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 스토어 (1)
수파싯은 상당히 성실했다.
그와 함께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여러 곳을 다녔는데 늦어서 스케줄이 밀린 적은 한 번도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돈을 밝히지도 않았다.
정해놓은 금액 외에 추가로 달라는 것도 없었고 오히려 툭툭으로 이동하는 비용은 모두 시급 내에 포함된 것으로 계산했다.
그 덕분에 출장이 상당히 편해졌다.
낮에는 수파싯이 안내해주는 대로 파타야 관광을 하며 미식 투어를 했고 저녁부터 함께 술집을 다니며 시장 반응을 살폈다.
[상당히 성실한 사람 같아요.]
수파싯에 대한 향이의 평가도 높았다.
은근히 향이한테 점수를 많이 땄는지 어제만 하더라도 둘 다 취했는데 나부터 챙겼다며 그를 한껏 치켜세웠다.
“툭툭을 몰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지.”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를 밟으며 유학까지 다녀온 그가 왜 툭툭을 모는 건지 어제 술자리에서 물어봤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답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재정적인 문제가 가장 컸다.
그가 유학을 갈 때만 하더라도 집안 형편이 괜찮았는데 공부를 하던 2년 사이에 완전히 상황이 바뀌었다고 했다.
수파싯도 꽤 노력을 했다.
법적으로 허용되는 주당 20시간의 알바를 했으나 매년 2만 파운드나 되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안타깝네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두 분이 같이 다닐 때 뒤에서 지켜보면 수파싯이 비서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그렇게 보였어?”
[요즘 일정도 상당히 바빠지셨는데 슬슬 비서를 두시는 거는 어때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이야.”
수호와 황 이사도 여름쯤에 내게 비서를 한 명 두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출장 중에 연락이 제대로 안 될 때가 있기 때문인데 내가 그걸 거절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크게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스케줄 관리는 물론이고 업무량에 치이는 느낌이었다.
향이가 옆에서 내가 잊고 있는 것을 종종 챙겨주긴 했으나 전문적인 영역까지는 불가능했기에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도 수파싯은 안 돼.”
그가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영어도 가능하고 전공도 행정 쪽이라 비서 일도 제법 잘할 거라 생각되었다.
그런데도 안 된다고 하는 이유는 그의 국적이 태국이기 때문이다.
태국인이라 차별하는 게 아니다.
나랑 같이 다니려면 앞으로 어떤 나라를 갈지 모르는 데 문제는 태국의 비자를 가지고 갈 수 있는 나라가 많지 않다.
대한민국의 여권 파워는 세계 2위다.
무비자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만 190개국에 달하는데 태국은 89위라 겨우 79개국만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
그 차이가 생각보다 매우 컸다.
예를 들어 내가 이탈리아나 독일 같은 곳에 있는 와이너리에 볼일이 있다면 수파싯은 따로 비자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오저당이 서울에 있는 것도 아니라 비자를 해결하려면 며칠씩 걸릴 가능성이 있었다.
당장 출국해야 하는데 비서의 비자 문제 때문에 일정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그 부분을 설명해주자 향이도 금방 이해했다.
[어휴··· 뭐가 이리 복잡해요?]
“요정의 세상에서는 국경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애초에 태어난 지역을 벗어나 그렇게 방랑하는 요정은 없으니까요.]
“향이 너 같은 요정은 아예 없는 거야?”
[글쎄요. 그렇게 단정 짓긴 어렵죠. 판초도 이제 많이 커서 마음먹으면 저처럼 따라다닐 수도 있을걸요.]
하긴 그 녀석도 많이 성장했다.
과거에 향이가 나를 따라서 다니던 때를 생각하면 판초도 불가능하진 않겠지.
하지만 그 녀석까지 데리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이미 검이라는 껌딱지가 붙어 있다.
그리고 멕시코에 아무리 자주 가봤자 분기별로 한 번이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판초한테도 그리 좋진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그때 메시지가 하나 왔다.
스마트폰을 보니 수파싯이었다.
오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라 그가 방콕의 공항까지 태워다주기로 했다.
당연히 툭툭을 탈 생각은 없었다.
두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매연 속에서 달릴 수도 없고 애초에 툭툭이 그런 장거리를 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친척의 차를 빌린다고 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적어도 내가 귀국하러 가는 길에 배웅을 하고 싶다고 하니 더는 말릴 수 없었다.
놔두고 가는 것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에 캐리어를 끌고 로비로 내려가자 수파싯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곧장 내 캐리어부터 가져갔다.
“저한테 주세요.”
그럴 필요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의 뒤를 따라 호텔 밖으로 나서자 주차를 해놓은 차가 보였다.
일본 브랜드에서 나온 차였는데 디자인만 보면 제법 오래된 연식 같으나 관리를 잘한 것처럼 보였다.
“어제는 잘 주무셨나요?”
“어휴··· 숙취가 장난 아니네요. 늦게 일어나서 아침에 조식을 못 먹었는데 식사했어요?”
“아니요. 저도 아직입니다.”
“그러면 아직 시간 여유 많으니 뭐라도 먹고 가죠.”
자세히 보니 수파싯의 얼굴도 수척한 것이 숙취가 조금 있었던 것 같았다.
지난 나흘 동안 여러 종류의 태국 음식을 먹었으나 오늘만큼은 국물이 필요했다.
“뜨뜻한 국물로 해장할만한 음식이 있을까요?”
“당연히 있죠. 혹시 돼지나 해물 같은 종류 중에 어떤 걸 좋아하시죠?”
“흐음··· 어떤 거든 상관없어요.”
“그러면 저만 믿고 가시죠.”
수파싯은 현지인 맛집을 추천해주겠다며 내게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 잠시 후에 그가 안내해준 곳은 레스토랑 같은 곳이 아닌 현지인들이 찾는 그런 식당이었다.
“허름해 보여도 여기가 현지인들에게는 상당히 유명한 곳이에요.”
“맛만 좋으면 되죠.”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상당히 자신 있어 보였는데,
괜히 나온 자신감은 아니었다.
그가 추천해준 똠 셉이란 음식을 먹기로 했는데 한국의 도가니탕이랑 비슷한 것이 입맛에 상당히 잘 맞았다.
“제 입맛에는 똠양꿍보다 이게 더 맞네요.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매일 아침마다 여기 와서 먹었을 것 같아요.”
“아직 못 드신 태국 음식이 훨씬 많으니 나중에 또 오세요.”
“그래야겠네요.”
그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번 출장이 동남아에 처음 오는 건데 생각보다 만족도가 높은 편이었다.
미식의 나라로 구분되는 프랑스와 비교해도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아마 내 입맛 때문인 것 같았다.
그나마 나는 신맛과 고수를 즐기는 편이라 일부 한국인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만한 음식도 상당히 잘 맞았다.
“그럼 이제 출발해볼까요.”
수파싯은 혹시나 내가 비행기에 타지 못할까 봐 상당히 서둘렀다.
“아직 시간 널널해요.”
“방콕에서 교통 체증을 겪어보시면 아마 그런 말씀이 안 나오실 거예요.”
“그런가요?”
여기 올 때도 방콕에서 출발했었다.
그때는 생각보다 그리 많이 밀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서울의 기준으로 생각해서 그런 건가. 하지만 수파싯의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 걸까.
내가 봤던 방콕과는 상당히 달랐다.
상당히 여유롭게 출발했음에도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두 시간도 안 남았다.
공항 입구에 줄을 서서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미리 인사를 나눠야 했다. 상황상 차를 세우고 길게 인사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나흘 동안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너무 돈을 많이 받은 것 같아서 죄송한걸요.”
“혹시 학업을 계속 이어갈 건가요?”
“글쎄요. 그러고 싶은데 여건이 되지 않으니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네요.”
“혹시 취직할 생각이면 한국에 와서 일하는 거는 어떤가요?”
그쯤에서 나는 내 명함을 꺼냈다.
그걸 받아쥔 수파싯은 명함에 적힌 내 직위를 보더니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가 CEO인지 전혀 몰랐던 것 같았다. 하긴 어느 회사의 사장이 현지 반응을 보러 직접 출장까지 오겠어.
“아니 사장님이 왜 이렇게까지···.”
“갑자기 판매량이 높아졌길래 궁금해서 왔죠. 먼 땅에서 일한다는 게 쉽지 않을 테니 결심이 서면 연락주세요.”
오저당에 일자리는 상당히 많았다.
올해에 채용한 이들만 서른 명이 넘어가는 데도 부족할 정도였다.
3층 규모의 창고 세 채가 동시에 지어지고 화이트 라벨 생산량도 대폭 늘어난 탓에 인력난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나마 작년처럼 현장 실습으로 7명이나 오저당에 들어왔으나 아직 부족했다.
하지만 수파싯을 생산 라인에 세울 생각은 없었다.
“혹시 제가 한국에 가면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마 태국과 베트남 등의 아세안 지역 발주를 담당하게 될 겁니다.”
해외 발주를 담당하는 지석태 과장 아래 놓고 아세안 지역을 맡길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사람을 뽑아야 하는 상황인 것이 지 과장은 밤이 되면 더 바빠진다.
아무래도 시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업체를 담당하는 그가 아세안 지역까지 맡으니 공백이 느껴지는 때가 생각보다 자주 생기고 있었다.
거기까지 들은 수파싯은 더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곧장 대답했다.
그가 원래 공부하던 행정 쪽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툭툭을 운전할 바에는 한국에 오는 것을 선택했다.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
수파싯과 헤어진 뒤.
채용 소식을 오저당에 전했다.
조금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나 지석태 과장은 인원이 추가되는 것을 반겼다.
어차피 그쪽에서 진행되는 업무 대부분이 영어로 진행되는 탓에 영어만 잘하면 태국 사람인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이미 오저당에서 꽤 긴 시간 동안 라니와 호세가 일하고 있기에 이번 채용이 이상하다고 여기는 이는 별로 없었다.
[취업 비자 관련된 문제는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그 부분은 황동선 이사가 맡았다.
단순하게 관광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 준비해야 할 것들이 제법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연봉 협상도 그를 통해서 마무리하도록 시켰다.
인천 공항에서 통화를 마친 뒤.
내가 향한 곳은 로데오점이었다.
이왕에 서울에 왔으니 모처럼 잠시 들릴 생각이었다. 더구나 이미 밤이 늦어 지금 삼척으로 가는 것은 무리였다.
거의 자정이 다 될 무렵.
로데오점에 도착했는데 아직도 그곳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재미있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로데오점에서는 태국에서 파는 것처럼 ASAP를 세팅해서 판매하고 있었다.
태국에서 찍은 영상을 직원들에게 공유했더니 곧장 로데오점에도 적용한 것 같았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이옥주 지점장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겨줬다.
미리 연락을 하고 온 터라 로데오점의 직원들은 가볍게 고개 숙여서 인사하는 것에 그쳤다. 괜히 여기서 소리 높여 인사를 해봤자 불편한 것은 나였다.
“벌써 태국처럼 판매를 시작하셨는지 몰랐네요.”
“직접 만들어서 마셔봤더니 좋더라고요. 그러니 미룰 이유가 없죠.”
“혹시 이것도 칵테일로 구분되나요?”
“아니요. 크게 손이 가는 것도 아니라 원래 금액 그대로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최근 이틀 동안 로데오점의 ASAP 판매량은 유의미할 정도로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어느덧 가을이라 차가운 음료를 선호하지 않더라도 일단 비주얼이 좋은 탓이었다.
“이거는 너튜브에도 올려야겠네요.”
“안 그래도 며칠 내에 쌍둥이들이 와서 찍어가기로 했어요. 조금 일찍 팔았으면 여름에 매출 좀 나왔을 텐데 아쉽네요.”
“어쩔 수 없죠.”
ASAP의 타겟팅은 바뀌었다.
미국의 바크모에도 북부보다는 마이애미 같은 곳에 많이 보내달라고 요청해놨다.
당연히 오저당도 태국과 동남아 쪽에 집중해서 마케팅하기로 화상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오늘은 서울에서 머무는 거죠?”
“그래야죠. 지금 내려가는 것은 무리라 삼촌 집에서 하루 자고 가려고요.”
“그러면 칵테일 한 잔 만들어드릴게요.”
“손님들 앉을 자리도 없는 걸요. 오늘은 제가 일손 좀 덜어드리죠.”
“안 그러셔도 돼요.”
“그래봐야 겨우 1시간이잖아요. 후딱 끝내고 삼촌도 불러서 같이 술이나 한잔하시죠.”
캐리어를 구석으로 밀어 넣은 뒤.
로데오점 직원들과 함께 서빙을 봐주기 시작했다. 영업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데도 아직 손님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이곳이 오픈한 이후부터.
언제나 대기열이 생길 정도다.
중간에 화이트 라벨의 수요가 폭발했을 당시에 유일하게 그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로데오점이었던 것도 꽤 컸다.
‘직영점이니 그 정도의 매리트는 있어야지.’
하지만 시간이 매우 늦었다.
머지않아 막차가 끊길 시간이다.
그쯤 되자 하나둘 손님이 일어나 많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몇 분 차이가 중요하다.
한두 잔을 더 마시려다가 대중교통이 아닌 택시로 집에 가야 할 수도 있다.
그쯤 되자 로데오점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아직 영업 시간이 30분쯤 남아 있었으나 조금 한가해졌기에 이옥주 지점장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그녀와 함께 구석진 테이블에 앉은 나는 지금껏 미뤄왔던 계획을 그녀에게 밝혔다.
“이제 슬슬 오저당의 주점을 프랜차이즈로 발전시키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