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다며 손을 흔든 뒤.
RJ는 일단 방에 들어가 씻었다.
인터뷰 때문에 했던 화장이 지워지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아무리 적응하려 해도 화장만큼은 쉽지 않았다.
완전히 세팅한 후의 자신의 모습을 보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아가 분열되는 느낌도 종종 받았다.
사람들이 바라는 내 모습과 진짜 내가 전혀 다를 때가 많았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에···]
문제는 씻고 나와서 매니저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전화를 도통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바쁜 것 같았다.
한동안 기다리던 RJ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기다렸다가는 마트가 닫을 것 같았다.
호텔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불과한 터라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마스크와 모자까지 눌러썼다.
그 상태로 로비로 내려간 그는 자신과 똑같은 변장을 한 누군가를 발견했다.
“어디 가냐?”
멤버 중의 막내였다.
RJ를 본 그는 멋쩍게 웃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멤버들은 뒤통수만 봐도 금방 알아챘다.
“그러는 형은요?”
“마트 갈 거라고 아까 말했잖아.”
“매니저 형은 어디 놔두고 혼자 가요?”
“전화를 받아야 말이지. 조금 있으면 문 닫아서 기다릴 시간이 없어.”
“그러면 같이 가요. 저는 갑갑해서 산책 좀 하려고 했거든요.”
둘은 금방 의기투합했다.
호텔에서 나와 마트까지는 금방이었다.
그곳에 들어선 둘은 데뷔 무렵에 같이 살았던 숙소 시절을 회상했다.
“그때는 마트도 우리끼리 가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것도 쉽지 않네요.”
“그러게 말이다. 인기랑 맞바꾼 자유지만, 나는 그래도 지금이 좋다. 군대에 다녀오니 팬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져.”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저쪽에 주류 코너 있네요.”
둘은 카트를 끌고 그쪽으로 향했다.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답게 진열된 술의 숫자가 정말 많았다. 당연히 RJ는 와인부터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때 막내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형. 여기 좀 봐보세요.”
“왜? 좋은 술이라도 찾았어?”
“아니요. 여기서도 벽향주를 파는데요.”
“뭐래. 저번에 프랑스 왔을 때도 봤잖아.”
“그거랑은 조금 달라요.”
막내는 한 병을 꺼내 보여줬다.
벽향주는 한국에 있을 때도 RJ가 즐겨 마시는 술이었다. 당연히 라벨 디자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내가 보여준 것은 색이 조금 달랐다.
“보라색이잖아? 원래 하얀색이었는데.”
“여기 보니까 추가 숙성을 한 술이래요.”
“한국에서도 못 보던 건데 그사이에 신제품이 나온 건가?”
“저는 이거 마셔볼래요. 심지어 색도 우리를 의미하는 보라색이잖아요.”
막내의 말에 RJ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트에 세 병을 넣었다.
어떤 맛인지 궁금한 것도 있으나 막내의 말대로 보라색이라 더 끌렸다.
하지만 잠시 후에 그는 추가로 두 병을 더 집어서 카트에 담아야만 했다.
막내가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퍼플 라벨은 애초에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술이라 유럽에서만 팔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마실 수 없는 술이었다.
화이트 라벨을 즐겨 마시는 RJ 입장에서 바라보면 상당히 레어한 술이었다.
하지만 막내는 그걸로는 부족할 거라며 추가로 두 병을 더 집었다.
“우리 입이 일곱 개나 되는데 멤버 숫자는 맞춰야 안 싸워요.”
그뿐만 아니라 맥주와 와인도 몇 개 집어서 카트에 넣으니 꽤 묵직해졌다.
이걸 어떻게 들고 가나 걱정될 정도였다.
“생각보다 양이 많은데 우리끼리 들고 갈 수 있을까?”
“누가 보면 술꾼인지 알겠어요.”
“아무래도 매니저 형한테 차 끌고 와달라고 해야겠네.”
다행히 매니저와 통화는 성공했다.
안 그래도 호텔에서 사라진 둘을 찾고 있었던 터라 그는 당장 마트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크크큭. 처음에 해외 투어 다닐 때는 아시아 마트까지 몰래 나가서 소주 사 오고 그랬는데 그때 생각나지 않아요?”
“그러게. 이것도 인연인데 SNS에 올려볼까?”
막내는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의 SNS가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둘이다.
가볍게 언급하는 것만으로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가능하면 국내 기업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기에 종종 멤버들은 이런 식으로 홍보를 해주는 일이 있었다.
둘은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뒤.
진열대 앞에서 마스크를 내리고 재빨리 셀카 한 장을 찍었다. 그리고 그걸 곧장 자신들의 SNS에 올렸다.
#파리 #12주년 #월드투어 #기대해
#벽향주 #퍼플라벨 #보라해#
이 대신에 잇몸
멕시코의 돈 레오넬 증류소.
다시 찾은 그곳은 많이 바뀌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일하고 있는 직원들의 숫자였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방문했을 때.
증류소에서 일하던 인력은 서른 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이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생산직은 아니었다.
그중에서 1/3은 사무직이었다.
미국 수출을 위해 예전에 인수한 물류 회사 직원도 있었고 일부는 아가베 확보를 위해 고용한 직원이었다.
“아가베는 얼마나 확보되었나요?”
무엇보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증류소에 건물을 짓고 확장 중이었으나 아가베를 확보하지 못하면 소용없었다.
다시 한번 카를로스가 아가베를 저렴하게 토스해줄 거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최대한 노력하고 있는데 농장 단위로 계약한 곳이 많아서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금 10만 병씩 생산하고 있는 것도 유지하기 어려운 건가요?”
“아닙니다. 그 정도는 맞출 수 있습니다.”
호르헤는 그건 아니라며 대답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50만 병까지 생산할 수 있게 증축하고 있는 설비 때문이었다.
이미 확보한 아가베가 있기에 당분간 20만 병 정도씩은 생산할 수 있다고 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최대한 확보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었다.
조만간 호세 가족이 운영하는 아가베 농장의 계약 기간이 끝난다는 것이다.
몇 개월만 지나면 거기서 생산하는 것을 우리 증류소 쪽으로 돌릴 수 있다고 했다.
“다행이네요.”
“그리고 저번에 말씀하신 아가베 농장을 세울 땅도 계속 확보 중입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확보했죠?”
“15헥타르 정도 됩니다.”
대충 4만 5천 평 정도 되려나.
생각보다 넓은 땅을 확보해놨다.
하지만 그 과정이 그리 쉽진 않았다.
테킬라 주변은 농장이 들어설 평야 지대가 그리 넓지 않은 편이었다.
주변의 지형을 보면 거의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테킬라 마을만 보더라도 남쪽으로는 테킬라 화산이 솟아있고 북쪽으로 협곡과 산맥이 존재한다.
더구나 테킬라는 특정한 지역 내에서 생산되는 아가베만 사용이 가능하다.
다른 지역에서 재배하거나 지정되지 않은 품종을 쓰면 테킬라라 부를 수도 없다.
그러니 땅을 사는 것도 쉬운 편은 아니었다.
“여기서 가깝나요?”
“30km 정도 떨어진 산 시몬이란 마을 근처라 30분 정도 걸립니다.”
“그리 멀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하지만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지금 아가베 농사를 시작해도 최소 7년 정도는 키워야 테킬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긴 했다.
아가베는 성장 속도가 상당히 느리다.
오랜 시간 관리해줘야 하기에 금방 생산량을 늘릴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 더 빨리 시작해야 한다.
하루를 미룰수록 수확도 늦어진다.
그나마 농사를 맡기기로 결정한 호세의 사촌과 친척들이 전문가라 다행이었다.
“지금 추세를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아가베가 필요하니 농장을 확장하는 것은 계속해주세요.”
“매달 돈 레오넬이 미국으로 수출되며 OGD 멕시코가 벌어들이는 자금이 적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재 OGD 멕시코는 인건비와 세금 같은 여러 비용을 빼더라도 매달 40만 달러 가까이 순수익을 남기고 있다.
생각보다 빠르게 증류소를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요정이다.
빚고 있는 술의 단위가 달라지자 당연히 요정도 그만큼 더 늘어난 상태였다.
아직은 오저당 수준에 도달하려면 멀었으나 어느덧 하급 요정도 생겼다.
당연히 판초도 많이 달라졌다.
조금 성장한 건지 덩치도 예전에 비해서 커진 것 같았고 복장도 살짝 바뀌었다.
이러다가 조만간에 향이처럼 말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될 정도였다.
그 영향은 돈 레오넬에도 나타났다.
같은 방식으로 술을 빚고 동일한 기간을 숙성했는데도 오히려 예전과 비교하면 훨씬 더 맛이 깊어진 느낌이었다.
그건 호르헤도 인정했다.
“아무래도 직원들의 숙련도가 높아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호르헤는 그 원인을 숙련도로 해석했다.
그게 아니면 아가베의 품질 차이일 수도 있다고 여지를 두었는데 그게 아니면 딱히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긴 했다.
어쨌든 나쁜 소식은 아니기에 호르헤의 표정은 상당히 밝아 보였다.
그러는 사이 쌍둥이는 촬영을 하느라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주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고 유성은 새롭게 지어지고 있는 증류소 주변을 촬영 중이었다.
두 형제는 모든 것을 신기해했다.
여기 오기 전에 미국을 거치며 며칠 동안 해외 경험을 쌓았으나 멕시코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었다.
둘 다 음식을 가리진 않았다.
오히려 멕시코에서 처음 먹어본 타코와 토르티야 그리고 브리토를 꽤 좋아했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과카몰리를 맛보고 식사때마다 하나씩 반드시 시킬 정도였다.
“회장님! 한국에서 전화가 왔는데요.”
그때 멕시코 직원 하나가 달려왔다.
여기서 나를 부르는 호칭은 회장이다.
호르헤가 직원들에게 그렇게 시킨 탓이다. 그의 호칭도 사장인 터라 헷갈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은 없었다.
내가 의아한 것은 한국에서 온 전화였다.
왜 직접 전화를 하지 않은 거지?
뒤늦게 나는 충전 때문에 스마트폰을 숙소에 놔두고 왔다는 것을 떠올렸다.
“급한 일인 것 같은데 다녀오시죠.”
호르헤는 안내하던 것을 잠시 멈춘 뒤에 나와 함께 사무실 방향으로 같이 걸었다.
사무직이 사용하는 테이블 몇 개가 놓인 작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직원이 수화기를 들어서 내게 건네줬다.
“여보세요?”
[너도 그렇고 쌍둥이까지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수화기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는 수호의 것이었다.
“밤에 충전하는 걸 깜빡해서 숙소에 놔두고 나왔어. 쌍둥이는 촬영할 때 무음으로 해놓잖아. 무슨 일인데 그래?”
[다 같이 이야기하는 게 빠를 테니 그냥 영상 회의로 하자. 바로 접속할 수 있지?]
“지금 증류소에 있어. 호세 집까지 이동해야 하니 10분 정도는 걸릴 거야.”
여기서 접속하고 싶어도 그럴 여건이 전혀 안 되었다.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그게 더 걸릴 거다.
수호도 그런 지금 상황을 이해해줬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접속해.]
왜 그러냐고 물을 틈도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벨 소리가 엄청났다.
쉬지 않고 울리는 벨 소리와 전화 받느라 정신없는 상황이 그대로 전달됐다.
확실히 뭔가 일이 터진 것 같았기에 우주도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숙소로 돌아가실 건가요?”
“가봐야지. 너희는 어떻게 할 거야?”
“저희는 여기서 촬영을 조금 더 하고 돌아갈게요.”
여기에서 일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테킬라 마을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차를 타고 돌아오면 될 일이라 문제는 없었다.
나는 일단 호르헤의 차를 타고 마을로 돌아와서 스마트폰부터 챙겼다.
[부재중 전화 49통, 카톡 592회]
전쟁이라도 난 건가.
연락 온 곳도 무척 다양했다.
그중에는 뫼리스도 있었고 미국에서 카를로스가 보낸 연락도 있었다.
일단 노트북부터 켜서 화상 회의 프로그램에 접속하자 다들 회의실에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수호 : 퍼플 라벨이 사고 쳤다.]
“무슨 사고?”
[수호 : 말로 설명하면 길어지니 일단 단체톡으로 보낸 것부터 확인해봐.]
스마트폰을 들어 단체톡에 올라와 있는 이야기를 재빨리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읽은 채팅에서 조금 내려오자 이미지 하나가 보였다.
그건 세계적인 아이돌이 SNS에 우리 술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이었다.
밑에 수호가 남긴 링크를 타고 들어가자 사람들의 반응도 상당했다.
### : 어멋! 벽향주는 내가 좋아하는 술인데 RJ도 이걸 마시는구나.
ㄴ### : 저도 그런데 한국에서 보라색 라벨은 못 본 것 같아요.
ㄴ### : 유럽에서만 판매한다네요.
### : 프랑스에 사는 지인이 그러는데 저거 한국에서 파는 화이트 라벨의 맛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ㄴ### : 이거 역차별 아닌가요?
ㄴ### : 그런 술은 국내에서 먼저 판매해야지. 왜 수출하는 거야?
### : 와··· 저 프랑스에 사는 교포인데 여러 마트를 다 돌아다녔는데도 이미 다 팔리고 품절이라고 하네요.
ㄴ### : 저도 실패했어요. 직원에게 물어보니 애초에 많이 안 들어왔다고 합니다.
ㄴ### : 지금 마르세유 여행 중인데 운이 좋았는지 간신히 한 병 샀어요.
ㄴ### : 한국에서 구할 수 없다고 해서 프랑스 여행자 커뮤니티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고 있는데 힘드네요.
### : I can't find it.
ㄴ### : Is this only sold in France?
ㄴ### : Je suppose que oui.(그런 것 같아)
ㄴ### : Not really. I saw it being sold in LA a few days ago.
다들 벽향주 퍼플 라벨을 사겠다며 엄청나게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끌루소에 납품한 술이 3만 병밖에 되지 않는다.
미국은 그보다도 훨씬 적어서 만 병도 되지 않았기에 더 구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 구했는지 퍼플 라벨을 샀다는 것을 인증한 이들이 꽤 많았다.
심지어 여행 중인 한국인들은 현지에서 사서 국내로 가져오려는 시도까지 했다.
한정적인 수량인데다가 국내에서는 살 수 없다니 더 간절한 것 같았다.
“와아! 미쳤네···.”
막연하게 상상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게 진짜로 이뤄질지 몰랐다.
내가 한동안 입을 벌리고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화면 너머에서 웃음이 터졌다.
[호세 : 우리도 처음에 믿기지 않았어요.]
[수호 : 내 표정도 저랬을까?]
[황 이사 : 더 하면 더했죠. 일단은 역차별을 거론하는 국내 팬들이 꽤 있어서 기사를 배포할 필요가 있습니다.]
황동선 이사는 벌써 그 부분에 대한 해명을 기사로 작성해서 내게 보내줬다.
그 기사에서는 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 퍼플 라벨은 국내에 팔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비판까지는 아니었다.
괜히 미운털이 박혀봤자 이득보다는 손해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 거는 국내 시장을 버려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글로벌 기업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 쪽 SNS도 게시물을 올려야 하지 않을까요?”
[황 이사 : 당연히 곧바로 올렸습니다.]
그는 캡처한 이미지를 보여줬다.
보라색 배경에 퍼플 라벨 이미지를 넣고 그룹명 등을 해시태그로 걸어놨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로도 적혀 있었다.
[880일 만에 완전체 복귀를 축하합니다. -오저당 일동-]
크게 이번 상황에 대해 어필하지 않고 덤덤하게 축하 인사를 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게 더 좋아 보였다.
괜히 여기서 그들의 인기에 묻어가겠다는 식의 게시물을 올려봐야 역효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좋네요. 라니 실장이 만든 건가요?”
[호세 : 아니요. 어제저녁에 프랑스로 출국하기 위해 서울로 가셨어요. 지금쯤이면 비행기를 타고 계시겠네요.]
“아차··· 그게 오늘이었구나.”
[수호 : 그보다는 뫼리스랑 카를로스에게 연락이 몇 번이나 왔어.]
“나한테도 전화했더라. 퍼플 라벨을 추가로 달라는 거겠지?”
수호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장 보낼 수 있는 술이 없었다.
다음 달에 숙성이 완료되는 퍼플 라벨이 있으나 만 병 단위에 불가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 정도는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수준의 양이었다.
[수호 :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숙성되지 않은 술을 당장 보낼 수도 없잖아. 이미 뻔히 우리 상황 알 테니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어.”
[수호 : 안타깝네. 조금 더 많이 빚어 놓을걸 그랬어.]
“우리가 그러고 싶지 않아서 안 빚었던 것은 아니잖아. 내년 3월까지 기다리라고 해.”
그때쯤이 되면 3층에 올려놓은 옹기에 담긴 벽항주가 숙성을 끝마칠 것이다.
그전까지 우리가 출고 가능한 퍼플 라벨은 정말 극소량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을 누가 예상했겠어.
미래에서 왔다면 가능한 일이겠지.
한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 대신에 잇몸이라고 유럽과 미국 등에서 화이트 라벨의 판매량이 치솟고 있었다.
화이트 라벨이 숙성 기간이 짧아서 퍼플 라벨에 비해 하위 버전이기는 하지만, 어떤 술인지 궁금해서 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더구나 화이트 라벨은 미리 만들어 놓은 재고가 꽤 많았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생산량을 늘려 놓은 덕분에 어느 정도는 대응이 가능했다.
당연히 전 세계적인 주문량을 감당할 수준은 아니었으나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당분간은 화이트 라벨로 버텨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