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신에 잇몸 (3)
이건 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네.
하루에 한 번씩 뭔가 일이 터졌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구지노 배우와 콜라보를 마친 뒤.
은근히 우리 오저당과 콜라보를 하거나 촬영하고 싶어 하는 곳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에는 아이돌도 있었고 심지어 TV 프로그램도 있었다.
오저당에서 술을 빚는 과정을 리얼리티 쇼 형식으로 찍고 싶다는 제안서가 들어와서 황 이사가 검토 중이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저당은 일반 양조장과 다르다.
일단 밖에서 보이는 풍경부터 수목원 아니면 테마파크 비슷한 느낌이었다.
어떻게 찍어도 화면에 예쁘게 잘 나오니 탐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것은 수호 덕분이다.
녀석이 2년 동안 개인 시간을 쪼개가며 꾸며 놓은 것이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한 가지 더하자면 라니가 오풍리 입구부터 양조장까지 그려놓은 요정 벽화도 꽤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잠시 스마트폰을 보고 있자,
라니가 다가와서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수호에게 받은 카톡을 그 자리에서 보여주진 않았다.
옆에 구지노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일을 떠벌리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구지노라도 이런 것까지 공유하긴 힘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구지노면 이해하겠지.’
일이 진행되기 전에 소문 먼저 퍼지면 중간에 무산되는 일이 허다하다고 했다.
광고 쪽에서 연예인과 함께 일해봤던 황 이사가 해줬던 말이니 그의 조언은 가능하면 따라야겠지.
그날 구지노와 가볍게 식사를 마친 뒤.
호텔로 돌아온 뒤에야 그 소식을 라니에게 전달해줬다. 녀석의 반응은 뻔했기에 입을 막을 준비부터 했다.
고라니의 비명이 호텔 방에서 울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다행히 시기적절하게 방어에 성공한 나는 축축한 손을 털어냈다.
“정말 RJ가 오저당에 온다고?”
“아직 확실한 거는 아니야. 그쪽 요청 사항부터 확인해봐야지.”
“오저당에서 일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아직 라니가 원래 일했던 그리고 현재 어머니가 일하고 계신 회사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성장 속도는 엄청났다.
그리고 지금은 글로벌 주류 회사로 향하는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순간이다.
“그런데 혹시 모르니 계정 사칭이 아닌지 확인이 필요해.”
은근히 사칭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나도 조금 의심되었기에 수호에게 연락을 했다. 지금쯤이면 한국은 새벽 5시 30분쯤이라 내일 연락하자고 해도 라니의 마음은 급해 보였다.
다행히 수호는 전화를 받았다.
알고 보니 오늘은 녀석이 새벽에 일어나 오풍주를 체크하는 날인 것 같았다.
호세가 오풍주 담당이긴 했으나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서 관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직원들끼리 한 명씩 돌아가며 당직처럼 술을 관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와··· 나쁜 놈. 이 새벽에 전화를 거냐.]
“폭탄을 던져 놓고 잠이 오냐?”
“아까 보낸 카톡 진짜야? 혹시 사칭하는 계정 같은 거는 아니지?”
[공식 계정 마크 확인했어. 너네 들어올 때까지 시간 벌려고 검토 후에 연락준다고 했으니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해.]
통화는 그걸로 끝났다.
수호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시간을 더 빼앗는 것은 어려웠다.
“당연히 승낙할 거지?”
라나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다른 조건이 없었다면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려웠다.
이번 기회에 RJ를 생각하면 우리 퍼플 라벨이 떠오르게 만드는 것도 좋겠지.
그게 가능해진다면 대박이다.
이미 그런 연결 고리는 시작되었다.
오늘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적었더니 자연스럽게 오저당에서 빚은 퍼플 라벨도 연관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다.
여기서 RJ가 오저당에 온다면 공짜로 광고를 찍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작년만 하더라도 그가 속한 그룹에서 한해 광고비로 벌어들인 돈만 천억이 넘어간다고 했다.
‘RJ가 우리 오저당의 커트 코베인이 되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일부 아티스트의 경우에는 특정 브랜드 위스키를 무척 애정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잭 다니엘스하면 자연스럽게 커트 코베인과 지미 페이지가 연상된다.
전해지는 이야기만 들어보면 옛날에 활동하던 대부분의 락 스타들은 술을 물처럼 마셨던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들처럼 알코올 중독자 수준으로 마셔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원래 RJ가 막걸리나 전통주 같은 술을 좋아했나?”
내 질문에 라니는 그렇다며 끄덕였다.
과거에 라이브 방송을 할 때도 다른 멤버는 위스키와 와인을 마시는데 유독 RJ만 동동주와 전통주를 마셨다고 했다.
하긴 그러니 직접 와보겠다고 먼저 DM을 보냈겠지.
“내가 알기로는 월드 투어가 이제 막 시작한 거라고 하던데 언제 끝나?”
“적어도 반년 정도는 걸릴 거야.”
“허얼! 엄청 길게 하네.”
“올해 잡힌 스케줄만 11개국이라고 했어. 한 번 이동할 때마다 보름씩만 잡아도 그 정도 되잖아.”
지금으로부터 6개월이라···.
아무리 빨라야 RJ가 오저당에 오는 것은 가을을 넘어 겨울쯤 될 거란 의미였다.
역시 월드 클래스라 그런지 스케줄도 꽤 빡빡하게 느껴졌다.
잠시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그쯤에서 라니를 내보냈다. 콘서트에서 흘린 땀으로 젖어 너무 찜찜했다.
그리고 녀석의 텐션에 맞춰주면 쉽게 잠들지 못할 것이 뻔했다.
실제로 그다음 날 아침.
라니는 폐인 수준으로 나타났다.
조식을 먹으러 나타난 녀석은 다크 서클이 짙었는데 밤사이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오늘 미팅은 나 혼자 가도 되니까 너는 그냥 호텔에서 눈 좀 붙여.”
“아냐. 너만 일하러 보내놓고 호텔에서 뒹굴거리고 있으면 편하겠냐?”
“어차피 너 지금 휴가 중이야.”
“아차···! 또 까먹었다.”
하지만 라니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조식을 먹고 다시 방에 들어갔다가 나온 라니는 어떤 마법을 쓴 건지 멀쩡해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호텔 앞에 도착했다는 뫼리스의 전화가 왔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밖으로 나가자 프랑스의 자동차 브래드인 시트로엥을 타고 있는 뫼리스가 보였다.
붐비는 호텔 앞에 오래 차를 대놓을 수 없기에 우리는 곧장 차에 올라탔다.
“파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뫼리스도 잘 지내셨죠?”
“물론이죠. 어제 공연은 잘 보셨나요?”
뫼리스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라니에게 물었다. 평소 자주 통화하는 터라 녀석이 왜 프랑스에 왔는지는 알고 있었다.
“꿈 같은 하루였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낭만의 도시라 불리는 파리에서 열린 콘서트라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본사까지는 두 시간쯤 걸릴 테니 피곤하시면 잠시 눈을 붙이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천천히 출발했다.
파리의 시내는 혼잡했는데 다행히 우리 숙소는 파리 중심에 있지 않았다.
그 덕분에 베르사유를 거쳐서 센 강을 따라 놓인 A13 고속도로 위로 쉽게 올라탔다.
파리는 생각보다 넓지 않다.
런던의 1/13밖에 안 되고 서울과 비교해도 1/6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의 풍경은 숲으로 금방 바뀌었다.
“갑자기 벽향주 판매량이 급증해서 며칠 동안 정말 정신이 없었습니다.”
“저희도 깜짝 놀랐어요. 퍼플 라벨은 품절되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이만 병 정도를 시중에 뿌려놓고 온라인 용으로 만 병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반나절도 안 돼서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고 했다.
라니는 왜 그런지 이유를 설명했다.
“보라색 라벨인 것도 영향이 컸죠.”
열렬한 팬이기에 팬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의 말이라 그게 정답 같기는 했다.
“화이트 라벨 수량도 다 떨어졌죠?”
“네. 마지막으로 발주한 양이 제법 많아서 다음 주문까지 몇 개월 정도는 걸릴 줄 알았는데 예측이 깨졌네요.”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경영에서 예측은 정말 쉽지 않다.
언제 어떤 이슈가 생길지 모를 일이다.
그나마 나쁜 일이 생겨서 매출이 폭락한 것은 아니기에 다행이라 여겨야지.
하지만 일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어차피 끌루소의 사장인 아르노 오다르와 만나면 나눌 이야기였다.
가능하면 끌루소에게 좋은 결과물을 줄 생각이었다.
오저당이 막 기지개를 켤 때.
가장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민 곳이다.
그들이 선주문을 하지 않았다면 퍼플 라벨을 빚을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
그들이 줬던 25만 유로가 없었다면 적어도 몇 개월은 생산이 밀렸을 테니 유럽 수출도 늦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프랑스에서 RJ가 퍼플 라벨을 발견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소름인걸.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이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딱딱 들어맞는 상황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인생에 세 번밖에 없는 기회 중의 하나인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나자.
마침내 우리가 탄 차는 끌루소의 본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애초에 온라인 판매를 목표로 만든 회사가 그런가 생각보다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끌루소에 소속된 대부분의 직원은 여기가 아니라 항구 부근에 마련된 물류 창고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뫼리스의 설명을 들으며 들어서자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의 남성이 우리를 향해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누군지 소개를 해주지 않아도 그의 정체는 쉽게 추측 가능했다.
“반갑습니다. 끌루소의 오너인 아르노 오다르라고 합니다.”
“오저당에서 온 주도찬입니다.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닿았군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오다르는 우릴 안으로 안내했다.
가볍게 회사 곳곳을 소개하며 회의실에 들어서자 그는 직접 차를 내려주었다.
잠시 서로 덕담을 해주며 이야기를 나눴으나 마음이 급했는지 오래 지나지 않아 본론으로 곧장 들어갔다.
“퍼플 라벨을 추가 주문하고 싶습니다.”
“뫼리스한테도 말했지만, 내년 3월까지 나올 수 있는 수량은 많지 않습니다.”
“혹시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제안드릴 수 있는 수량은 3천 병도 안 됩니다.”
전체적인 수량은 그보다 많지만,
끌루소에 보낼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다.
그나마 내수 시장에서는 팔 수 없는 제품이지만, 미국과 멕시코 등에도 물량을 배정해야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오다르는 상당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작년에 선주문할 때 수량을 확보했어야 했는데 조금 후회되는군요.”
“당시에는 공간이 안 나와서 어차피 그 정도가 한계였습니다.”
“말씀하셨던 내년 3월에 나오는 퍼플 라벨의 물량은 어느 정도 됩니까?”
“23만 병 정도는 됩니다.”
숙성 창고와 신축 창고의 3층까지.
모든 옹기에서 숙성되고 있는 벽향주를 합치면 적어도 그 정도는 나온다.
문제는 그 이후에 다시 일 년 동안은 퍼플 라벨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숙성이 필요한 술의 숙명이다.
그나마 우리는 숙성 기간이 짧아서 다행이지 대부분의 증류소는 원액이 부족해지면 답이 나오지 않을 정도다.
최소 몇 년에서 길게는 십여 년까지.
조합이 복잡해질수록 원액을 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이쪽 산업의 단점이다.
그래서 대형 주류 업체의 경우에는 산하에 거느린 원액을 빚는 증류소를 관리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오다르와 뫼리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혹시 그때 나오는 23만 병의 퍼플 라벨 모두 끌루소에서 살 수 있을까요?”
기존에 끌루소가 선주문했을 당시에 50만 유로에 3만 병을 확보했었다.
23만 병을 대충 계산해보면 370만 유로(약 50억 원)나 되는 제법 큰 거래다.
하지만 내 대답은 ‘No’였다.
아무리 끌루소라고 해도 무리였다.
아마 그렇게 독점 형식으로 밀어주면 카를로스를 비롯해 미쳐서 날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요?”
“7만 병에서 10만 병 정도 선주문하시는 것이 한계일 것 같습니다.”
그 정도까진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다르는 실망하지 않았다.
아직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느낀 것인지 그는 몇 가지의 거래 조건을 덧붙였다.
당연히 그중에는 추가 숙성을 하기로 결정한 소담도 포함되어 있었다.
“혹시 저번처럼 추가 숙성하는 소담을 우리가 선주문하면 퍼플 라벨을 조금 더 확보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