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42화 (142/254)

돈 레오넬(Don Leonel) (4)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슬쩍 향이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번 일이 누구 때문에 생긴 건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증류소를 찾아온 밤손님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이유는 향이의 작품 때문이었다.

그런 내 시선을 느낀 걸까.

향이와 판초는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기는 했다.

요정들이 증류소를 지키기 시작한 후에도 여러 차례 도둑질을 시도한 이들이 있었으나 성공한 이는 없었다.

오히려 도망치기 바빴다.

처음에 도둑을 잡겠다고 했을 때.

그다지 큰 기대를 하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향이가 가진 열정은 대단했다. 녀석은 온갖 공포 영화를 섭렵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시각과 음향 그리고 연출까지.

꼼꼼하게 살핀 끝에 증류소에 작은 규모의 유령의 집을 오픈할 수 있었다.

당연히 내 도움도 상당히 많이 들어갔다.

갓난아이인 호세의 사촌 조카 울음소리를 녹음한 테이프와 카세트도 구해주고 여러 가지 장치도 직원들 몰래 설치해줬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은 나도 체험해 봤는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진짜로 그게 통할 거라 생각지는 못했다.

내 눈에는 향이가 판초가 보인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공포심이 생길 리가 없었다.

더구나 이번 일은 향이 혼자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판초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녀석도 물리적인 힘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었다. 향이도 성장하기 전부터 그랬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권총도 장식은 아니었는지 그걸 쏘면 선인장 가시가 콕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몇 번 정도 반복되자 이제 밤에 증류소를 찾아오는 이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영향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증류소의 직원들이 겁먹고 도망가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호세, 네 생각은 어때?”

“지금 그만두겠다고 말한 직원들만큼 숙련도가 높은 이들을 구하는 거는 어려우니 가능하면 잡아야 해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호세의 의견에 나도 동의했다.

일반 잡부는 금방 구할 수 있지만,

테킬라를 만드는 피냐를 커팅하는 준비 작업을 하는 것은 숙련도가 필요했다.

“더구나 마을에 그런 소문이 났으면 앞으로 사람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을 거예요.”

호세는 은근히 미신을 많이 믿는 멕시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해줬다.

하지만 그리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악마보다 더 무서운 게 가난이다.

“여기 책임자는 내가 아니라 호르헤니까 돌아오면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해 보자.”

하지만 생각보다 여파가 컸다.

직원들은 겨우 잡을 수 있었지만,

테킬라에 사는 호세의 친척과 이웃들은 증류소에 악마가 나오지 않냐며 오히려 우리를 걱정 해주고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 때문에 불청객이 많아졌다.

도둑질을 하러 오는 이들은 줄었으나 악마를 직접 보겠다며 몰래 들어가려다 잡히는 철없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럴 때마다 향이가 쫓아냈는데 하필 그중에 관종에 가까운 너튜버도 있었다.

그가 찍은 영상은 대박이 터졌다.

공개된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무려 120만 회나 되는 조회수가 나올 정도였다.

이제는 도둑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경비를 세웠다.

지역 방송국에서 리포터가 취재를 나올 정도였는데 한국에서도 해본 적이 없는 뉴스 인터뷰까지 해야 했다. 그 덕분에 얻게 된 증류소의 명성(?)은 상당했다.

아이레스는 테킬라 주변 도시에서나 알아줬지 전국구 브랜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은근히 우리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있었고 새로운 별명도 얻었다.

[악마가 빚는 테킬라]

‘이쯤 되면 증류소를 접고 유령의 집을 오픈해야 하는 건가?’

그게 더 돈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이게 다 스토리텔링 재료기 때문이다.

칠레를 대표하는 와이너리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악마의 와인 저장고]

그 와인은 세계적인 브랜드인데 그곳도 예전과 우리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일꾼들이 술을 훔쳐 가자 저장고에 악마가 있다는 소문을 내고 직접 악마 흉내까지 내서 쫓아냈던 걸로 유명했다.

심지어 그걸 마케팅으로 활용했다.

술 이름에 악마를 의미하는 디아블로를 썼고 로고도 그와 어울리게 디자인했다.

하지만 우리도 그와 같은 마케팅을 할 생각은 없었다.

와인과 테킬라라는 차이가 있지만,

같은 스토리를 내세워봤자 다른 사람들 눈에는 따라 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

더구나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와이너리와 비교당하는 거는 사절이다.

황동선 이사의 생각도 나와 같았다.

[워낙 독보적인 브랜드라 그들과 비슷한 스토리를 쓰면 우리만 손해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브랜드 작업은 조금 더 고민해보죠. 아! 테킬라 이름을 바꾸는 거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출국하기 전에 정했던 이름을 쓸 생각인데 아직 말씀드리지는 못했어요.”

아이레스라는 이름.

그리 좋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테킬라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리뉴얼과 함께 이름도 바꿀 생각인데 그러려면 레오넬의 허가부터 받아야 했다.

[아직 귀국 일정은 안 나오신 거죠?]

“아무래도 조금 더 걸릴 것 같아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전혀요. 유수호 실장이 생산 라인을 열심히 돌리고 있어서 주문량은 어찌어찌 맞추고 있는 중입니다.]

“다행이네요.”

만찬주로 선정된 이후부터.

오저당의 매출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자리를 비운 탓에 신경이 많이 쓰였는데 수호가 직원들과 함께 고생하고 있는 게 선하게 보였다.

“저 없어도 잘 돌아가는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유 실장하고 이사님께 오저당을 맡기고 조금 널널하게 지낼 걸 그랬어요.”

[하하! 사장님 없으면 여기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마시죠.]

“그리고 이번에 들어갈 때 성과금 두둑하게 챙겨서 갈 테니 이번에는 술 같은 거는 기대하지 말라고 해주세요.”

[직원들이 좋아하겠네요.]

다들 술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보다 현금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다.

한동안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중에 나는 문득 보육원이 떠올랐다.

“올해 보육원에서 성인이 되어 퇴소하는 아이들 오저당에 몇 명이나 오나요?”

[네 명 입사하기로 했습니다.]

“연말에 그쪽 아이들한테 선물 기부하는 것도 잘 처리되고 있는 거 맞죠?”

[물론이죠. 시청 복지 정책과의 이화선 주무관님과 상의해서 준비 끝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많은 보육원이라 크리스마스 정도는 챙겨줄 생각이었다.

쌍둥이 형제와 여직원들이 거기 출신인 탓에 조금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한동안 황동선 이사와 최근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그쪽 시간이 밤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끊었다.

인터넷이 있기에 멕시코에서 보고를 받고 결재를 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매번 시차가 걸렸다.

제법 길었던 통화를 끝낸 뒤.

증류소의 사무실에서 나오자,

호르헤가 몇 개의 술병을 가져왔다.

그중의 절반은 2개월쯤 숙성한 기존 방식의 테킬라였고 나머지 절반은 내가 여기에 온 이후에 빚은 테킬라였다.

“호세랑 레오넬은 어디 있나요?”

“지금 모시러 갔으니 곧 오실 겁니다.”

“부디 오늘은 이 중에서 제 기준을 통과하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호르헤는 상당히 간절해 보였다.

지금까지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가장 고생했던 것이 바로 그였기에 어느 정도 호르헤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자 레오넬을 모시고 호세가 들어왔다.

그때부터 시음이 시작되었다.

빚는 방식과 토스팅의 차이 때문인지.

저마다 지닌 맛의 차이는 상당했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기도 요정의 효과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저당에서 빚는 술처럼,

테킬라도 숙성이 빨라지고 있었다.

겨우 3주 동안 숙성한 술인데 반년쯤 숙성해서 파는 레포사도 등급의 테킬라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면 이 중에서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술을 적어서 내주세요.”

시음의 진행은 호세가 맡았다.

녀석이 종이를 주자 우리는 알파벳 A부터 F까지를 적어서 다시 되돌려주었다.

모두 네 명이니 적어도 세 명 이상이 같은 술을 적으면 그걸 선택하기로 했다.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결과도 B로 표기된 테킬라와 D로 표기된 테킬라에 2표씩 나왔다.

두 종류의 테킬라가 가진 장단점은 확실한 편이었다.

테킬라 B는 테킬라 특유의 맵싸하게 후려치는 첫 풍미가 강했고, 테킬라 D는 입안에 오래 머무는 깊은 단맛이 있었다.

어떤 게 더 좋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두 가지를 섞어 보는 거는 어떨까요?”

싱글 몰트 위스키도 매력 있지만,

블렌딩이 주는 장점도 분명히 있다.

테킬라라고 섞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업계 1위인 테킬라 업체도 최상급 테킬라를 만들기 위해 블렌딩을 한다.

하지만 막 섞을 수는 없다.

당연히 테킬라도 규제가 있다.

CRT라는 테킬라 규제 위원회에서 정한 규칙대로 최소 51% 이상의 아가베 함량을 지켜야 했는데 그건 문제없었다.

지금 우리가 마시는 것들은 최소 60% 이상의 함량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도 방법이네. 한 번 해보지.”

레오넬도 나의 의견에 동의해줬다.

그때부터는 두 가지의 술을 놓고 다양한 비율로 섞어서 시음하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우리는 황금 비율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캬아아! 이거 좋네.”

“4:6 비율이 가장 깔끔한 것 같습니다.”

“저도 호르헤의 말에 동의해요. 하지만 B의 경우에는 아직 3주밖에 숙성하지 않은 거라 레포사도 등급이 될 수 없어요.”

호세의 지적은 타당했다.

서로 다른 숙성 기간을 가진 원액으로 블렌딩을 하는 경우에 가장 낮은 숙성 기간을 표기하는 것은 세계적인 룰이다.

테킬라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요정 덕분에 숙성이 빨라졌어도 규정은 지켜야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B는 5주 추가 숙성을 하고 나중에 D와 동일한 비율로 블렌딩해보는 걸로 하죠.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며칠 후면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전에 설비 주문하죠.”

그 이야기를 들은 호르헤는 주먹을 불끈 쥐며 억지로 환호를 참고 있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란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들여와야 하는 설비는 다 체킹된 상태라 주문만 넣으면 되었다.

“그리고 직원도 더 뽑으세요.”

“월간 생산량을 어느 정도까지 맞추면 되는 건가요?”

“최소 10만 병 단위로 설비를 들여놓고 첫 달은 2만 병 정도로 시작하죠.”

2만 병이면 800 박스다.

그 정도는 어떻게든 소화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절반쯤만 쳐내도 멕시코 내수 시장과 한국에 가져가서 팔면 된다.

너무 쉽게 생각한다고 여길 수도 있으나 박람회 당시에 카를로스와 했던 내기는 내가 분명히 이길 것이다. 기존에 빚었던 아이레스는 지금의 것과 비교가 어렵다.

완전히 다른 술로 재탄생한 것이다.

“인제 그만 드시죠.”

잠시 틈을 보이는 사이.

레오넬은 다시 테킬라 잔을 들었다.

그걸 본 호세는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잔을 낚아챘다. 가볍게 시음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많이 마셔서 좋을 게 없었다.

내가 여기 머무는 사이에 건강을 많이 되찾으셨으나 과도한 음주까지 허용될 정도는 아니었다. 술잔을 빼앗긴 레오넬은 서럽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호세는 꿈쩍도 안 했다.

오히려 건강해지셔야 더 오래 술을 즐길 수 있지 않냐며 레오넬을 다독였다.

나는 그쯤에서 지금껏 미뤄왔던 제안을 했다.

“세뇨르. 이번에 개량한 테킬라를 출시할 때 아이레스가 아닌 다른 상품명을 사용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이제 너희들 마음이지. 지금처럼만 제대로 된 테킬라를 만들면 어떻게 바꾸든 상관없어.”

레오넬은 기존에 쓰던 아이레스라는 이름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원래 그 이름 자체가 동네 사람들 사이의 애칭 같은 거라고 했다. 나는 그쯤에서 한국에서 논의 끝에 정한 이름을 꺼냈다.

“그럼, 세뇨르의 가문 이름을 따서 돈 레오넬로 바꾸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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