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44화 (144/254)

스프라이트 컬렉션 (sprite collection) (2)

크리스마스 당일.

오풍리에 눈이 내렸다.

처음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며 다들 즐거워 했으나 내리는 양이 심상치 않았다.

오전부터 쏟아진 눈은 오후가 되자 폭설이 되었고 당연히 오저당에 비상이 걸렸다.

“이 정도면 내일 직원들 출근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수호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봤다. 사무실 앞이라도 치워보려고 했는데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눈을 치워도 쌓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나는 그쯤에서 포기를 택했다.

이건 사람 힘으로 안 되는 일이었다.

군대 시절에 겪은 바가 있기에 이쯤에서 포기하기로 했다. 괜히 미련을 가져봤자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고단해진다.

“눈 내린 상태로 얼어버리면 어쩌려고?”

“여기서부터 마을까지 이어지는 길을 모두 다 치울 수도 없잖아. 이 정도면 오풍리까지 오늘 길도 대부분 막혔을 거야.”

“결국에는 고립되는 건가.”

“먹거리는 많이 준비해놨지?”

혹시 몰라서 물어보자,

수호는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아껴서 먹으면 최소 한 달 가까이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마련해놨다고 했다.

하긴 우리가 머무는 한옥만 하더라도 겨울이 될 무렵이 되면 라면과 햇반을 박스 단위로 쌓아놓았다. 거기에 자체적으로 식사를 해결하기에 사놓은 식자재도 많았다.

“태백이랑 속초에서 출근하는 직원들은 무리해서 출근하지 말라고 전달해줘.”

대부분 오풍리나 오저당 근처에 집을 구해서 머물고 있었으나 가정이 있는 직원들은 도시에서 출퇴근하고 있다.

아이들 학교 문제도 있었고 오풍리에 빈집이 있어도 대부분 폐가 수준이었다.

들어오고 싶어도 그럴 만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는 집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나머지 직원들은 그럼 어떻게 해?”

“공장장님이랑 정영재 대리도 없는데 우리끼리 설비 돌리는 거는 무리니까 다들 모여서 누룩이나 미리 만들어 놓자.”

“그게 좋겠네. 안 그래도 부족해서 언제 하루 날 잡아서 왕창 빚으려고 했어.”

누룩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생산량이 늘어난 만큼 누룩이 들어가는 양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초창기에 비해 능숙해져서 다행이다. 그때는 누룩을 잘못 띄워서 버리는 양도 적지 않았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조금 출출하지 않냐?”

한 시간 이상 눈을 치워서일까.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건 수호도 마찬가지였는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잠시 뭘 먹을까 고민하고 있자 수호는 창고에서 고구마를 꺼내왔다.

“겨울인데 군고구마는 먹어줘야지.”

나는 그게 좋겠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줬다. 오저당에는 바비큐 그릴이 두 개나 있는데 요긴하게 꽤 잘 쓰고 있었다.

날씨 좋은 날에는 바비큐를 했고 겨울에는 군고구마를 구웠는데 호호 불어가며 먹는 맛은 기대 이상으로 꿀맛이었다.

수호의 뒤를 따라 나가려고 하자,

녀석은 그냥 쉬고 있으라며 만류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라 왜 그러냐고 묻자 녀석은 머리를 긁적였다.

“고마워서 그런다.”

“내가 뭘 했길래 고마워?”

“너 따라서 여기 온 지 20개월쯤 됐잖아. 제대하는 날에 나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 내가 중소 기업 규모 되는 회사에서 이 나이에 이사 자리까지 올라갈 줄은 몰랐어.”

“언제는 납치당했다며 난리 치더니.”

“오저당이 이 정도로 클 줄도 상상도 못 했던 그때의 우매한 나를 욕해.”

이런 반응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이번에 이사 자리에 올라서며 연봉도 그만큼 대폭 인상됐기 때문이었다.

지금 받는 연봉이면 어디 가서 꿀릴 일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이사가 된 탓에 다른 직원들이 받았던 성과급만큼은 못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나와 황 이사도 마찬가지였다.

임원진의 연봉을 올린 지 얼마 안 되었기에 그 정도는 양보해야 했다.

참고로 내 연봉은 아직 1억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오저당의 올해 매출이 250억이니 많다고 할 수는 없다.

매출 100억이 넘는 회사들의 CEO 평균 연봉이 2억 이상인 걸로 들었다.

하지만 크게 욕심이 나지는 않았다.

오저당은 100% 나의 소유라 얼마를 받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회사가 크면 곧 내 자산도 늘어난다.

당연히 곧 밝아올 새해에도 올해 이상의 성과를 내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수호가 고구마를 구우러 나간 사이에 창밖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누군가 눈보라를 헤치며 걸어왔다.

멀리서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두꺼운 점퍼를 입고 모자를 눌러썼으나 걸음걸이만 봐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잠시 후에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라니는 작은 눈사람처럼 보였다.

“눈 정말 징하게 온다. 원래 한국의 겨울은 이런 거야?”

“너 첫눈이 왔을 때는 엄청 좋아했다고 이모한테 들었는데 벌써 질린 거야?”

“이 정도 많이 올 줄은 몰랐지. 너무 과한 거는 뭐든 좋지 않아.”

하긴 이 녀석 캘리포니아 출신이다.

날씨 좋은 그 동네에서 이런 눈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곳에서는 170년 동안 눈이 쌓인 일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반대로 내가 미국에 살 때는 눈이 전혀 오지 않은 것이 꽤 신기했었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그게 승자야.”

“그런 의미에서 직원들이랑 다 같이 스키장이나 갈까? 내 버킷리스트에 스키를 타보는 것도 들어있거든.”

“지금?”

“아니, 그 전에 끝내야 할 일이 있어서 지금은 안 되지. 일단 이것부터 받아.”

라니는 점퍼에서 액자를 꺼냈다.

낯이 많이 익어서 고개를 돌려보자 책상 위에 있어야 할 액자가 안 보였다.

액자 속의 그림은 향이가 부탁해서 내가 직접 그려준 것이다.

멕시코에서 판초와 함께 보낸 시간을 기념하고 싶어 했으나 사진으로 요정을 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에는 유일하게 두 요정을 볼 수 있는 내가 그려줘야 했다.

“이걸 왜 가져갔던 거야?”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이걸 보니 갑자기 떠오른 게 있어서.”

잠시 가져갔던 거는 중요하지 않다.

내 물건이 잠시 자리를 이탈했다고 마음 상할 정도로 속이 좁지는 않았다.

그보다 나의 관심은 라니가 이걸 가지고 뭘 했냐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라니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두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고 피부도 푸석푸석한 느낌이었는데 그게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또 밤새워서 작업한 거야?”

“네가 사무실에서 밤새우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서 집에서 이 두 손으로 직접 그렸지.”

“크리스마스이브인데 그러고 싶냐?”

“이게 딱 떠올랐을 때 마무리해야지 안 그러면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르잖아. 일단은 이것부터 봐봐.”

라니는 USB를 꺼내 녀석의 자리에 놓인 컴퓨터에 꽂았다. 거기서 파일 몇 개를 카피하며 라니는 미리 밑밥을 깔았다.

“제대로 그릴 시간 여유가 없어서 아직 완성은 아니고 러프하게 스케치한 거 사진으로 찍어 온 거니 감안해서 봐야 해.”

잠시 후에 화면에 띄워진 이미지는 곤룡포를 입은 요정이 작은 담벼락에 기대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 요정의 외모는 향이와 닮아 있었다.

[우와! 역시 전문가의 솜씨는 뭔가 다르네요.]

향이의 반응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심지어 화면에 찰싹 달라붙어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확실히 내가 그린 것과는 퀄리티가 달랐는데 그걸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라니가 화면을 넘기자 선인장 옆에 폼을 잡으며 서 있는 판초의 모습도 보였다.

복장은 내가 스케치한 것을 그대로 적용한 탓에 실제 모습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오히려 내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시니컬함을 맛깔나게 잘 살려냈다.

꽤 흥미로운 디자인이라 잠시 아무런 말 없이 화면을 보고 있자 라니는 초조한 표정으로 내 의견을 물었다.

“소주와 테킬라 모두 각국의 복장을 한 요정을 그려 넣어볼 생각인데 이상해?”

“아니, 나는 기존에 네가 작업하던 것보다 이게 더 좋은 것 같아.”

“휴우··· 다행이다.”

라니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녀석이 만들어온 이미지가 좋은 것도 있으나 향이의 반응 때문이라도 이걸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저는 무조건 이거에 한 표입니다. 아마 다른 요정들도 보면 무척 기뻐할 거예요.]

라니와 잠시 이야기 나누는 사이에 향이는 오저당에 있던 요정들을 불러와서 라니가 그린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사회생활 만렙을 찍은 건지 요정들이 향이에게 아부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이 이미지는 너무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라 술병에 들어가는 라벨에 그대로 사용하는 거는 어렵지 않을까?”

“나도 그게 조금 고민이었어.”

“3등신 말고 5등신 정도로 키워서 작업을 해보는 거는 어때?”

3등신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향이는 고개 돌려서 째려보았지만,

그런다고 그 몸매가 바뀌는 건 아니잖아.

하지만 라니는 내 의견에 반대했다.

“사람 등 뒤에 날개를 그린다고 요정처럼 보일 거라 생각되진 않아.”

“요정을 직접 본 적도 없으면서.”

“사회적인 통념이란 게 있잖아. 그리고 여기 큐피드를 그려 넣으면 영유아 학대라고 말하는 거랑 뭐가 달라?”

이 자식··· 꽤 설득력이 있잖아.

심지어 향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라니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둘이 편을 먹고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바꾸면 되겠지.

“일단은 알겠어. 하지만 우리 둘이서 이걸 정할 수 없어. 두 개의 상품을 하나로 엮는 거는 황 이사님의 의견도 필요해.”

*

그로부터 이틀 후.

오저당은 고립에서 간신히 풀렸다.

시청에서 오풍리로 제설차를 보내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나날이 급성장하는 우리 같은 회사가 삼척에 많지 않다는 점도 한몫 했다.

그 사이 라니는 꽤 바빴다.

디자인의 완성도는 이틀 사이에 많이 진척되었고 향이의 끈질긴 요청 때문에 디자인 일부를 수정하는 과정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출근하는 데 성공한 황동선 이사와 함께 임원 회의가 열렸다.

“소담과 돈 레오넬을 같은 컬렉션으로 묶는 게 어떠냐는 말씀이시죠?”

황동선 이사의 질문에 나와 라니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오저당의 모든 술을 같은 컨셉으로 바꿀 생각은 없었다.

기존의 벽향주와 오풍주는 그대로 가고 신규 런칭 제품만 적용할 생각이었다.

한동안 듣고만 있던 황동선은 대답을 하기 전에 질문을 먼저 했다.

“혹시 돈 레오넬 같은 케이스가 추가로 생길 가능성이 어느 정도나 될까요?”

“아예 없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요정과 연관된 일이 언제 또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요정이 위험하거나 좋은 매물이 있다면 인수해야 할 수 있다.

그게 우리나라의 양조장일지 아니면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와이너리나 독일의 브루어리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럼, 라니 실장이 제안한 스프라이트 컬렉션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었다.

나라별로 하나씩만 하자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 나라를 대표하는 술이어야 의미가 있을 거란 말에 나도 동의했다.

“저는 해외에 나가면 그 나라만의 디자인이 담긴 머그잔을 기념으로 사 오는데 면세점 같은 곳에 넣으면 어떨지 궁금하네요.”

황동선 이사는 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면세점은 아직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꽤 관심이 생겼다.

하지만 당장 진행 가능한 일은 아니다.

수수료는 높은 데 비해 판매량이 생각보다 그리 많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오저당이 더는 성장하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혔을 때 고려해봐도 늦지 않았다.

황 이사는 한 가지의 제안을 덧붙였다.

캐릭터는 지금 그대로 가되 매년 라벨에 들어가는 배경과 자세 같은 디자인을 조금씩 바꾸는 게 어떠냐고 내게 물었다.

은근히 이런 것들을 수집하는 이들의 숫자가 많이 있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라벨도 마케팅 요소 중의 하나다.

음료 회사들의 경우에는 아이돌의 사진을 넣어서 판매를 하기도 하고 이모지나 인사말을 넣는 방법도 사용한다.

주류 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청난 성공을 거둔 미드와 위스키 회사가 콜라보해서 만든 7 왕국 컬렉션의 경우에는 한정판이라 수집욕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정할 일은 아니었다.

실무를 담당하는 라니의 의견이 중요했다.

매년 한 번씩 라벨 디자인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일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걸 알기에 시선이 라니쪽으로 단숨에 쏠렸다.

가능하겠냐는 질문이 담긴 시선을 받은 라니는 간단명료하게 답을 해줬다.

“재미있겠네요. 한번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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