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57화 (157/254)

직영 주점 (3)

단호하게 거절하는 향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향이.

술병을 들고 고주망태가 된 향이까지.

화면 속의 이모티콘에는 무려 열여덟 명이나 되는 향이가 각각의 상황에 맞는 표정과 몸짓을 하고 있었다.

분명 향이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나조차도 처음 보는 모습이 꽤 많았다.

예를 들면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 숙여서 사과하는 모습은 지금껏 보지 못했다.

향이가 그렇게 사과할 정도의 잘못을 한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히히힛! 이거 재미있네요.]

향이는 상당히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라벨 때처럼 디테일한 수정 요청 사항이 제법 많이 있었다. 대부분 어색해 보이는 부분에 대한 지적이었다.

내가 봐도 어느 정도 공감되었기에 그때부터 폭풍 수정이 이뤄졌다.

직접 그림을 고치는 것은 아니고 향이가 말하는 것을 태블릿에 메모를 해놓고 라니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태블릿을 붙잡고 황 이사와 이런저런 업무에 관련된 논의를 하자 생각보다 빨리 오저당에 도착했다.

허머를 주차하자 수호와 라니를 비롯한 일부 직원들이 나와서 반겨줬다.

집이 멀리 있는 이들은 이미 퇴근한 터라 그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왈왈!

사람만 반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겨울 사이에 어느덧 다 자라 성견 티가 나는 솜털이도 있었다.

그래봤자 소형견에서 벗어나진 않았다.

그리고 이 녀석은 내가 아닌 황 이사를 격하게 반기고 있는 중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녁 식사 아직이시죠? 준비해놨으니 들어가셔서 식사하세요.”

“돈 레오넬의 성공적인 런칭 축하드려요.”

내가 도착하면 할리우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많은 질문을 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다들 차분했다.

아마 수호 녀석 때문이겠지.

수호는 나보다 열흘 먼저 들어왔다.

당연히 직원들의 궁금증은 녀석을 통해서 이미 거의 다 해소된 것 같았다.

아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피곤한 일을 피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잠시 직원들을 뒤로하고 나는 차 문을 여는 황 이사를 잡았다.

삼척에 있는 집으로 퇴근하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황 이사님. 이미 해도 졌는데 오늘은 사무실 2층의 숙직실에서 주무시죠.”

“안 그래도 그러려고 짐을 꺼내는 중이에요. 다시 삼척까지 나갈 생각을 하니 피곤하네요.”

“잘 생각하셨어요. 그리고 저녁 식사같이 하면서 제가 가지고 온 돈 레오넬도 맛보시죠.”

아직 오저당 식구들은 완성된 돈 레오넬의 맛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가능하면 다 같이 모여서 테이스팅하고 싶었으나 내가 가지고 온 것은 이제 겨우 세 병만 남아 있었다.

“캐리어가 작으시던데 술이 들어갈 자리가 있으셨나요?”

“저 안에 술 밖에 안 들어 있어요.”

“나머지 짐은 어떻게 하시고요?”

“자주 미국에 갈 것 같아서 옷 같은 것은 이번에 오저당 USA에서 고용한 직원에게 아예 맡기고 왔어요.”

페레즈에게 맡긴 짐은 유나 누나가 LA에 자리 잡으면 거기로 옮길 생각이었다.

어차피 옷은 새로 사면 되고 턱시도를 한국까지 가져올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앞으로 미국과 한국 그리고 멕시코까지 자주 들락거릴 것 같았다.

가능하면 두 손 가볍게 기내용 캐리어 정도만 들고 다니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이번에 한 번 해보니 괜찮았다.

따로 짐을 찾을 필요가 없으니 공항을 빠져나오는 속도가 꽤 빨라졌다.

“유수호 이사랑 실장들도 부를까요?”

“네, 그렇게 하죠. 쉴 사람은 쉬고 마실 사람은 사무실로 모이라고 해주세요.”

수호와 라니 그리고 황동선 이사와 호세까지만 불러서 마시기로 했다.

나머지 직원은 호르헤가 멕시코에서 보내기로 한 돈 레오넬이 들어오면 따로 자리를 마련하면 된다.

황동선은 알겠다는 대답을 한 뒤.

임원진 단톡방에 그 내용을 적었다.

그러는 사이에 차에서 캐리어를 꺼내 사무실로 들고 들어가자 텅 빈 사무실에 라니 혼자 앉아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혼자 뭐하냐?”

옆으로 다가서며 물어보자,

라니는 모니터를 돌려서 보여줬다.

거기에는 아까 보지 못했던 향이 캐릭터 이모티콘의 스케치가 그려져 있었다.

“18개로 끝내는 거 아녔어?”

“아니, 24개까지는 만들어 보려고. 직원들한테 물어보니 그 정도는 있어야 경쟁력이 있다고 하더라.”

“하긴 같은 금액이라면 조금 더 많은 쪽을 선택하겠지. 새로 채용한 디자이너는 언제부터 출근하기로 했어?”

내 질문에 라니는 이틀 후라고 답했다.

황 이사는 내가 돌아오면 최종 면접을 보자고 했으나 이번 채용부터는 그냥 이사진에게 맡기는 것으로 정리했다.

어차피 나랑 같이 일할 것도 아니다.

사무직과 생산직을 관리하는 것은 두 명의 이사들 몫이니 그만큼의 권한과 함께 책임도 주기로 했다.

“모두 합치면 일곱 명 맞지?”

“응. 보육원에서 오는 친구들 네 명이랑 디자이너 그리고 생산직에 지원한 분들까지 합치면 일곱 명 맞아.”

“아! 맞다. 현장 실습 나왔던 학생들 졸업 선물 잊지 않고 줬지?”

라니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에 현장 실습 나왔던 학생들 모두가 오저당에 남기로 해서 정식 채용되었다.

소담 소주를 추가로 빚으려면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졸업 선물로 노트북을 한 대씩 선물해주었다.

아주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라니의 말에 의하면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오저당은 조금 특별했다.

다른 어떤 회사보다 평균 연령이 낮은 편에 속했다. 20대 초중반을 합치면 전체 직원의 8할 정도라고 보면 된다.

택배 업무를 보시는 아주머니들과 예전 이삭 기획 출신만 30대에서 40대다.

“그보다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

“새로 입사하는 직원들 숙소가 턱없이 부족해. 쌍둥이들 집에만 여섯 명이 살고 있어서 그런지 트러블이 조금 생기더라.”

그건 일종의 부작용 같은 것이었다.

화장실은 하나인데 씻어야 하는 사람이 많으니 부대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다들 이제 갓 성년이 된 청년들이다.

혈기 왕성한 이들이라 은근히 말다툼도 자주 있다고 했다.

“마을 입구 쪽에 구한 집이 있잖아. 이제 곧 인테리어 끝난다고 연화 건설에서 메일 왔으니 그쪽으로 보내면 될 거야.”

인테리어라고 거창한 게 아니었다.

적어도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반쯤 폐가가 된 상태라 돈이 제법 들었다.

그런 것까지 왜 해주냐고 하겠지만, 숙소는 어떻게든 해결해줘야 했다.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오저당에서 일하려고 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태백에서 출퇴근하는 것도 방법이나 그것도 차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태백에서 출퇴근하는 직원들끼리 카풀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식으로는 오래가진 못할 거야. 이장님이 더는 빈 집을 구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셨잖아.”

“사람이 더 많아지면 차라리 아침저녁으로 태백까지 출퇴근 버스를 운행하는 것도 고려 중이야.”

“그걸 누가 운전해?”

“윤가람 대리 아니지 이제 과장이지. 하여튼 윤 과장님도 대형 면허가 있다고 하더라.”

소담 소주의 책임자로 내정된 윤가람 대리는 연말에 호세와 수호가 승진할 때 과장으로 한 계단 승진했다.

물론, 올해부터 할 일이 산더미 같은 그에게 버스 운전을 진짜로 맡길 생각은 없었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네.”

“너는 이장님 댁에서 지내는 거 괜찮아?”

“물론이지. 빨래부터 식사까지 모두 다 챙겨주시잖아. 샌프란시스코에서 혼자 살던 때를 생각하면 아주 호강 중이야.”

라니가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요즘은 이장님과 이모님의 친딸이 누군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는 중간에 팔뚝을 계속 쓸어내리는 라니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아토피는 여전한 거야?”

오저당에 와서 완치된 줄 알았지만,

겨울철이 되니 다시 재발한 상태였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 일부 부위에 다시 살짝 올라온 정도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른 사람은 여름에 심해진다는데 나는 오히려 겨울이 되니 이 난리네.”

“병원에서는 뭐래?”

“케바케라고 하더라. 그래도 겨울이 이제 거의 다 지났으니 다행이지.”

라니가 강원도의 겨울을 경험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캘리포니아 기후와 다른 강원도의 겨울을 즐겼다.

폭설이 왔을 때도 누구보다 기뻐했고 직원들과 함께 눈사람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은 나와 라니 모두 알 수 없었다.

“다행이네. 아! 우선은 이것 좀 봐줘.”

나는 황 이사가 주었던 태블릿을 꺼내 향이의 이모티콘 이미지를 띄웠다.

거기에는 차 안에서 향이가 말해준 수정 사항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걸 본 라니는 눈을 흘기며 인상을 썼다.

“귀국과 동시 업무 폭탄을 던지는 거냐?”

“너 혼자 다 할 거면 디자이너는 왜 채용했냐. 일을 나눠서 하면 되잖아.”

“그런데 무슨 수정 사항이 이렇게 디테일한 거야? 너 도대체 정체가 뭐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

라니는 피터 팬이나 뭐 그런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요정의 이미지를 디테일하게 머릿속에 넣고 있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어려 보이냐?”

“디테일해도 너무 디테일하니 그렇지. 이거 혹시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을 카피하는 거는 아니지?”

“그럴 리가 있냐.”

“일단 돈 레오넬 캐릭터 ‘판초’ 이모티콘도 작업해야 해서 수정은 그 이후에 할게.”

한 번 건드리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수정 작업이다. 무한 수정 지옥에 빠지기 전에 라니는 일단은 마무리하길 원했다.

나도 그 의견에는 동의했으나 일의 순서를 조금 바꿔야 했다.

“그건 잠시 뒤로 미루고 먼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또 뭔데?”

“저번에 회의할 때 서울에 오저당의 직영 주점 열거라고 말했던 거 기억나?”

라니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곳의 인테리어를 그저 그런 보통의 주점처럼 하고 싶진 않았다.

아주 큰 돈을 쓸 수는 없으나 다른 곳과 차별성을 두고 싶었다.

주점의 테마도 이미 정해두었다.

오저당의 스프라이트 컬렉션에 맞춰서 매장 분위기도 몽환적이고 아기자기한 느낌으로 가져가고 싶었다.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냐.”

“인테리어 전체를 네가 디자인하라는 뜻은 아니야. 나중에 업체랑 미팅할 때 전체적인 틀만 잡아달라는 의미야.”

“그게 그거야. 내 성격상 대충 발 하나 걸치고 있는 거 못 참는 거 알잖아.”

“라니 실장님아. 욕심을 조금 내려놓으렴.”

나도 처음에는 라니처럼 모든 걸 내 손으로 다 해야 안심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내려놓고 있는 중이었다.

나날이 일거리가 많아지고 있다.

몸이 서너 개 정도 되는 게 아니라면, 과로사 당할 생각이 없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끄럽고 일단 이것부터 봐볼래?”

라니는 작업을 끝낸 이미지를 넣어두는 폴더에서 뭔가를 찾더니 클릭했다.

일러스트 파일명이 조금 독특했는데 [요정의 쉼터]라 적혀 있었다.

잠시 후에 화면에 뜬 이미지를 본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일러스트 형태로 그려진 그림 속에는 내가 상상하고 원했던 주점의 아기자기한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와! 정말 이렇게 꾸미면 예쁠 것 같아요.]

향이도 그 모습에 만족했다.

실제 요정들이 사는 세계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으나 일단 예쁘다는 점에서 점수를 후하게 줬다. 거기에 자신의 이모티콘을 만드는 것이 라니이기에 가산점이 더 붙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언제 만든 거야?”

“스프라이트 컬렉션 만들면서 틈만 나면 요정 컨셉의 카페와 주점에 대해서 말했잖아.”

“내가 그랬었나?”

“그리고 너는 한 번 꽂히면 꼭 해야 하는 성격이잖아. 그걸 내가 모르겠냐.”

역시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녀석과 같이 일하니 이런 점은 확실히 좋았다.

라니의 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뭔가에 꽂히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몰입하는 편이다.

“예전에 스케이트 묘기 해보겠다고 무릎 다 아작날 때까지 탔던 거 기억해?”

“그날 다친 무릎보다 어머니의 등짝 스매시가 더 아프더라.”

한동안 옛날 일을 이야기하고 있자,

수호와 호세 그리고 황 이사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세 사람은 안주로 먹을 음식을 가득 들고 왔는데 나는 그들을 불러 라니의 일러스트부터 보여줬다.

“다들 와서 이거 어떤지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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