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80화 (180/254)

ASAP (2)

그와 같은 시각 태국의 파타야.

풀빌라 파티가 유명한 파타야는 유흥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낮에 보이는 파타야 풍경은 진짜라고 볼 수 없었다.

이곳의 진면목은 밤이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부터.

달이 높게 떠오르는 늦은 밤까지.

사람들은 파티를 즐기며 온갖 술을 물처럼 들이부으며 놀기에 하루에 소비되는 술의 양도 엄청났다.

괜히 아세안 최대 주류 소비국이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그런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노력 중이나 쉽지 않았다.

여성층의 음주 비율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고 외국 여행객도 엄청났다.

당연히 주류 유통을 하는 기업 간의 경쟁도 나날이 치열해지고 있었다.

현재 태국의 주류 상사를 대표하는 람파오와 시암은 양대 산맥이라고 봐도 되었다.

그들의 영향력은 상당히 컸다.

태국은 물론이고 인접해 있는 아세안 나라에도 유통 업체를 세워서 전체적인 주류 트렌드를 좌지우지했다.

그런 두 곳이 최근 파타야의 주도권을 두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야!”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시암 녀석들이 파타야 지역의 아차(ARCHA) 맥주 독점권을 따는 것은 막았어야지!”

람파오의 대표인 나뎃 수파랏.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해 크리스탈 재질의 재떨이를 던질 기세로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손을 뗐다.

여기서 분풀이를 해봤자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차 맥주는 태국을 대표하는 맥주인 싱하나 리오보다 판매량은 작으나 아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지역 전체에 독점권이 발생하면 저울이 기울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식으로 사라진 주류 상사를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역시 그런 딜을 통해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지금까지 당하는 쪽을 보고 비웃었으나 막상 반대 입장이 되니 열불이 났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손을 뻗으면 태국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그런데 그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혹시 모르니 다른 브랜드도 잘 살펴. 또 한 번 뒤통수 맞으면 그 자리에서 일하는 것은 포기해야 할 거야.”

방심하다가 한 번은 당할 수 있지만,

다시 당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아직 방콕은 람파오의 위상이 더 높다는 것이다.

파타야 지역을 책임지는 지점장 아피반랫을 노려본 수파랏은 매출이 정리된 보고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팬데믹이 끝난 이후에 불황 때문에 고생하던 시기는 지나갔다.

매달 수익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상당히 빠른 속도였기에 그것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내역을 한동안 살피던 그는 한 가지 수치가 눈에 걸렸다.

“이건 뭔데 들어오자마자 다 나간 거지?”

“잠시만요. 아··· 그거 한국의 OGD에서 벽향주라는 술과 함께 들어온 겁니다.”

“그건 나도 아는데 왜 이렇게 빨리 소진된 거야?”

수파랏이 벽향주를 모를 리가 없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많은 한국의 아이돌 멤버가 언급한 이후에 없어서 못 구하던 술이라 본사 차원에서 꽤 공을 들였다.

거의 2개월 넘게 애를 쓴 덕분에 경쟁 업체인 시암보다 더 빨리 오저당에서 화이트 라벨을 받아올 수 있었다.

그때 들어온 술은 백화점과 상류층이 드나드는 곳에 대부분 납품되었다.

한국의 권장 소비자가에 비해 거의 두 배 이상의 금액을 붙여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딸려 들어온 소주와 RTD는 파타야에 보냈다.

애초에 그쪽에는 큰 기대가 없었다.

화이트 라벨을 들여오기 위한 미끼였다.

다양한 오저당의 술을 사들이면 순번이 빨라질 거란 예상은 들어맞았다.

더구나 컨테이너의 공간을 채우기 위한 목적도 있기에 소담보다는 더 저렴한 ASAP이라 불리는 RTD 제품으로 채웠다.

아무래도 소담보단 그쪽이 더 판매량 수월할 거란 계산도 있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너무 빨리 팔렸다.

혹시 프로모션을 과하게 걸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하지만 아피반랫 지점장은 아니라고 했다.

“애초에 양도 많지 않았지만, 은근히 바에서 많이 팔렸습니다.”

“이제 막 출시된 거라 처음 보는 술일 텐데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한국에서 수입한 술이라고 적어 놓으니 호기심에 사는 이들도 많았고 무엇보다 맛이 좋아서 벌써 마니아도 생겼습니다.”

하긴 한국에서 온 거라면 잘 팔리는 세상이었다. 요즘 마트 같은 곳에만 가도 한국 제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람파오에서 취급하는 한국 특유의 녹색 병에 담긴 소주도 이제는 적지 않은 판매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과일소주 같은 경우.

정말 많은 이들이 찾을 정도였다.

심지어 수년 전에는 동남아 시장에서 짝퉁 소주가 나타나 판을 칠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될 수 없지.”

과연 그 이유가 전부일까.

한국산이라고 다 똑같지는 않다.

그런 식으로 해결될 문제라면 애써 돈을 써가며 마케팅을 할 이유가 없었다.

아피반랫 지점장은 거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덧붙였다.

“한국산인 것도 있지만, 여성층에서 선호하는 RTD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거기에 RJ 사진을 크게 붙여 놓으니 며칠 안 돼서 품절되던데요.”

“뜬금없이 왜 그 사진을 붙여?”

“ASAP에 벽향주 화이트 라벨도 소량 들어간다고 OGD에서 보내온 판촉 자료에서 확인했으니까요.”

아피반랫은 자신의 전략을 공유하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으스댔다.

그 모습이 꽤 아니꼽게 느껴졌으나 수파랏은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잘한 거는 칭찬을 해줘야지.

여기서 또 트집을 잡으면 안 된다.

수파랏은 잘했다는 말을 짧게 해주고 뒷장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발주 요청서가 보였는데 할 말을 잃었다.

“ASAP을 15만 병이나 주문하자고?”

할 말을 잃은 그는 다시 재떨이를 향해 움직이는 손을 간신히 제어했다.

15만 병이면 30만 달러 이상이나 되는 거래인데다가 어지간히 검증이 된 제품의 한 분기 주문량과 맞먹는 수준이다.

“어떻게든 제가 팔아보겠습니다.”

“이게 의지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잖아.”

“제 자리를 걸고 석 달 이내에 파타야에서 다 팔아보겠습니다.”

“15만 병 전부를?”

너무 무모한 객기처럼 보였다.

아무리 RTD가 저알코올이고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몇 병씩 마실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맥주라는 철옹성이 있다.

태국은 더운 날씨라 맥주에도 얼음을 넣어 마시는 나라다. 과연 ASAP가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아피반랫은 결연한 표정으로 조건을 걸었다.

“만약에 다 팔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원하는 게 뭔데?”

“ASAP로 유의미한 성과를 내면 지사장 자리를 기대해봐도 되겠습니까?”

“방콕을 안 거치고 곧장 지사장으로 가겠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어지간한 성과로는 안 될 일이다.

그가 말한 대로 된다면 누구보다 기뻐할 사람이 바로 수파랏이었다.

확실한 게임 체인저가 필요하긴 했다.

경쟁 회사인 시암과 비교하면 서로가 가진 패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유통하는 술도 거의 비슷한 상태였다.

여기서 경쟁자에게 크게 한 방 먹이고 아래로 밀어낼 수만 있다면 어떤 자리인들 못 주겠는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물론입니다. 현장 반응을 봐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됩니다.”

“좋아! 이대로 발주 넣어. 그 대신에 약속했던 석 달 동안 얼마나 판매하는지 주의 깊게 지켜보겠어.”

수파랏은 아피반랫을 믿기로 했다.

15만 병이 적은 수는 아니나 유통 라인을 통해 각종 파티 등에 밀어 넣으면 소화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잠시 후에 수파랏이 나가자.

아피반랫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음에도 그의 셔츠는 온통 젖어 있었다.

그만큼 긴장했던 것 같았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랄까.

하지만 언젠가는 꼭 거쳐야 할 일이다.

은근히 아피반랫의 포부는 상당히 컸다.

이 망할 회사에서 독립해서 자신만의 회사를 세우려면 조금 더 올라가야 한다.

적어도 중심축에 접근해야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니 어쩔 수 없었다.

타악.

잠시 앉아 있던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냉동실을 열어 얼음을 꺼냈다.

그리고 그걸 곧장 얼음 가는 기계에 넣은 뒤에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하얀 눈송이 같은 얼음이 그릇 위로 소복하게 쌓였다.

남들이 보면 빙수를 먹으려고 하는 건가 싶겠지만, 그가 만들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그가 냉장고에서 꺼낸 것은 ASAP였다.

“하아··· 이게 마지막인가.”

하이볼 잔에 따른 ASAP.

그 위에 소복하게 올린 하얀 얼음.

마지막으로 라임을 하나 짜서 넣으니 누가 봐도 훌륭한 칵테일이 되어 있었다.

아피반랫은 그걸 천천히 음미했다.

그건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재확인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답이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마신 뒤.

그는 곧장 직원을 불러서 발주서를 건네며 본사에 발주를 넣으라고 시켰다.

직원은 거기에 적힌 숫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이대로 발주하면 되는 건가요?”

“사장님이 승인해주시고 가셨어. 본사에도 그렇게 말해둬.”

“알겠습니다. 당장 전달하겠습니다.”

직원이 발주서를 가지고 나가려고 하자 잠시 멈춰 세운 아피반랫은 일정부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거 발주 넣으면 언제쯤 도착할까?”

무엇보다 그게 궁금했다.

여행 성수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받고 싶은데 얼마나 걸릴지 체크가 필요했다.

“한국에서 오는 거는 항해 기간만 열흘쯤 걸리니 아무리 빨리 통관이 진행돼도 20일 이상은 잡아야 합니다.”

*

태국에서 ASAP 발주가 들어온 뒤.

오저당에서 항구로 향하는 화물차가 출발하는 데까지 이틀도 안 걸렸다.

애초에 가지고 있던 재고도 꽤 되었고 생산량도 작은 편은 아니었다.

ASAP 설비를 풀 가동했을 때.

매달 50만 병씩 만들 수 있었다.

다만, 거기에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벽향주 화이트 라벨과 소담이 부족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오저당은 소량 생산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단위를 올려왔다.

하지만 ASAP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저알코올인데다가 소비자가도 다른 술에 비하면 낮은 편이라 접근성이 좋기에 생산량을 처음부터 높게 잡았다.

어쨌든 그렇게 술이 출고된 뒤.

3주 후에 ASAP가 배를 타고 움직인 항로를 따라 나도 태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내가 내린 곳은 우타파오 공항이 아닌 방콕의 수완나품 공항이었다.

거리가 정말 애매했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자니 경유하며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수완나품에 내려서 파타야까지 택시를 타는 것이다.

차를 타면 2시간쯤 걸린다고 했다.

택시를 예약한 금액은 10만 원 정도인데 차종마다 가격 차이가 꽤 있었다.

나름 출장인데 이 정도 쓴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와아··· 공기가 끈적거리는 느낌이에요.]

향이는 공항 밖으로 나오자 상당히 불쾌한 표정으로 날개를 퍼덕거렸다.

습기 때문에 날개가 무거워진 것 같았다.

그러자 ‘검이’라고 향이가 이름을 붙인 내시 요정이 날아와 도와줬다.

왜 검이가 됐냐고?

그 이름의 어원은 껌(Gum)이다.

맨날 껌딱지라고 타박하더니 향이는 녀석의 이름을 약간 순화해 붙여줬다.

“그러게 습도가 장난 아니다.”

확실히 습도가 높게 느껴지긴 했다.

나도 동남아 지역에 오는 것은 처음이라 이런 느낌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같은 해안 지대라도 샌프란시스코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

옷을 쥐어짜면 물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랄까. 가만히 있어도 불쾌 지수가 쭉쭉 높아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곧장 예약한 택시부터 찾았다.

비행시간이 유럽이나 미국에 가는 것보다 훨씬 짧기에 피곤하지는 않았다.

[확실히 미국이나 유럽과는 완전히 다르네요.]

향이는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

그건 나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내가 알던 세상은 미국과 한국 정도에 불과했고 기껏해야 프랑스와 멕시코에 잠시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한마디로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나마 호텔까지 이동은 쉬웠다.

예약한 택시를 탄 이후에 잠시 눈을 붙였더니 생각보다 빨리 파타야 중심지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ASAP가 팔리는 장소도 가보고 다른 나라와 달리 왜 태국에서 잘 팔리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걸 알아야 뭔가 돌파구가 나올 것 같았다.

“이제부터 태국에서 왜 ASAP가 인기인지 그 이유를 찾아보자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