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72화 (172/254)

워커 홀릭 (4)

인근에 있는 한적한 카페.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 오스카와 도니 그리고 페레즈가 앉았고 쌍둥이는 따로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오스카는 자리에 앉자마자 사과했으나 나는 이미 그 문제는 잊기로 했다.

오는 길에 캐리어에서 바지를 꺼내 갈아입었고 옷은 세탁하면 그만이었다.

“사과는 그쯤 하시고 이제 일 이야기를 해봐도 될까요?”

내가 일 이야기를 꺼내자,

오스카는 한발 앞서서 변명부터 했다.

동생인 도니를 보고 선입견을 가지는 클라이언트가 워낙 많았던 것 같았다.

“도니가 어려서부터 자폐 증상이 있었는데 설계하는 실력 하나만큼은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대단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몇 가지의 서류를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그중에는 직업적 기능평가척도(SOFAS)도 있었다.

거기에 적힌 바에 의하면 거의 만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오스카는 그 이유를 제한적 관심(Restricted Interest)이라 이야기했다.

자폐 증상을 앓는 이들에게는 여러 증상이 있으나 그중의 일부는 특정한 분야에 완전히 꽂히는 일이 있다.

도니가 그런 케이스였다.

그는 건축 설계에 완전히 빠진 상태고 자신만의 세계를 설계라는 방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보여준다고 했다.

어쩐지 그가 지금껏 해왔던 설계를 보면 독창적인 게 많았다. 일반적인 상식과 거리가 먼 도전적인 형태의 설계가 어떻게 나온 건지 이해가 됐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특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현재 도니의 상태 때문에 편견은 갖지 않기로 했다.

더구나 처음으로 요정을 볼 수 있는 사람을 만났기에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참고하겠습니다.”

“제 말을 믿어주실지 모르겠으나 평소에 오늘 같은 일이 자주 있지는 않습니다.”

“설계만 잘해주신다면 그런 사소한 문제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향이가 트리거가 된 탓이다.

만약에 그 자리에 나와 향이가 없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소동이었다.

지금도 그런 이유 때문에 향이는 카페가 아닌 차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내민 서류상으로는 아주 심각할 정도의 증상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도니의 문제를 사소하다고 말하자 오스카의 표정은 단숨에 밝아졌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분은 처음이네요. 대부분 수상한 이력만 보고 찾아왔다가 도니를 보면 힘들겠다고 말하거든요.”

지금까지 쌓인 게 많았던 것 같았다.

하긴 지금까지 경력을 쌓기까지 상당히 많은 역경이 그들의 앞에 놓여 있었겠지.

그들과 똑같은 경험은 없었으나 인종 차별을 꽤 당해봤기에 살짝 이해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도니보다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오스카가 더 대단했다.

남들과 다른 동생과 함께 일하면서 모든 역경과 고난은 그의 몫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리고 모든 설계가 끝나면 O&D에 소속된 건축 기사들이 철저하게 검토 과정을 거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중의 분배와 설계의 타당성.

여러 문제가 생길만한 부분은 사전에 자체적인 검수로 없앤다는 의미였다.

사람들의 편견이 생각보다 골이 깊은 편이라 스스로 만든 보완책 같았다.

더구나 무엇보다 중요한 안전과 관련된 부분이라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다음 주부터 휴가를 떠난다고 들었는데 2개월 후에 복귀하는 게 맞습니까?”

“그렇게 일정을 잡아놓기는 했는데 도니가 한 번 꽂히면 그것만 잡고 있어서 생각보다 일찍 복귀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더 오래 걸릴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겠네요.”

오스카는 도니가 쉽게 컨트롤되는 편은 아니라고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팅커벨··· 나 오늘 팅커벨을 봤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옆에 앉아있는 도니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흘깃 바라보니 작은 요정 펜던트 같은 것을 쥐고 있었다. 오스카는 그런 나의 시선을 보고 설명을 해줬다.

“도니가 좋아하는 게 두 가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요정입니다.”

“요정이요?”

“어릴 때 어머니가 매일 밤마다 요정과 관련된 동화책을 읽어주셨거든요. 지금 만지고 있는 것도 어머니 유품입니다.”

그리고는 소리를 낮춰서 도니는 아직도 요정의 존재를 믿는다고 내게 말해줬다.

아직 동심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에 믿던 대부분의 것들은 나이를 먹어가며 서서히 믿지 않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산타클로스겠지.

향이를 만나기 전에 누군가 내게 요정이 있냐고 물었다면 이상하게 봤을 것이다.

어른들이라면 대부분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그때 문득 이번 출장에 가져온 것들이 생각났다.

“유성아. 차에 있는 내 트렁크에서 판촉물 몇 개만 꺼내와 줄래?”

“종류별로 하나씩 다 가져올까요?”

“그렇게 부탁해.”

주차장에 다녀온 유성은 꽤 커다란 쇼핑백 하나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그걸 오스카에게 건넸다.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선물이요?”

“마침 오저당에서 요정이란 컨셉으로 술을 내놓고 있어서 그와 관련된 판촉물을 몇 가지 만들었거든요.”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에 오스카가 쇼핑백에 들어있는 판촉물을 꺼냈다.

그걸 본 도니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손뼉을 치며 환호하자 오스카는 동생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카페의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워낙 외진 곳에 있었고 뭔가를 먹기에는 조금 시간대가 애매한 탓이었다.

“아까 그 요정이다. 반가워.”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충 사정은 다 들었으니 현장으로 이동해볼까요?”

“그러시죠.”

우리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O&D는 우리 증류소의 설계를 맡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다.

그런 애매한 포지션에서 더 나눌 이야기는 없었다.

그건 오스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해준 말에 의하면 프로젝트의 선정 기준은 도니에게 달렸다고 했다.

만약에 그가 내키지 않으면 일의 진행이 어렵다는 의미기도 했다.

설계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시간을 내서 직접 증류소가 들어설 자리를 보겠다고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잠시 후에 파사데나 증류소 자리에 도착한 우리는 그 앞에 차를 세웠다.

거기부터는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O&D의 두 형제는 폐허가 된 증류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고 나는 다시 카메라를 켠 쌍둥이를 상대해야 했다.

두 녀석은 완전히 허물어진 폐건물을 보고 꽤 놀란 것 같았다.

“정말 벽밖에 안 남아 있네요.”

“1880년대에 지어졌다고 하더라. 멀쩡한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지.”

“여긴 왜 무너진 거죠?”

“듣기로는 폭설 때문이라고 했어.”

나는 이곳을 거래할 때 중계인이었던 배퍼트에게 들었던 것을 이야기해줬다.

이미 쌍둥이들도 아는 내용이었으나 영상으로 만들 용도라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편집이 들어갈 것이다.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듯 내용만 전달하면 알아서 우주가 처리해줄 테니 부담은 그리 크지 않았다.

우주는 생각보다 센스 있게 잘 잘라다 붙였는데 종종 보면 왜 방송국 놈들이라 부르는 건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어떤 편집을 하냐에 따라 누군가는 천사가 되고 누군가는 악마가 된다.

“나는 잠시 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페레즈랑 같이 주변을 찍고 있어.”

어느 정도 촬영을 마친 뒤.

나는 페레즈와 쌍둥이를 떼어냈다.

그런 뒤에 차에 실린 캐리어에서 작은 호미를 하나 꺼내왔다. 그걸 들고 나는 요정을 숨겨 놓은 곳으로 향했다

[옮겨 놓으시려고요?]

“아무래도 그래야지. 여기는 허물어야 하는데 나중에 꺼낼 수도 없잖아.”

[하지만 멀리 옮겨 놓을 수는 없어요.]

그럴 수 있었다면 아예 한국으로 데리고 갔겠지. 나는 숨겨놨던 곳에서 요정을 꺼내 커다란 나무 아래로 옮겼다.

설계와 시공 단계에서 이 나무는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하면 되니 그나마 여기가 가장 안전했다.

완공이 된 이후에 술을 빚기 시작하기 전까지 시간적인 여유가 상당히 많다.

설비를 들여놓고 디스틸러도 구인해야 하니 금방 진행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사이에 꺼내면 된다.

호미로 살짝 땅을 파낸 뒤.

요정을 그 안에 넣어두고 덮었다.

그렇다고 아예 흙에 파묻은 것은 아니고 따로 상자를 하나 가져왔기에 거기 안에 넣어뒀다.

요정을 옮기는 일은 오래 걸리진 않았고 잠시 그 나무 그늘 아래 앉아있자 도니가 차에서 뭔가를 꺼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내 곁으로 다가와서 옆에 앉았다.

“여기 마음에 들어요?”

“요정이 사는 동네입니다. 마음에 쏘오옥 듭니다.”

그렇게 내게 대답을 해준 뒤.

스케치북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슬쩍 뭘 그리는 건지 보려고 했지만, 금방 눈치채고 보여주지 않으려 몸을 돌려버렸다.

“스케치가 완성되기 전에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을 무척 싫어한답니다.”

그때 오스카가 음료수를 들고 나타나 내게 하나를 건넸다. 그리고는 스케치를 한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건지 알려줬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정도 반응이면 도니가 이 장소에 꽂혔다고 봐도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해도 될 것 같네요.”

어차피 돈과 스케줄에 관련된 부분은 도니가 아닌 오스카의 몫이었다.

나는 가장 먼저 설계 비용부터 체크할 수밖에 없었다.

도니가 설계에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금액이 맞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 없었다.

당장 계약서에 쓸 금액이 산출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금액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살펴보니 두 채는 아예 새로 지어야 하고 두 채는 보강 공사를 하더라도 내부 전체를 손봐야 할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그렇죠.”

“보통 이 정도 규모는 최소 25만 달러부터 시작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한화로 약 3억 2천만 원 정도 되려나.

오스카가 부른 금액은 생각보다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라는 말이 있기에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더 높아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세한 것은 검토 후에 확정할 수 있으니 시간이 필요합니다.”

“혹시 이 중에 같이 일해보신 곳이 있나요?”

나는 건축 사무소 리스트를 꺼내 그에게 보여줬다. 기왕이면 합이 잘 맞는 회사가 시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스카는 잠시 리스트에 있는 회사를 보더니 그중에서 한 곳을 짚어주었다.

“이곳의 대표가 저희 도니와 가장 소통이 원활하고 시공 능력도 좋은 편입니다. 그리고 공사비도 합리적이고요.”

“알겠습니다. 가능하면 이곳과 연결할 수 있도록 준비하죠.”

아무리 설계가 잘 나와도 그걸 구현할 시공 업체와 트러블이 나면 결과물이 제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비슷한 금액의 공사 비용이면 잘 맞는 쪽이 좋겠지.

한동안 실무 영역의 일을 의논했으나 이야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의논할 내용이 많은 게 아니라 도니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도니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케치만 계속하고 있었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의 머릿속에는 그림이 완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이 지나자.

어느 순간에 도니의 손이 멈췄다.

고개가 살짝 숙여진 것을 보면 잠시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걸 본 오스카는 스케치북을 가지고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곳에 그려진 풍경은 뭐랄까.

요정이 살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폐허로 남아 있는 곳에는 붉은색의 벽돌 건물이 그려져 있었고 각각의 건물 사이로는 요정 조형물이 놓여 있었다.

오늘 하루 요정에 관련된 것들을 자주 보다 보니 거기에 완전히 꽂힌 것 같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만드는 버번위스키도 스프라이트 컬렉션 중의 하나로 들어갈 예정이라 뜬금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지역의 증류소는 방문자를 대상으로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곳이 많기에 경쟁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했다.

Since 1880 역사를 가져오기로 했으나 그래도 완전히 우리 것은 아니다.

만약에 이 스케치가 그대로 구현되면 적어도 렉싱턴의 증류소와 다른 차별성이 있을 것 같았기에 마음에 들었다.

나는 도니가 그린 스케치를 다시 오스카에게 건네주었다.

“좋네요. 이대로 만들어보죠. 일단 설계 견적부터 작성해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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