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AP (1)
4개월이란 시간이 흐른 뒤.
오저당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됐다.
누군가는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규모였다.
오풍리를 지나 오저당 부근에 도달하면 가장 먼저 3층 건물 네 채가 보였다.
각각의 건물은 가장 오래된 오저당과 한옥 그리고 단층 숙성 창고를 중심에 두고 퍼져 있었다.
건물 간의 거리는 50m쯤 되려나.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진 않았다.
오저당과 인접한 땅을 사들인 덕분에 가능한 배치였는데 면적만 보면 처음 물려받은 당시보다 세 배쯤은 커졌다.
꽤 큰 돈을 투자한 보람이 있었다.
오저당의 외형이 커진 만큼이나 술을 빚는 역량 역시도 상승할 수 있었다.
조택훈 공장장이 장담했듯이 백만 병에 달하는 화이트 라벨의 생산량은 현실이 되었다.
“와! 이거 오늘 내에 끝낼 수 있을까?”
수호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3층 창고 한 채에 가득 채워져 있던 화이트 라벨이 출고되기 시작하며 엄청나게 많은 화물차가 밀려들었다.
그 차들의 목적지도 다양했다.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멕시코로 가는 화이트 라벨은 부산항으로 가야 했고 현송 같은 국내 주류 상사의 차들도 많았다.
이제는 공식적인 연인이 된 호세와 강진희 사원이 지게차를 몰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졌을 정도였다.
그나마 지게차 운전 경험이 있는 직원이 추가로 고용되어서 다행이었다.
“오늘 중에 어떻게든 끝내야지. 내일도 나갈 물량이 상당히 많아.”
“다음에는 술을 좀 나눠서 빚자.”
“그때는 어쩔 수 없었잖아.”
창고가 완공된 다음 날부터.
모든 직원이 생산에 뛰어들었다.
사무직도 독촉에 시달릴 바에는 차라리 술을 빚는 것을 도와서 하루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그만큼 퍼플 라벨과 화이트 라벨을 찾는 곳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RJ에게 고마워서 소속사 쪽으로 퍼플 라벨 두 박스를 보내줬더니 그걸 또 SNS에 올려줬다.
“문제는 화이트 라벨을 내보낸 뒤에도 할 일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지.”
“내일모레부터는 ‘ASAP’ 나가지?”
“응. 그나마 그거는 아직 주문량이 많지 않아서 금방 끝나기는 할 거야.”
여기서 말하는 ‘ASAP’은 유나 누나가 레시피를 만들어준 RTD 브랜드다.
몇 년 전에 발표된 아이돌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ASAP은 ‘As soon as possible(최대한 빨리)’을 줄인 말이다.
그 의미가 RTD와 딱 들어맞았다.
RTD 자체가 다른 과정 없이 곧장 마신다는 의미를 가진 음료잖아.
이번에도 사내 공모전을 통해 제품명을 수집했는데 ASAP이란 이름을 제출한 것은 심태섭 대리였다.
역시 마케팅 부서답달까.
와이프인 류미진 대리가 제시한 이름도 최종 후보까지 올라왔는데 만장일치로 심 대리의 ASAP으로 결정되었다.
해외에서도 통할 거란 이유가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라벨도 조금 특별했다.
이번 작업은 라니가 주도하지 않았다.
녀석 밑에서 일하는 고지효 사원에게도 기회를 줘보기로 했는데 팝아트 같은 톡톡 튀는 디자인으로 라벨을 만들었다.
“ASAP가 잘 팔려야 할 텐데···.”
“이제 막 나왔잖아. 시간이 걸릴 거야.”
“2개월쯤 빨리 나왔으면 여름에 매출을 제법 올렸을 거란 생각이 자주 드니 그렇지.”
“그래도 대형 마트에 입점하는 데 성공했으니 조금 더 두고 보자고.”
“확실히 거기에 술을 넣으니 판매량이 제법 많이 나오기는 하는 것 같아.”
여름 무렵부터 오저당의 술도 국내의 대형 마트에서 판매가 시작되었다.
RJ가 우리 술을 언급하기 전부터 협상을 하고 있었으나 프랑스를 다녀온 후에 급물살을 탄 케이스였다.
그 덕분에 전국에서 우리 오저당의 술을 훨씬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대형 마트만 130여 개가 넘어갈뿐더러 6천여 곳에 달하는 24시간 편의점에서도 오저당의 모든 술을 판매 중이었다.
대충 계산해 봤을 때.
그 경로를 통해 파는 물량만 우리 전체 매출의 20% 정도는 차지하고 있었다.
대형 마트 덕분에 그만큼 판매량이 늘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당연히 순수익도 대폭 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번에 나가는 화이트 라벨만 계산해봐도 매출이 120억쯤 되고 거기서 35억 정도는 수익이다.
인건비와 재료비 등을 빼면 순수익은 그보다 훨씬 줄어드나 이미 창고 한 채 정도의 건축비는 뽑았다.
발주와 동시에 입금되는 돈을 보면 투자한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기사님! 그렇게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차 빼세요.”
별안간 수호는 목청 높여 소리쳤다.
녀석이 바라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화물차 한 대가 머리를 디밀고 있었다.
아마 오저당에 처음 오는 기사님 같았다.
이번에 창고를 지으며 남은 공간을 회전 교차로처럼 만들어 놨는데 저러면 뒤에 기다리고 있는 차까지 다 막혔다.
더구나 뒤에서 대기 중인 기사님들까지 경적을 울려대니 엄청 혼잡했다.
[어휴··· 정신없네요.]
향이가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벽향주를 마신 건지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녀석을 뒤따라 묘한 복장의 요정 하나가 따라왔으나 감히 향이의 옆에 앉지는 못했다.
그 녀석의 복장을 보면 이해될 거다.
전형적인 내시 복장을 한 묘하게 생긴 요정은 자세마저 다소 구부정했으며 향이 곁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오저당의 생산량과 요정의 숫자는 항상 비례해서 늘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대폭 생산량이 늘어나며 드디어 향이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아직 옷차림은 그대로였으나,
기존에 비해 덩치가 상당히 커졌다.
거의 여자 주먹 크기가 되었기에 이제는 까치와 같은 새들과 맞짱을 떠도 이길 것 같았다.
당연히 요정의 숫자도 늘어났다.
며칠 전에 화이트 라벨의 숙성 과정이 완료되는 순간에 거의 수천에 달하는 요정이 오저당에 추가되었다.
이번에 생긴 중급 요정만 스물이 넘어갈 정도였다.
내시 요정도 그때 나타났다.
하지만 이 요정은 중급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체격이 달라 보여서 향이에게 물으니 기존의 중급과는 다른 존재이니 상급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했다.
“저 친구 이름은 정했어?”
[아직 마땅한 게 없어서 고민하는 중이에요.]
“그냥 내가 지어줄까?”
벌써 며칠째 향이는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도 작명 실력은 별로이나 조금이나마 도움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향이는 내 제안을 거절했다.
첫 상급 요정이니 자신이 직접 결정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름을 붙이냐고?
계속 내시라고 부르기는 조금 그렇잖아.
어감도 좋지 않고 실수로 몇 번 그렇게 불렀는데 그때마다 째려 보는 것이 정말 싫어하는 눈치였다.
‘하긴 나라도 싫겠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상급 요정은 확실히 다른 요정과 달랐다.
기존까지 나타났던 요정은 중급이라도 술을 빚는 장소에서 긴 시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조금 달랐다.
절대 향이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태백이나 삼척 시내에 나갈 때도 프로 수발러라도 된 것처럼 쫓아다녀서 은근히 향이가 귀찮아할 정도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이 향이를 따라다니고 향이는 나와 떨어지지 않으니 나를 중심으로 맴도는 인공위성 하나가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아무리 떼어놓으려 해도 그런 지시는 듣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껌딱지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네요.]
향이가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어쨌든 그게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잠시 화이트 라벨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가장 먼저 지어졌던 단층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도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
과거 퍼플 라벨을 숙성하던 창고에서 이제는 누룩을 빚는 장소로 바뀌었다.
100평이나 되는 곳에서 빚어지는 누룩의 양은 이제 거의 공장 수준이었다.
작업에 투입된 인원만 여섯 명이다.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탓에 인력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야 했다.
그나마 누룩과 관련된 중급 요정이 몇이나 늘었기에 그 정도였다.
내가 입구에서 내부를 살펴보고 있자 누룩을 담당하는 최광수 반장이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오풍리 출신으로 두 달 전에 다시 고향에 돌아와 오저당에 취직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과거에 오저당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는 것이다.
작은할아버지와 선생님과 함께 1년 정도 일했다고 하는데 누룩을 띄울 줄 알기에 아예 이쪽 파트를 통째로 맡겼다.
“시키실 일이 있으신 건가요?”
“아니요. 그냥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린 겁니다. 일은 잘 되고 계신가요?”
“물론이죠. 이상하게 옛날보다 누룩을 띄우는 일이 쉬워진 것 같아요.”
방법만 알면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면 모를까 어차피 요정들이 있기에 누룩이 잘못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었다.
그래도 그의 역할은 꽤 중요했다.
누룩이 충분하게 만들어지지 않으면 모든 생산이 중단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빚는 술에서 누룩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없다.
더구나 백만 병에 달하는 화이트 라벨을 비롯해 전체적인 생산량이 늘어났다.
그 생산량에 맞추려면 최광수 반장과 누룩을 빚는 이들이 정말 하루도 쉬지 않고 만들어야 할 정도다.
“일하시는 데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유수호 이사에게 말씀해주세요.”
“아직은 괜찮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쇼.”
그쯤에서 나는 발길을 돌렸다.
기왕에 돌아보기 시작했으니 다른 곳도 모두 살펴볼 생각이었다. 요즘 들어 외부 활동이 많아져서 예전처럼 매일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
지난달에는 미국 출장도 다녀왔다.
O&D의 도니에게 맡겼던 버번 증류소 설계도가 거의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설계도를 바탕으로 3D로 만든 이미지를 오스카가 보내주긴 했으나 아무래도 직접 가서 보는 게 더 정확했다.
더구나 OGD 멕시코도 두 달 전에 증축 과정을 마친 상태였다.
그 덕분에 OGD USA도 꽤 바빠졌다.
지난달부터는 돈 레오넬의 수입량이 매달 20만 병에 달할 정도로 꽤 늘었다.
기존에 수입하던 것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이제는 조금 무서울 정도네.’
멕시코와 미국 그리고 한국까지.
오저당의 모든 법인을 합치면 이번 달만 대략 40억 정도의 순수익을 올렸다.
다음 달에는 화이트 라벨이 이 정도까지 팔릴 거라 생각되진 않으나 그래도 최소 30억 정도는 찍을 것 같았다.
반년 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였다.
확실히 규모가 커지니 비용 절감이 되는 부분도 생겼고 그중에서 1/3 정도는 돈 레오넬일 정도로 멕시코의 비중이 컸다.
하지만 OGD USA를 무시할 수는 없다.
끌루소가 오저당의 술을 유럽 지역에서 판매 중이나 미국이 그걸 뛰어넘었다.
돈 레오넬은 물론이고 소담과 벽향주의 판매량도 상당한 덕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미국 법인은 수출입과 유통에 특화된 형태로 발전 중이다.
버번 증류소가 생산을 시작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슬슬 사무실을 향해 걸어갈 무렵.
멀리서 달려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올해 여름에 경력직으로 스카우트한 지석태 과장이었다. 그의 업무는 주로 해외에서 들어오는 발주 관리였다.
그는 언어 천재에 가까웠다.
영어와 스페인어 심지어 프랑스어까지.
내가 알기로는 5개 국어 이상은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내 앞에 멈추더니 방금 들어온 소식을 알려줬다.
“사장님, ASAP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소담과 달리 ASAP은 아직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해외에서 들어오는 ASAP 주문은 내게도 공유해달라고 지석태 과장에 부탁했었다.
하지만 그리 큰 기대는 없었다.
ASAP을 주문하는 이들은 대부분 수천병에서 많아야 만 병 이내였다.
아직 어느 나라에서도 그 이상의 주문이 들어온 적은 없었다.
“어디서 들어온 건가요?”
“태국에서 온 주문입니다.”
“태국이 확실해요?”
조금 의외의 지역이었다.
얼마 전에 현지 주류 상사와 계약해서 오저당의 술을 보낸 적이 있었으나 그들의 관심은 화이트 라벨에 있었다.
나머지는 그냥 끼워넣기에 가까웠다.
그들에게 배정된 화이트 라벨은 2만 병에 불과했기에 남는 컨테이너 자리에 소담과 ASAP를 채워서 가져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화이트 라벨을 추가 주문하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ASAP을 주문한다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네, 태국의 람파오 상사에서 ASAP만 15만 병을 주문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