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70화 (170/254)

워커 홀릭 (2)

12시간쯤 지났을까.

페레즈에게 메일이 왔다.

며칠쯤 걸릴 거라 예상했지만,

이번에도 나의 예상은 어긋났다.

메일에 첨부된 파일을 열어보니 엄청난 양의 보고서와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게 가능한 건가?

짧은 시간 내에 만들 수 없는 양이다.

내가 별도의 지시를 하기도 전에 미리 자료를 만들어놨다는 의미였다.

고용하기 전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확실히 페레즈는 평범하지 않았다.

일에 미쳐있는 사람 같았다.

별도의 사무실 없이 재택 근무하는 그는 내가 봤을 때는 온종일 일만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빠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일 처리도 똑 부러지게 잘한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상당히 꼼꼼한 성격이라 실수하는 일도 거의 없는 편이었다.

“휴우··· 오늘도 일찍 자기는 글렀네.”

일에 중독된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이제 술을 직접 빚는 것은 아니나 생각보다 일거리가 엄청난 편이었다.

오저당 본사와 로데오점뿐만 아니라 멕시코와 미국 지사의 보고서도 살펴봐야 했다.

두 곳 모두 매주 상황을 정리해서 내게 보내주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법인이 자리 잡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슈미트는 내년에 합류할 예정이고 호르헤는 경영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다소 비정상적이어도 당분간은 지금의 형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페레즈가 보내준 보고서를 읽고 있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라니가 고개를 빼꼼이 내밀고 있었다.

“아직도 일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됐네. 너는 여기서 뭐 하냐?”

“수호가 야식으로 족발 사 와서 왔지. 나와서 같이 먹자.”

여기까지 배달해주는 곳은 없다.

뭔가 특별한 것을 먹으려면 직접 나가서 먹거나 사 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왕복 1시간이란 시간을 들여서 나갔다가 오는 것은 굉장히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때때로 식욕이 귀찮음을 이길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증상은 보통 수호에게 나타났다.

“다른 직원들은?”

“나가는 김에 수호가 넉넉하게 사 와서 이장님 댁이랑 다른 숙소에도 돌렸어.”

“잘했어.”

차가 있는 직원은 꽤 많이 있다.

하지만 오풍리 숙소에 사는 친구들은 대부분 이제 막 20대를 갓 넘은 상태다.

대부분 차를 살 수 있는 형편도 안 되고 운전면허를 가진 친구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뭔가를 먹고 싶어도 시내에 다녀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올 거야? 말 거야?”

“이것 좀 봐야 해서 조금 있다가 나갈게.”

“뭘 보고 있는데?”

라니는 안으로 들어와 화면을 봤다.

영어로 잘 정리된 문서를 본 녀석은 곧장 누가 보낸 건지 알아챘다.

“페레즈가 보낸 보고서야?”

“응, 오늘 버번 증류소를 세울 건축 사무소를 알아봐달라고 했거든.”

“오늘? 그런데 그게 벌써 왔어?”

라니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얼핏 봐도 분량이 상당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대충 갖다가 붙여 놓은 것도 아니고 잘 정리되어 있었다.

“미리 준비해 놓았던 것 같더라.”

“나도 옆에서 같이 봐도 돼?”

“물론이지. 의자는 내가 가져다줄게.”

내 방에 있는 의자는 하나뿐이다.

무릎 위에 앉힐 것이 아니라면 밖에서 식탁 의자를 가져와야 했다.

문제는 내가 그걸 가져오자 수호와 호세까지 방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뭘 보길래 라니가 족발을 마다하고 네 방에서 안 나오는 거야?”

“좋은 거면 같이 봐요.”

“별거 아니니까. 가서 야식이나 먹어.”

“오옷! 이거 버번 증류소 맡길 건축 회사 리스트 맞아?”

해외에 증류소를 짓는 것에 대해 수호와 호세는 상당히 큰 관심을 보였다.

생각해보니 현장에서 일하는 두 녀석의 의견도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같이 볼 거면 밖으로 나가자.”

내 제안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노트북을 거실로 가져가서 TV에 연결하는 동안 수호와 호세는 맥주와 함께 족발을 먹을 준비를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여러 건축 사무소의 포트폴리오를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종종 수호가 영문 해석 때문에 헤맬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호세와 라니 그리고 내가 옆에서 조금씩 도와줬다.

그래도 많이 발전하기는 했다.

수호의 영어 실력은 무리 없이 대화하는 수준까지 어느 정도 올라온 상태였다.

해외에 오저당 법인이 생기니 제대로 동기 부여가 된 것 같았다.

더구나 자신감도 꽤 많이 올라왔다.

몇 개월 전에 미국에 다녀온 뒤로 말문이 트였다고 봐도 되었다. 당연히 거기까지 오는데 호세와 라니의 공헌이 컸다.

“가능하면 건축 사무소는 증류소 건축 경험이 있는 곳이 좋지 않을까?”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하지만 그렇게 조건을 넣으면 대부분 다 탈락이야.”

“하긴 그 동네 증류소가 다들 상당히 오래됐잖아. 새롭게 짓는 곳이 없으니 그런 경험을 가진 건축 회사도 없겠지.”

수호는 내 의견에 동의했다.

직접 그 동네를 가본 경험 덕분이다.

그리고 페레즈의 조사에 의하면 리스트에 있는 회사들의 시공 능력은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이라고 했다.

결국에는 설계가 중요했다.

증류소의 핵심은 역시 숙성이다.

습도와 온도 그리고 환기 같은 숙성에 필요한 요소를 설계 단계에서 적절하게 잡아줘야 한다.

“도찬이 말이 맞아. 우리가 이번에 지은 3층 창고가 넓어서 좋은데 겨울에 온도 잡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더라.”

“생각난 김에 겨울 오기 전에 히터 같은 거 충분하게 주문해놔.”

수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라니는 어서 다음으로 넘어가서 설계 사무소 리스트를 봐보자고 재촉했다.

설계 사무소의 역량은 우리가 구별하기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었다.

설계의 묘미를 우리가 알 리가 없지.

대신 건축물의 외형만큼은 눈에 금방 들어왔다.

“여기는 너무 평범해. 이런 건물은 전 세계에 수억 개는 있을 것 같아.”

“외형이 중요한 거는 아니지 않나요?”

“노놉! 무슨 소리야. 때깔이 좋아야 먹기도 좋다고 했어.”

라니가 한국 속담으로 비유를 했다.

요즘 사자성어랑 속담 등에 관련된 책을 끼고 다니더니 꽤 많이 늘기는 했다.

하지만 틀린 거는 지적해줘야지.

“그게 원래 그런 말이 아닐 텐데.”

“이거 아냐?”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가 맞아.”

“의미만 제대로 전달됐으면 됐지. 자! 그럼 다음 회사로 넘어갈게.”

라니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마우스를 클릭해서 다음 사진 폴더를 열었다.

조금 특이한 것은 이번에 보게 될 회사의 이름이 ‘O&D 설계 사무소’라는 것이었다.

“우리 OGD이랑 한 끗 차이네요.”

“그러게 이름만 봐도 호감이 간다.”

“여기 CEO랑 메인 건축가가 형제인데 형이 오스카고 동생이 도니라 저런 이름이 나온 것 같아.”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나는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회사의 내력이 장난 아니었다.

“와··· 수상을 뭐 이렇게 많이 했어?”

“무슨 상을 받았는데?”

“미국건축가협회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건축상 수상 후보까지 올라갔고 그외에도 다양한 상을 몇 차례나 수상했네.”

“협회는 그렇다고 치고 나머지 상은 얼마나 권위 있는 거야?”

수호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미국에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까지 아는 것은 아니다.

나는 물론이고 라니도 처음 듣는 거라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호세였다.

“보고서 마지막 장에 설명 있네요.”

“제법 권위 있는 상도 많네. 나이도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던데 대단해.”

“그만큼 설계 비용이 비싸지 않을까요?”

“글쎄다. 얼마나 요구할지 감이 안 잡히네.”

명성이 높은 건축가일수록.

당연히 비용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엄청나게 많은 자금을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조금 꺼림칙했다.

“예산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고 있어?”

라니의 질문에 나는 20억이라 답했다.

거기서 조금 더 늘어도 상관은 없으나 30억 이상 넘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기존에 20억 가까이 썼고 추후에 설비가 들어가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모두 합쳐서 50억이 한계다.

이 수치를 임의로 정한 것은 아니다.

재무를 담당하는 서준석 부장과 오늘 오후 내내 논의해서 나온 것이다.

그 정도면 오저당 본사에서 5개월 동안 벌어들인 순수익을 모두 투자하는 거다.

과거에 매달 6억씩 나오던 순수익은 소담이 추가되며 조금 더 늘어났다.

거기에 퍼플 라벨이 미국에 수출되며 잠시 늘어난 매출도 조금 영향을 주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돈 레오넬을 받아서 바크모에 토스하며 미국 법인이 버는 수익이 제법 커졌다는 것이다.

그걸 가져다가 쓰면 투자해야 하는 금액은 어느 정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투자하는 것은 좋은데 본사 수익을 계속 해외에 투자하는 것도 조금 그래.”

“나도 충분히 알고 있어.”

“알면 다행이다. 연말에 성과급으로 챙겨주니 아직 직원들의 불만은 없는데 여기도 투자할 곳이 아직 많아.”

“안 그래도 하반기 수익은 오저당에 모조리 투자할 거니 걱정하지 마.”

수호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몇 개월 전에 창고가 완공됐지만,

아직 그걸로는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현재는 벽향주만 장기 숙성 중이나 앞으로 소담도 추가 숙성을 고려 중이다.

더 오랜 시간을 들일수록 좋은 맛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처음 소담을 빚은 후에 지금까지 1년 가까이 됐다.

그 당시 빚은 술을 지금까지 숙성을 해보니 확실히 급이 다른 맛이 나왔다.

퍼플 라벨처럼 따로 라벨을 하나 만들어도 충분히 팔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걸 빚어 놓을 공간이 없었다.

아직 신축 창고의 2층이 비어 있으나 거기는 이미 RTD 라인으로 확정해놓은 상태라 그곳은 아직 비워놔야 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라니가 깔끔하게 발라진 족발 뼈를 내려놓으며 이번 일은 자신이 맡겠다고 자원했다.

미국에 있는 페레즈를 통해 진행하는 것보다 여기서 직접 연락하는 것이 의사소통 과정이 짧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시차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O&D 설계 사무소는 내가 한 번 연락해볼게.”

*

이틀이 지난 뒤.

라니는 그 결과를 보고했다.

“O&D 설계 사무소의 대표와 통화를 해봤는데 요구 조건이 애매하네.”

“금액이 안 맞아?”

“화상 미팅으로 견적 내기 어렵다고 직접 증류소가 들어갈 공간을 보고 싶어 해.”

저번에 우리가 다녀왔을 때.

사진과 영상을 꽤 찍어서 돌아왔다.

라니는 그 자료를 정리해서 보내줬는데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맡아줄 수 있기는 한 거야?”

혹시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으면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

잘 나가는 이들은 몇 건의 프로젝트를 쌓아두고 끊이지 않게 일을 한다고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얼마 전에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끝났나 봐. 문제는 다음 주에 휴가를 가서 2개월 후에 돌아온다고 하더라.”

“2개월이나 쉰다고?”

“거의 18개월 가까이 쉬지 않고 일했다고 무조건 쉴 거라고 강조했어.”

설계가 그렇게 오래 걸리나?

그러면 그것도 조금 문제라 여겨졌다.

기왕에 하는 거면 최대한 빨리 증류소를 짓고 본전을 뽑아내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오저당 본사에 들어간 투자비보다 그쪽에 들어갈 예정인 돈이 훨씬 더 많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원래 그렇게 오래 걸려?”

“글쎄. 내가 물어봤을 때는 건축물이 완공될 때까지 계속 그 프로젝트만 붙잡고 있었다고 말하더라. 다른 곳을 알아볼까?”

“솔직히 다른 곳은 포트폴리오를 봐도 그다지 관심이 안 가. 너는 어때?”

“나도 그렇기는 해.”

라니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일단 그들의 포트폴리오는 독특했다.

건축물 하나라도 대충 만들지 않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 정도다. 약간의 집착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어쩔 수 없네. 약속 잡아줘.”

“진짜 그 사람들 만나러 미국까지 가려고?”

“어차피 멕시코 가는 일정이 있었잖아. 조금 일찍 출발하면 되지.”

그래봐야 며칠 차이밖에 안 난다.

내 이야기를 들은 라니는 알겠다며 대답한 뒤에 최대한 일정이 어긋나지 않게 잡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너는 출장 준비나 어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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