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81화 (181/254)

ASAP (3)

호텔에 들어가 짐을 놔둔 뒤.

창밖을 보자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파타야의 첫인상은 좋았다.

오션 뷰로 잡은 호텔에서 바라본 해안가는 시원하게 쭉 뻗어 있었다.

하나둘 환하게 불이 켜지자,

파타야는 진면목을 내게 보여줬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여기 오는 길에 봤던 산등성이에 설치되어 있는 [PATTAYA city] 간판에도 불이 들어왔겠지.

그쯤에서 나는 호텔을 나섰다.

이번 일정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3박 4일밖에 안 되었기에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그게 서두르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태국이 자랑하는 맥주.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칵테일까지.

마셔보고 싶은 것들이 꽤 많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번 출장에 사심이 아예 없진 않았다.

지금까지 말로만 많이 들어봤지 마셔본 적은 아직 없기에 상당히 궁금했다.

호텔 입구로 내려가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도어맨이 슬쩍 내게 다가왔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여기서 메인 스트리트까지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걸어서 가셔도 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니 보통은 툭툭을 타거나 그랩으로 차를 불러서 가십니다.”

중년쯤으로 보이는 남자는 친절하게 내게 설명을 해준 뒤에 그랩이란 어플을 설치하는 것을 권유해주었다.

그것만 있더라도 택시비로 사기치는 이들은 피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내 선택은 다른 쪽이었다.

“툭툭을 타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태국과 인도를 비롯해 동남아의 교통수단 중에는 툭툭이라는 게 있다.

툭툭은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차인데 태국에 왔으니 한 번쯤은 타보고 싶었다.

“그거는 제가 불러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 기사님 중에 영어가 가능하고 이 근처 지역에 대해 잘 아는 분이 있으면 그분으로 부탁해도 될까요?”

“마침 적당한 친구가 있습니다.”

도어맨은 나에게 싱긋 웃어준 뒤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잠시 도어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호텔 앞으로 샛노란 색의 툭툭 한 대가 다가왔다.

거기서 내린 이는 상당히 젊었다.

호세나 쌍둥이 나이 정도로 보였는데 아무리 많이 쳐줘야 내 또래였다.

엉클어진 곱슬머리의 남자는 도어맨과 태국어로 잠시 대화하더니 내게 다가와서 손을 모은 자세로 인사를 했다.

“싸와디캅(สวัสดีครับ). 수파싯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어디로 모시면 될까요?”

수파싯이라 이름을 밝힌 그는 상당히 인상적인 발음으로 목적지부터 물었다.

눈을 감고 들으면 영국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쪽 악센트가 심했다.

“영국식 영어를 쓰는군요.”

“작년까지는 거기서 공부했거든요.”

“일단은 번화가로 가주세요.”

요금이 얼마인지 묻지도 않고 목적지부터 밝혔으나 흔한 일인지 수파싯은 알겠다며 대답했다.

위치 좋은 곳에 호텔을 잡은 탓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그곳에서 수파싯은 요금으로 50밧을 요구했다.

“생각보다 저렴하네요?”

“아마 여기서 돌아가실 때는 툭툭 기사들이 두 배는 달라고 할 겁니다.”

“그런데 왜 절반만 받죠?”

“거리가 너무 짧으니까요. 안 내리실 건가요?”

수파싯은 마음이 급해 보였다.

왜 그런가 봤더니 1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툭툭을 잡으려고 서 있는 두 명의 여성이 있었다. 그녀들을 태우려는 것 같았는데 내가 눈치 없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일어날 생각은 없었다.

“한 가지 제안할 게 있는데 오늘 하루 저랑 같이 다니시는 거는 어떤가요?”

“아쉽게도 저는 그런 취향은 아니라··· 레이디 보이를 원하시면 업소를 소개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내 말을 오해한 것 같았다.

아놔··· 나도 그런 취향 아니거든!

“그런 쪽은 저도 사양입니다! 저는 지금 가이드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얼마를 주시냐에 따라 다르겠죠.”

“그래서 얼마를 드리면 됩니까?”

수파싯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는 어디까지 갔다가 올 거냐며 물었고 나는 이 주변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을 거라 답해줬다.

“그럴 거면 툭툭은 필요 없잖아요?”

“요즘 파타야에서 가장 핫한 곳들이 어딘지 안내해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한 곳만 가실 생각은 아니시군요.”

“맞아요. 대신 그곳에서 먹고 마시는 것도 제가 다 부담할 겁니다.”

그래봐야 얼마 되진 않을 거다.

내 말을 들은 수파싯은 자신의 툭툭을 바라보며 한 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제가 술을 마시면 누가 운전합니까.”

“주차해놓고 내일 찾아가면 되죠. 그래서 할 겁니까? 말 겁니까?”

“시간당 300밧만 주십쇼.”

잠시 고민하던 수파싯은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원한 300밧이면 원화로 만천 원 정도 수준이었다.

부담되는 가격은 아닌지라 곧장 그러자고 말하자 너무 흔쾌히 받아들인 탓인지 수파싯은 크게 아쉬워했다.

“에잇··· 조금 더 부를걸.”

“안내만 잘해준다면 두 배까지 올려줄 생각도 있으니 걱정마세요.”

“그러면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이거 주차 좀 하고 다시 올게요.”

나를 거리에 놔두고 사라진 그는 5분도 되지 않아 헐레벌떡 뛰어서 돌아왔다.

그 짧은 사이에 내가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았다.

“후우. 일단은 저기부터 가시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화려하게 꾸며진 술집이었다. 이미 그곳은 수많은 사람이 입구부터 진을 치고 있었다.

수파싯의 말에 의하면 파타야에서 현재 가장 핫한 곳이었다.

그곳은 정말··· 혼잡함 그 자체였다.

스피커에서는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노래가 흘러나왔고 쉴 틈 없이 반짝이는 조명은 시신경을 테러하는 수준이었다.

산골에서 별이나 보며 살던 내게는 도저히 적응하기 어려운 장소였다.

그래도 못 버틸 정도는 아니라 메뉴판을 펼쳐서 우리 술부터 찾아봤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찾는 ASAP는 이곳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리 찾아도 오저당의 술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이왕에 들어왔으니 태국의 맥주를 시켰다.

“저는 싱하를 마실 건데 마시고 싶은 걸로 시키시면 됩니다.”

“저도 같은 걸로 마시겠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묻는 건데 술은 잘하시는 편인가요?”

내 질문을 들은 그는 웃었다.

수파싯은 주량에 꽤 자신 있어 보였다.

곧장 서빙을 하는 이를 불러서 싱하 두 병을 주문하니 잠시 후에 나온 것은 얼음이 담긴 맥주잔과 싱하 두 병이었다.

“태국에 처음 오신 건가요?”

“네,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맥주에 얼음을 넣어서 마시는 것도 처음이시겠네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내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맥주가 차가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곧장 마시지는 말라고 권유했다.

“아무래도 태국이 더운 날씨라 다들 이렇게 마시는데 해외에서 오신 분들은 대부분 기겁하더라고요. 그래도 한 번 맛보면 왜 이렇게 마시는지 아실 거예요.”

그의 말은 맞았다.

잠시 시간을 두고 마신 맥주는 탄산이 들어간 고소한 보리차 같았다.

목 넘김이 부드러운 것도 좋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갈증을 해소해주는 시원한 느낌이었다.

[캬아! 이거 정말 신세계네요.]

향이도 무척이나 만족했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 때문에 진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녀석인데 맥주를 마시더니 다시 활력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건 검이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향이 뒤에서 존재감을 감추고 있는 녀석이 오늘따라 분주했다.

심지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꿀을 모으는 꿀벌처럼 움직였다.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

검이가 오저당에 온 게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은 신기한 것들이 많을 시기였다.

하지만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고 향이는 그런 검이를 타박했다.

[정신 사나우니 얌전히 마셔.]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내가 보기에는 향이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검이는 아주 얌전한 편이었다.

맥주 한 병을 비우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거의 10분도 되지 않아 그곳을 나온 우리는 곧장 다른 가게를 돌며 오저당의 ASAP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 두어 가게 정도는 창이나 다른 맥주를 마셨지만, 그 뒤로는 메뉴판만 보고 나와야 했다.

“혹시 찾으시는 게 있나요?”

그런 나의 행동을 본 수파싯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왜 그러는 건지 물었다.

“파타야에서 한국 술을 많이 들여놓는 곳은 없나요?”

“평범한 술을 찾는 거는 아니신 것 같은데··· 마침 생각나는 곳이 있네요.”

수파싯은 나를 데리고 다른 가게로 향했다. 걸어서 제법 가야 했는데 그곳에 도착하자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가게 입구에 부착된 RJ 사진과 우리가 수출할 때 만들어서 배포한 ASAP 포스터가 보였기 때문이다.

“진작 말해줄 걸 그랬네요. 제가 찾던 곳이에요.”

우리는 곧장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도 다른 가게와 비슷하게 사람이 가득했고 비어있는 자리는 바텐더를 마주보고 앉는 자리가 유일했다.

그곳에서는 메뉴를 볼 필요도 없었다.

바텐더 뒤에 놓인 냉장고 안에 ASAP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걸 시켰고 수파싯도 같은 것을 주문했다.

아마도 꽤 궁금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바텐더는 곧장 ASAP을 내주지 않고 수파싯을 향해 태국어로 뭔가를 열심히 설명했다. 잠시 후에 수파싯은 그가 말한 것을 내게 전달했다.

“있는 그대로 마실 건지 아니면 저 옆에 여성분들처럼 세팅을 할 건지 묻는데요.”

수파싯이 슬쩍 눈짓을 하는 방향을 바라보자 하이볼 잔에 살얼음과 라임이 올려져 있는 ASAP가 보였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가게 안에는 그렇게 술을 마시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저거 다 ASAP 맞아요.]

가게 내부를 돌아다니던 향이도 내게 와서 자신이 맛본 것을 알려주었다.

당연히 여기까지 왔는데 보통의 ASAP만 마실 이유는 없기에 같은 걸로 주문했다.

잠시 후에 나온 ASAP를 마신 나는 흡족한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여기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마시는 건지 금방 이해가 가능했다. 끝없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느낌이랄까.

이미 맥주를 세 병이나 마시고 왔으나 그것만으로 해소되지 않던 갈증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건 수파싯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도 쉬지 않고 마셨다.

우리 둘의 잔이 바닥을 드러내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곧장 다시 주문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전처럼 급하게 마시지 않고 주변을 둘러봤다.

“잠시 실례 좀 해도 될까요?”

그때부터 나는 인터뷰를 시도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우리 제품을 어떻게 느끼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대부분은 소통이 쉽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눈치 빠르게 수파싯이 통역을 자처해줬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대화는 수월해졌다.

5분 정도의 인터뷰를 마친 나는 감사의 인사로 테이블에 ASAP를 돌렸고 몇 곳의 테이블을 거쳐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일단은 이곳에서 나눴던 대화를 수첩에 정리부터 해놔야 했다. 테이블을 돌며 대화를 나눌 때마다 마신 술이 생각보다 많았기에 취기가 살짝 올라오고 있었다.

“뭐 하시는 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런 내 모습이 조금 이상했던 걸까.

지금까지 아무런 질문 없이 지켜보고 있던 수파싯이 내 정체가 뭔지 물었다.

하긴 내 행동이 평범한 여행객이라 말하기는 조금 어려웠다.

“아··· 저는 지금 마시고 계신 이 술을 만드는 회사에서 나왔어요.”

“어쩐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그럼 다른 곳으로 이동하죠.”

그쯤에서 우리는 가게를 나섰다.

일정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져서 몇 곳이나 더 들렸고 자정 무렵이 되자 나는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많이 취하신 것 같아요.]

향이가 걱정을 해줄 정도였다.

모처럼 내 주량을 살짝 넘어섰다.

최대한 조금씩만 마시려고 애를 썼으나 합석을 할 때마다 분위기를 맞추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술이 올라와 알딸딸해 보이는 것은 수파싯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에게 약속했던 대로 수고비를 건넸다.

내가 꺼낸 지폐를 본 그는 화들짝 놀라서 나를 바라봤다.

“이거 너무 많이 주신 것 같은데요.”

“시간당 300밧인데 여섯 시간 동안 일했잖아요. 그리고 통역도 겸해줬으니 약속대로 더블로 계산해야죠.”

그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한 것이 내가 지갑에서 꺼낸 돈은 오천 밧이나 됐다.

한화로 따지면 거의 18만 원에 달하는 금액인데 여기 수준으로 따지면 전문직이 버는 주급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너무 과하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통역하는 사람을 구해서 다녔어도 어차피 그 정도의 비용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수파싯이 그걸 곧장 받지는 않았다.

이걸 받아도 되는 건가 고민했다.

내가 직접 그의 손에 지폐를 쥐어주자 그제야 고개를 숙여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는데 그냥 주는 돈은 아니었다.

“혹시 내일도 시간 되나요?”

“특별한 일정은 없습니다.”

“그럼 오전 10시까지 아까 그 호텔로 와요. 같이 해장이나 하죠. 조건은 오늘이랑 동일하게 어때요?”

오늘 다녀보니 통역이 필요했다.

외국인 관광객은 나 혼자도 가능했는데 현지인들은 소통이 쉽지 않았다.

그나마 수파싯과 동행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수파싯은 크게 반겼다.

술 마시고 수다를 떨며 돈까지 버니 확실히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든 잡아야 하는 동앗줄에 가까웠다.

“내일 뵙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