당의 대표랍니다.”
“아직 학생처럼 보이는 데 놀랍네요.”
“페이스노트의 오너도 어린 나이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부자가 됐잖아요. 그러니 이상할 거는 없죠.”
카를로스는 웃으며 그 이야기에 동의했다. 성공하는데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도 잘 안다.
잠시 고민한 끝에 그는 동양인 남자 쪽을 향해 걸어갔다.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잠시 상담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이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청년이 권해준 간이 의자에 앉은 그는 테킬라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가볍게 정보만 얻고 연락처를 받아 일어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흥미가 생겼다.
일단 술에 대한 열정이 마음에 들었다.
한국의 술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술에 대한 관심도 많아 보였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대화 상대를 만난 탓인지 몰라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기 어려웠다.
그때 곳곳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박람회가 끝날 시간이 된 것 같았다.
행사를 진행하는 직원들은 손님들을 밖으로 안내하고 있었고 부스들은 모두 분주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쯤에서 일어나야 할 것 같았기에 카를로스는 그쯤에서 명함을 교환한 뒤에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오저당의 대표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저녁 약속이 없으시면 저희랑 같이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더 하시겠습니까?”
*
주류 박람회의 첫 일정을 마친 뒤.
나는 고생한 슈미트와 심양의 직원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기로 했다.
전쟁과 같았던 시간을 보낸 탓에 다들 피곤해했으나 그래도 전우애 비슷한 것이 생겼다.
하지만 한 무리의 사람들 사이에 이질감이 느껴지는 한 사람이 있었다.
상담을 받던 바이어인데 라니는 왜 그를 회식 자리에 데려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는지 내게 다가와서 슬쩍 물어봤다.
“저 사람은 왜 부른 거야?”
“슈미트가 계속 신호 줬던 거 못 봤어?”
“나는 밖에서 바빴잖아.”
“저 사람 꽤 거물이야. 오늘 슈미트가 받아 놓은 명함 전부를 합친 것보다 저 아저씨가 가진 영향력이 더 커.”
“사람 잘못 본 거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 같은데.”
나도 처음에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외모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지.
아까 검색해놨던 화면을 라니에게 보여주자 녀석은 꽤 놀란 얼굴이었다.
라니도 잘 아는 주류 판매 체인점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허얼! 저 아저씨가 바크모(VACMO!)의 오너였어?”
주류 전문 판매점 VACMO!
그곳은 보기 드문 희귀한 술부터 시작해서 칵테일 재료인 타바스코와 안주류까지 판매하는 주류 백화점이다.
뉴욕을 비롯한 미국 전역에서 무려 100개 이상의 체인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비상장기업의 주인이 카를로스였다.
하지만 라니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왜 직접 박람회까지 오는 거야? 다른 직원도 많을 거 아니야.”
“슈미트한테 듣기로는 새로운 브랜드를 발굴하는 게 취미인가 봐. 그래서인지 종종 박람회에 나타난다고 하더라.”
“취미가 참 고상하네.”
“성과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
카를로스는 바크모를 운영하는 경영자의 명성보다 주류계의 ‘Midas Touch’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한마디로 손을 대는 것마다 성공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테킬라 브랜드 순위에서 TOP 10안에 들어가 있는 카사 카트리나와 돈 리베라 등이 있었다.
“오! 나 그거 두 개 모두 마셔봤어.”
“미국 사람 중에서 안 마셔본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를걸.”
“하긴 술을 아예 입에도 안 대는 사람들 제외하고는 파티 같은 곳에서 접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그쯤 되자 라니도 왜 카를로스를 식사 자리까지 초대한 건지 이해했다.
나도 가능하면 이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필이면 박람회가 끝날 시간에 와서 중간에 이야기가 끊겼다.
지금 그를 놓치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나마 식사 자리에 심양 사람들만 있기에 다행이었는데 슈미트를 제외하면 나머지 두 직원은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혹시 분위기 묘해질지 모르니까 심양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마.”
“슈미트만 알고 있는 거 맞지?”
“응. 어차피 테이블을 따로 잡아서 슈미트랑 내가 카를로스를 맡을 테니 오늘은 심양 직원들이랑 식사해줘.”
“오케이, 그건 걱정하지 마.”
응. 걱정하지 않아.
이미 심양의 직원인 케이트와 지미.
두 사람과 거의 절친이 된 라니였다.
그렇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오저당의 술에 두 사람 모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주류 유통 회사가 아니랄까 봐.
직원들 모두 술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러고 보면 슈미트와도 흡사했는데 그런 사람들만 뽑아 놓은 건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박람회가 열리는 장소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예약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그곳에 들어선 나는 슈미트 함께 카를로스 옆에 앉았다.
“이거 직원분들끼리 하는 자리인데 불청객이 앉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술을 좋아하고 아끼는 분이라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일단 주문부터 할까요?”
메뉴판에 있는 다양한 음식을 시킨 후에 테킬라 두 병을 추가로 주문했다.
두 가지의 술 모두 카를로스가 발굴해서 키워낸 브랜드였다. 당연히 그는 내 선택에 대해서 상당히 흡족해했다.
“테킬라 취향이 남다르시군요.”
“그럼요. 미국에 있을 때부터 종종 마시던 술인걸요. 오저당에서 빚게 될 아이레스 보다는 조금 못 하지만요.”
“하하! 아이레스가 좋은 술인 거는 인정하지만, 이 술들과 비교하는 것은 조금 과한 자신감 아닙니까?”
당연히 카를로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이 왜 여기 있는 건지 모르겠다며 당장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소유한 테킬라에 대한 애정은 상당했다.
“오늘 맛보여드린 아이레스는 미완성된 술이니까요. 일종의 샘플 같은 거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괜히 자존심을 세우는 거는 아니다.
요정이 더 늘어나면 맛에 대한 개선이 분명히 이뤄질 것이다. 실제로 내가 머물 당시에 빚은 술부터 차이가 생겼다.
아마 향이가 그 자리에 함께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 여겨졌다.
얼마나 많은 술을 만들어야 가능할지 알 수 없으나 판초 요정도 성장할 거라 했다.
그때가 되면 테킬라 중에서 아이레스와 경쟁을 할 수 있는 게 과연 있기나 할까.
경쟁 제품이 위스키처럼 십여년 이상 숙성하는 술도 아니기에 비교가 어려울 것이다.
“샘플이라는 의미가 정확히 뭐죠?”
“테킬라 증류소를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개선 과정을 거친 진짜 제품은 내년쯤에 내놓을 예정입니다.”
“여기서 더 개선이 될까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니 인수를 했겠죠. 지금 수준으로는 오저당의 기준에는 못 미칩니다.”
당연히 카를로스는 동의하지 못했다.
나는 그쯤에서 슬며시 그에게 한 가지의 제안을 했다. 지금까지의 대화는 이것을 위한 일종의 밑밥이라고 봐도 되었다.
“못 믿으시겠으면 저랑 내기를 해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