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신에 잇몸 (2)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퍼플 라벨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이어지자 끌루소와 바크모 그리고 국내 주류 상사 대부분이 화이트 라벨을 대량으로 주문하기 시작했다.
퍼플 라벨과 화이트 라벨.
두 술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지만,
같은 벽향주이기에 진열하는 동시에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새로 접촉하는 곳들도 꽤 다양했다.
끌루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유럽 지역은 물론이고 동남아와 호주 쪽에서도 벽향주를 가져가려 애썼다.
그래서인지 주문량이 엄청났다.
어제 들어온 주문만 합쳐도,
거의 백만 병이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2년 넘게 오저당을 운영하면서 이렇게 많은 주문량이 한 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상식 따위는 잠시 접어놔야 했다.
아무리 벽향주의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늘려왔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주문량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일정을 포기하고 귀국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구지노와 라니에게 했던 약속도 있었고 이번 콘서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술을 언급해준 RJ의 공연이었다.
[그래도 가보셔야죠.]
향이도 귀국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직접 가서 누구보다 열렬하게 응원을 해주는 것이라 의견을 내놨다.
향이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내가 귀국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들어오는 발주에 맞춰서 당장 생산량을 늘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효율적인 분배가 필요하다.
발주가 들어온 곳들 중에 벽향주를 보내줄 우선순위부터 정해야 한다.
나는 이번 기회에 가능한 많은 지역에 우리 술을 공급하길 바랐다.
이렇게 알아서 찾아와주면 고맙지!
우리가 직접 수출하려고 움직였다면 현지 업체를 찾거나 직접 법인을 세워야 했을 텐데 몇 년쯤은 걸릴 일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실적이 나쁘지 않고 믿을 만한 곳이라면 문을 열고 발을 살짝 담가놓는 것이다.
서서히 글로벌 시장에 우리 이름을 알릴 수만 있어도 엄청난 이득이다.
타다다닥.
그런 내 의견을 메일로 보낸 뒤.
나는 프랑스로 출국할 준비를 했다.
이제는 짐 싸는 일 정도는 익숙해져서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짐도 많지 않았다.
몇 벌의 옷과 노트북이 전부였다.
잠시 후에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오자 쌍둥이와 호르헤가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하시는 건가요?”
“저희도 조금 더 빨리 귀국해서 도와야 하는 거 아닌지 걱정되네요.”
“너희가 가서 뭐 하려고. 미디어 부서 그만두고 생산직으로 돌아가려고?”
“그건 아니고요.”
“각자 맡은 일이 다르잖아. 그러니 지금 하고 있는 일에만 집중해.”
사람이 부족하면 더 뽑으면 된다.
멀리 멕시코까지 와서 촬영하고 있는데 그런 기회를 버리고 되돌아갈 정도로 상황이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오저당에 벽향주만 있는 것도 아니고 돈 레오넬도 상당히 중요한 포지션에 있다.
쌍둥이도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기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르헤. 이 친구들 맡길 테니 귀국할 때 멕시코시티까지 잘 부탁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멕시코 쪽으로 화이트 라벨은 어느 정도 배정될지 알 수 있을까요?”
“아직 확정된 거는 없는데 당연히 같은 오저당 소속인 OGD 멕시코가 가장 우선일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벽향주를 미국에서 핸들링하는 것은 OGD USA가 아닌 심양이다. 계약이 만료되는 내년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곳에 물량을 밀어줄 바엔 안 그래도 수출을 준비 중이던 멕시코 시장부터 이번 기회에 뚫는 게 바람직했다.
‘그렇다고 아예 배제할 수도 없지만···.’
카를로스 때문이라도 그럴 수 없다.
오저당의 다른 제품과 긴밀하게 엮여 있는 탓에 성의는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거기까지 이야기 나눈 나는 OGD 멕시코의 직원이 끌고 온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거의 20시간 뒤.
파리 공항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멕시코시티에서 거의 11시간쯤 걸리는 거리라 파김치가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기분은 상당히 좋았다.
여기서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파리는 물론이고 유럽조차 처음이었다.
당연히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일단 공항에서 나온 나는 라니가 잡아 놓은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곧장 라니를 찾을 수 있었다.
녀석은 체크인하는 리셉션 옆에 놓인 소파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 열흘 만에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사이 라니는 꽤 바뀌었다.
평소와 다르게 뭔가 생기가 흘러서 넘치는 것 같았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네. 그렇게 좋냐?”
“당연하지! 내가 이날을 지난 몇 년 동안 기다렸는지 너는 모를 거야.”
“너도 어지간히 똥손인 것 같네. 티켓을 구하는 게 그 정도로 힘들어?”
“직접 해보면 그런 말 나오지 않을걸.”
글쎄다. 내가 그럴 일이 있을까.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리셉션에 다가선 나는 체크인부터 하고 키를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라니가 머무는 바로 옆 방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자연스럽게 라니도 내 뒤를 따라서 들어왔다.
캐리어를 구석으로 밀어 넣고 침대에 걸터앉자 라니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물어봤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나도 멕시코에서 곧장 온 거잖아. 너한테는 연락 안 왔어?”
“전혀! 오죽하면 내가 먼저 전화해서 상황이 어떤지 물어보고 있잖아.”
“휴가잖아. 푹 쉬라고 배려해줬나 보네.”
어차피 라니가 지금 상황에서 그것도 파리에 있으면서 해줄 일은 없었다.
SNS 같은 곳에 올릴 간단한 디자인은 고지효 사원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런 거 걱정할 시간에 RTD 디자인을 먼저 끝내줘.”
“나도 그러고 싶지. 그런데 아직 컨셉 하나만 나왔지 심지어 제품명도 없는데 나 혼자 진도를 뺄 수도 없어.”
“그래 그건 인정. 어쨌든 나머지 일은 수호랑 직원들에게 맡기자. 우리가 여기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잖아.”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왕에 온 거니 즐겨야지 뭐 어쩌겠어.
그리고 뫼리스와 끌루소의 대표도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기에 출장도 겸한 스케줄이었다.
“뫼리스와 약속은 잡아놨지?”
“물론이지. 콘서트 끝난 다음 날 오전에 호텔로 직접 픽업하러 온다고 했어.”
“본사가 이 근처였나?”
“루앙이라고 르아브르 항구 근처에 있어. 여기서 차로 두 시간쯤 걸린다고 하더라.”
그다지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반대로 아주 멀다고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마음이 급한 쪽은 우리가 아니라 끌루소였기에 그 호의는 받기로 했다.
“나 이제 좀 쉬면 안 될까?”
“호호. 그럼 나는 그만 나가볼게. 저녁은 같이 먹을 거지?”
“봐서. 일어나면 전화할게.”
라니가 방을 나간 뒤.
가볍게 씻고 침대로 뛰어들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놀랍게도 다음 날 아침이었다. 거의 14시간 가까이 기절했다는 것이 꽤 놀라웠다.
평소에 길어야 다섯 시간 정도 자나?
오저당에서 일한 뒤로 아무리 길어봐야 일곱 시간은 넘어가지 않았다.
매트리스 때문인지 모른다는 생각에 어느 브랜드 제품인지 살피려 했으나 때마침 라니에게 연락이 왔다.
[와··· 징한 녀석. 이제 일어났냐?]
“응. 혹시 나 때문에 저녁 못 먹었어?”
[내가 그렇게 지고지순한 편은 아니라 미안하다. 구지노 언니랑 같이 먹었어. 일단 옷 챙겨입고 나와.]
“어디 가려고?”
[조식은 챙겨 먹어야지. 그리고 곧장 갈 곳이 있으니 세수 정도는 하고 나와.]
어딜 갈 거냐고 묻기도 전에 전화를 끊겼다. 어차피 잘 만큼 잤기에 나는 대충 씻은 뒤에 나와서 라니 방을 노크했다.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나와서 나를 이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호텔의 조식은 제법 괜찮았다.
비싼 돈을 주고 예약한 보람이 있달까.
잠자리는 크게 가리지 않아서 조금 과한 느낌이 들었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원래 여행객이 많은 파리인데다가 한국에서 온 아이돌의 콘서트가 열리는 탓에 남은 방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곳도 정말 간신히 예약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거 먹고 어딜 갈 생각인데?”
“좋은 곳.”
“오후에 콘서트 보러 가려면 조금 일찍 가서 줄 서고 그래야 하지 않아?”
“우리끼리 왔으면 그래야겠지. 하지만 구지노 언니가 있잖아.”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조식을 가볍게 먹은 뒤에 라니는 우버를 불러 나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녀석과 함께 도착한 곳은 일종의 샵 같은 곳이었고 이미 그곳에서 구지노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만나니 더 반갑네요.”
“호호. 그러게요. 오늘 제대로 즐겨봐요.”
“너도 일단 거기 앉아.”
“나는 왜?”
“할리우드 배우님이랑 동행하는데 후줄근한 모습으로 다닐 수는 없잖아.”
그제야 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건지 이해가 됐다. 한두 차례 거절해봤으나 두 여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덕분에 나는 태백에 있는 미용실 신세에서 벗어나 이탈리아 출신의 바버 손길에 내 머리를 맡겨야만 했다.
거기에 옷은 일종의 보너스였다.
구지노와 라니는 파리에서 쇼핑만 한 건지 내 옷까지 사서 마련해놨다.
“이거 꽤 비싼 브랜드 아닌가요?”
“오저당에서 신세 진 게 많아서 선물로 산 거니 부담 갖진 말아요. 그리고 저번에 주신 벽향주 정말 맛있게 잘 마셨어요.”
“성의니 받아둬.”
구지노에게 준 벽향주는 레어템이다.
현재 전 세계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는 퍼플 라벨보다 1년이나 더 숙성한 술이라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구하지 못한다.
참고로 멕시코에서 이곳까지 오는 사이.
일부 경매장에서 퍼플 라벨이 원래 가격보다 몇 배나 비싼 15만 원에서 20만 원 사이의 가격으로 거래될 정도였다.
퍼플 라벨의 공급량이 한정적이란 사실이 어느 정도 퍼졌기 때문이었다.
거의 한정판과 같은 존재라 그런지 퍼플 라벨은 전설 속의 동물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보여요.]
전문가의 손길은 역시 다른 걸까.
샵에서 나오는 나와 라니 그리고 구지노의 모습을 보고 향이는 신기하다는 듯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차를 타고 곧장 콘서트가 열리는 파리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이미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입장을 하기 위해 서 있는 줄도 엄청나게 길었는데 우리는 구지노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스타디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앞줄에 잡혀 있는 VIP 구역은 구지노 같은 연예인을 위해 구분되어 있었다.
“와아! 구지노 배우다.”
“언니 사인 좀 부탁드릴게요.”
“여기 좀 한 번 봐주세요!”
확실히 유럽권에서 느껴지는 구지노의 인지도는 한국과 차원이 달랐다.
오저당에서 몸빼 바지를 입고 농사일을 돕던 모습과 매칭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그래서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당히 다양한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유럽에서 꽤 유명한 가수와 배우도 있었는데 다들 내가 퍼플 라벨을 빚은 양조장의 오너라니 꽤 반겼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들 역시 RJ가 올린 SNS를 보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 술을 구하려 애썼다.
하지만 정작 퍼플 라벨을 구한 이는 전혀 없었다.
“혹시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맞아요. 아무리 찾아봐도 구할 방법이 없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저도 이렇게 많이 팔릴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한정판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다행히 그런 담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본격적인 무대가 시작된 덕분이었다.
첫 곡부터 시작해서 구지노와 라니는 방방 뛰며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그건 나도 다르지 않았다.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듣다 보면 대부분 다 아는 노래였다.
하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라니 덕분에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물론이고 술을 마실 때도 항상 BGM처럼 깔아 놓고 있었으니 당연한 거겠지.
더구나 분위기가 남달랐다.
공연을 자주 가보진 않았지만,
유독 이번 공연은 더 열광적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일곱 명의 아이돌은 성실하게 보답을 해줬다.
그래서인지 콘서트는 순식간에 끝난 느낌이 들었는데 몸이 너덜너덜했다.
나를 비롯해 다들 목이 살짝 맛이 갔고 라니는 응원봉을 하도 흔들어서 팔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직접 와보니 어때?”
내가 소감을 물어보자,
두 여인은 환하게 웃었다.
아직 여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영원히 오늘을 잊지 못할 거야.”
“나도 마찬가지예요.”
구지노의 매니저와 함께 두 여인을 에스코트하며 밖으로 나왔다.
차에 올라타며 스마트폰을 켜자 카톡이 울렸다. 수호가 보낸 것인데 거기에는 예상치 못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수호 : RJ가 우리 술을 검색하다가 구지노 배우랑 찍은 영상을 봤나 봐. 월드 투어 끝나면 오저당에 와서 술 빚는 거 체험해봐도 되냐고 DM을 보내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