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크모(VACMO!) (2) >
내기의 내용은 간단했다.
아이레스의 개선을 마친 뒤.
상품으로 출시될 때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차이가 있으면 내가 이기는 거였다.
원래는 다른 술과 견줘보는 것도 생각했으나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진다.
여기서 더 자존심을 긁어 놓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카를로스의 호의이지 경쟁심을 유발하는 게 아니다.
다행히 카를로스는 내기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재미있겠네요. 그런데 이걸 통해 제가 얻을 수 있는 게 뭐죠?”
“카를로스 씨의 카사 카트리나와 돈 리베라에 이어 새로운 테킬라를 바크모를 통해 가장 먼저 공개하는 영광이요.”
내가 두 가지의 술을 언급하자,
카를로스는 크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하하! 이제 보니 두 분은 제가 누군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 같군요.”
“슈미트 씨가 한눈에 알아보더군요.”
“눈썰미가 좋은 것도 재능이죠.”
“감사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슈미트는 고맙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아주 미세한 변화까지 찾아낼 정도로 제 혀의 감각이 민감하지는 않습니다.”
“체감되지 않을 정도의 차이라면 제가 내기에서 지는 거죠.”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원하는 게 바크모의 입점이라면 지금도 가능합니다.”
카를로스는 아이레스가 여기서 더 개량될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지금의 아이레스의 수준이라도 충분히 판매 가능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오저당의 기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기준을 너무 높게 잡은 거 아닙니까?”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는 게으른 바보에 불과하죠.”
“좋습니다. 그러면 내기에서 지면 오저당은 무엇을 내놓을 겁니까? 영광이란 말로만 때울 거는 아니죠?”
“물론이죠. 미국 내에서 아이레스 독점 판매 권한을 2년 동안 드리겠습니다.”
그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는지 슈미트는 꽤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만약에 내기에서 지면 그걸 가지고 어떤 일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카를로스는 다른 테킬라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
그가 작정하고 짬시키면 2년 동안 미국 내에서 아이레스 판매가 불가능해진다.
나도 그런 가능성은 잘 알고 있으나 카를로스가 그렇게까지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이미 한계치까지 성장한 브랜드보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이레스를 키워서 버는 돈이 훨씬 크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오히려 그 동안 최대한 뽑아 먹으려 하겠지. 그러니 내가 내기에서 지더라도 손해를 보는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만약에 슈미트가 우려하는 최악의 일이 생기더라도 생각보다 큰 타격은 없을 것이다.
OGD 멕시코의 유지비는 저렴하다.
한국에 있는 직원의 수만큼 고용해도 매달 천만 원 미만으로 끊을 수 있다.
그사이에 미리 빚어놔서 아예 1년 이상 숙성한 아네호(Anejo) 등급으로 노선을 바꾸면 된다.
“내가 일부러 차이가 없다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그 정도로 날 믿는 겁니까?”
“양심에 맡기는 수밖에 없죠. 그 대신에 제가 이기면 카를로스 씨의 노하우를 이용해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십쇼.”
“그런 조건이라면 저는 손해보는 게 전혀 없군요. 이번 내기를 거절할 이유가 없겠어요.”
카를로스는 결국 내기를 받아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보는 게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지금은 가벼운 유흥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언제쯤이면 이 내기가 끝날까요?”
“내년 봄이나 늦어도 여름쯤이면 새로운 아이레스를 들고 찾아뵐 수 있을 겁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십쇼.”
“저도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쯤 되자 나도 계획을 다시 세워야 했다.
호르헤에게 완전히 맡겨 놓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적어도 내가 한국과 멕시코를 오가며 살펴야 할 것 같았다.
오가는 데만 며칠씩 걸리고 오래 머물 수 없는 상황이나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수호를 보낼 수도 없잖아.’
오저당에서 이런 과정을 책임지고 맡아줄 사람은 녀석과 나밖에 없었다.
호세와 윤가람 대리도 어느 정도까지 수준이 올라왔으나 아직 경험이 없었다.
아이레스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한동안 다시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이 되자 슈미트가 대화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혹시 벽향주와 오풍주는 바크모에 입점 가능한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심양의 뉴욕 지사장으로서 슈미트는 테킬라보다 오저당의 술이 우선이었다.
아직 아이레스의 총판을 계약한 것도 아니었고 당장 매출을 올릴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이 순간을 노리고 참으며 기다렸던 것 같았다.
“아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인데 다른 이야기만 하고 있었군요.”
“입점이 가능한 겁니까?”
“물론이죠. 두 술 모두 관람객들의 반응이 상당하더군요. 아시안 마트에서만 팔고 있으니 희소성도 충분히 있고요.”
카를로스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구상에서 오풍주는 빠져 있었다. 바크모의 매장이 미국 전역에 퍼져 있어서 유통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서부만 따로 유통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바크모는 그렇게 일부 매장만 공급되는 술은 다루지 않는다고 했다. 배제되는 지점의 반발이 작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시군요.”
“혹시 벽향주가 입점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슈미트의 질문에 카를로스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자신의 의견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를 한 후에야 대답을 했다.
담당자의 의견은 다를 수 있다는 의미였는데 이 사람 생각보다 통이 컸다.
“이번이 첫 주문이니 벽향주는 가볍게 3만 병으로 시작해볼까요?”
그러면서 나를 바라봤다.
납품이 가능하겠냐는 의미였다.
그건 슈미트도 마찬가지였는데 나는 웃으며 충분히 가능하다고 대답해줬다.
현재 생산량이면 시간만 충분히 준다면 30만 병도 아예 불가능하진 않았다.
오히려 요즘은 생산량이 늘어난 만큼 누룩을 만드는 일이 더 오래 걸렸다.
그쯤에서 일 이야기는 그만뒀다.
이미 술이 조금 들어갔기에 나머지는 실무진이 맨정신에 나눌 이야기였다.
그래도 3만 병이란 숫자 때문인지 조금 홀가분해진 상태였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박람회를 마친 뒤에 맨손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상당히 허무했을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식사를 하며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카를로스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테킬라 이야기만 해도 밤을 새울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는데 그 덕분에 그쪽 바닥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멕시코에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사고들이었다.
“진짜 그 정도인가요?”
“상상했던 것 이상일 겁니다.”
“3만 달러를 받고 현직 시장을 살해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되네요.”
“그게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에요. 그러니 카르텔과 엮여서 좋을 게 없어요.”
“혹시 할리스코에도 카르텔이 있나요?”
내 질문에 카를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CJNG라고 불리는 곳인데 조직원 수가 6천 명에서 2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그 영향력이 미국과 남미까지 닿는다고 하니 작은 곳은 아니었다.
막연하게 예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한편으로는 카를로스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건지 알기에 고마웠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시행착오에 대해서 알려주며 진심으로 걱정해줬다.
“부디 아무런 사고도 안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
3일이라는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그 동안 우리는 수많은 관람객과 바이어를 상대로 오저당의 술을 알렸다.
성과도 나쁘지 않았는데 슈미트를 통해 상담받은 뒤에 긍정적인 사인을 준 곳만 십여 곳에 달했다.
그리고 실제로 주문도 들어왔다.
가장 먼저 벽향주를 주문한 곳은 예상했던 대로 카를로스의 바크모였다.
그들은 3만 병의 벽향주를 주문했다.
기존에 KR 마트에서 주문한 것보다 2배나 많은 물량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자잘한 곳까지 합치면 모두 4만 병을 계약했다. 40만 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성사시킨 것이다.
라니는 물론이고 슈미트와 심양의 직원들도 크게 기뻐했는데 그건 한국에 있는 수호도 마찬가지였다.
[와··· 설마 했는데 정말 계약에 성공했구나. 그것도 4만 병이라니 내 예상보다 훨씬 많아.]
“뫼리스가 주문한 양도 적지 않은데 수량은 맞출 수 있겠지?”
[너 나가 있는 사이에 다 실어서 보냈어. 납품 기한까지 시간이 있으니 그 사이에 만들어서 보내면 충분해.]
“벌써 끌루소가 2차 물량까지 받아 갔어?”
아무리 계산해봐도 이상했다.
평소 생산량이 어느 정도인지 뻔했다.
하지만 곧 어떻게 된 건지 알아챘다.
“너희 설마 야근이랑 특근까지 했니?”
[사장님이 나가서 고생하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참고로 내가 하자고 한 거는 절대 아니다. 직원들이 먼저 제안한 거야.]
“주말은 그냥 쉬게 하라니까. 안 그래도 호세랑 나까지 빠져서 다들 힘들 텐데.”
[그래서 이번 주는 쉬려고. 아! 그리고 심양 본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오풍주가 거의 다 팔렸다고 곧 정산될 거래.]
오풍주를 처음 가져갈 때.
마해진 팀장에게 오풍주를 유통 기한 내에 팔지 못하면 돈을 받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다.
지금 상황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그게 끝이야? 추가 주문은 없었어?”
[당연히 주문도 들어왔지. 다음 달에 오풍주랑 벽향주 만 병씩 보내달래.]
“오케이. 그건 내가 들어가서 처리할게.”
[여긴 걱정 말고 남은 며칠은 푹 쉬다가 와.]
그래봐야 3일밖에 안 남았다.
그중에서 하루는 이동하는 데 다 쓸 것 같았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것도 다른 나라로 가는 수준이었다.
대신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내는 이틀은 집에서 쉬기만 할 생각이었다.
통화를 끊자 곧장 라니에게 전화가 왔다.
왜 안 나오냐는 독촉이었는데 호텔 객실을 나서니 로비에서 평소와 달리 격식 있는 옷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라니는 박람회 내내 뉴욕에서 보내는 하루 동안 뭘 할지 고심했는데 결국 나온 결론은 브로드웨이 공연 관람이었다.
나도 그곳은 가본 적이 없었기에 흔쾌히 동행하기로 했다.
“어서 가자. KR 마트 들렀다가 공연장까지 가려면 시간이 빠듯해.”
우리의 첫 행선지는 KR 마트였다.
원래는 샌프란시스코의 매장을 가려고 했지만, 그곳은 오풍주가 다 떨어졌다고 들었다. 그래서 뉴욕에 있는 매장을 가는 것으로 일정을 바꿔야만 했다.
우버를 타고 KR 마트 앞에서 내린 우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다른 물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곧장 주류 제품이 진열된 곳으로 향하자 오저당의 벽향주와 오풍주가 진열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하아··· 이게 꿈이냐 생시냐.”
“그러게 말이다. 우리 술을 미국에서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서 사진부터 찍자.”
라니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진열된 술을 배경으로 셀카까지 찍기 시작했는데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쌍둥이 형제가 SNS에 올릴 용도로 꼭 찍어오라고 시켰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핑계였다.
나 역시 흥분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에도 카를로스와 3만 병의 수출 계약을 했지만, 직접 이렇게 진열된 것을 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가 그렇게 유난을 떠는 동안에도 오풍주와 벽향주는 꾸준하게 팔렸다.
그중에는 아시아인이 아닌 이들도 제법 많이 있었다. 온라인을 통해 조금씩 오풍주 소식이 알려진 덕분이었다.
“이게 그 오풍주인가 봐.”
“몇 병 안 남은 것 같은데 어서 담아가자.”
“LA에서는 벌써 품절이라고 하던데 운이 좋았네.”
옆에서 그런 모습들을 보는 것이 왜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 시간만 충분했다면 계속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라니는 조금 불만이 있어 보였다.
“조금 더 좋은 자리에 넣어주지. 지금 자리는 너무 아래쪽이라 잘 안 보여.”
“아직 시작에 불과하잖아. 매출이 어느 정도 나오면 자리도 바뀔 거야.”
“우리가 슬쩍 옮겨 놓을까?”
“그러는 거 아니야.”
그쯤에서 우리는 마트를 나왔다.
저녁에 먹을 거를 사고 싶었으나 공연을 보러 가는 길이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더구나 며칠 후면 한국에 들어가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시 우버에 탄 우리는 타임즈 스퀘어 거리 쪽을 통해 브로드 웨이로 향했다.
하지만 차가 많기로 악명 높은 뉴욕의 거리는 상당히 막혔기에 갇히고 말았다.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라니는 반짝이는 광고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큰 화면에 우리 오저당 광고가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못할 것도 없지.”
“저기 광고하는 거 비싸지 않아?”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닌데 하루 광고하는 데 5천 달러에서 5만 달러 정도 들어간다고 했던 것 같아.”
5만 달러라고 해도 한국 돈으로 6천만 원인데 그 정도의 광고비는 가능했다.
하지만 진짜 할 생각은 없었다.
고작 하루 광고한다고 달라질 거라 생각하는 것부터 이상한 일이다.
지금은 가성비가 좋은 쪽을 택해야지.
그 비용으로 가능하면 오래 지속되는 광고 쪽이 더 효과가 좋을 것 같았다.
‘이제 우리도 슬슬 광고를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