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 스토어 (3)
올해 26살이 된 다미안.
그의 정체성은 조금 애매했다.
국적은 한국이 맞으나 정작 사용하는 언어는 스페인어가 훨씬 수월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다.
그의 독특한 외모 때문이었다.
얼핏 보면 영락없는 외국인의 모습인데 자세히 뜯어보면 한국 사람 같기도 했다.
그가 그런 묘한 외모를 가진 것은 한국인 아버지를 둔 혼혈이라 가능했다.
다미안 홍.
그가 가진 성도 한국의 것이다.
하지만 어디 소속이라 말하기 애매했다.
심지어 군대까지 다녀왔음에도 여전히 한국에 소속된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겉도는 느낌이랄까.
한국 국적을 얻었으나 아직 이 나라는 혼혈이 살기 그리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스페인 사람이란 느낌도 들지 않았다.
다미안은 어릴 때부터 한국의 음식을 먹고 자랐고 한국 못지않은 엄격한 스타일의 훈육을 받고 자랐다.
유년 시절 때는 그런 가치관의 충돌로 인해 많은 방황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 당시의 고민을 생각해보면 별거 아니라 생각되었다.
성인이 되니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후우··· 앞으로 어쩌지?”
통장의 잔액은 다 떨어졌고,
다니던 스타트업은 파산하고 말았다.
창립 멤버로 참여한 다미안은 거의 8개월 가까이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으나 그런 열정 하나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무조건 성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시장 반응은 차가웠다.
그나마 지금 생각하면 빠르게 포기한 게 다행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라고 했던가.’
아주 예전에 배웠던 말인데,
이럴 때 쓰는 말이었던 것 같았다.
어차피 망할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살길을 찾아보는 것이 더 현명하겠지.
애써 그렇게 자위하며 다미안은 구인구직 사이트에 접속해서 이력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대학교 졸업장이 전부였고 그 외에 내세울 것은 없었다.
그나마 스페인어와 영어가 능숙한 것이 장점이나 반대로 한국어는 애매했다.
의사소통에 종종 문제가 있었다.
조금 깊게 들어가면 못 알아듣는 것이 많아서 일하며 종종 핀트가 어긋나는 일이 종종 생길 때가 있었다.
이력서 작성을 마친 뒤.
그는 본격적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목표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자신의 강점인 언어를 키워드로 넣고 찾아야 했다.
“영어 가능한 직원을 찾는 곳은 꽤 많네.”
하지만 그것도 조금 애매했다.
영문 번역 같은 일이 대부분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영어는 한국어 수준과 비슷한 정도였기에 그들이 원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스페인어로 검색했을 때.
구인하는 곳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몇 페이지도 안 되기에 다미안은 천천히 어떤 회사인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천천히 살펴봤다.
그러다 눈에 띄는 곳을 발견했다.
직원은 70명이 안 되고 심지어 회사도 강원도에 있는데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검색창에 그 회사의 이름을 넣고 엔터를 치니 그제야 다미안은 어딘지 알아챘다.
‘아! 여기가 거기구나.’
몇 개월 전에 여름쯤인가.
로데오에서 약속을 잡은 적이 있다.
그때 친구들의 추천으로 갔던 술집이 바로 오저당이란 곳이었는데 술값이 싸서 상당히 인상이 깊게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술이 일품이었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며 많은 술을 마셔봤으나 그때 신세계를 보았다.
하지만 오저당의 술을 자주 마실 수는 없었다.
오풍주와 소담 소주.
그리고 벽향주 화이트 라벨까지.
한 병당 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가격은 생각보다 부담이 많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여기 취직하면 오저당의 술은 맘껏 마실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매우 유치한 생각이었으나 다미안은 점차 진지해졌다.
검색해서 나온 오저당의 기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성장세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겨우 30개월 만에 이뤄낸 것들이 너무 많았다.
다른 어떤 무엇보다 숙식 제공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 고시원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지금 그가 지내는 곳은 매우 좁았고 창문조차 없어 감옥처럼 느껴졌다.
[영업직(경력) 2명]
[생산직(신입) 00명]
[경영지원(신입) 1명]
[비서실(신입, 경력) 1명]
문제는 자신이 일할 부서가 마땅치 않았다. 다미안의 전공은 문화인류학인데 그걸 버리고 생산직을 하기도 애매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비서실에서 뽑는 한 명의 TO에 집중했다.
거기 적혀있는 한 줄 때문이었다.
스페인어와 영어가 가능하면 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걸 본 다미안은 자신에게 가장 적당한 곳 같아 보였다.
더구나 해외 출장을 자주 갈 수 있다는 내용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해외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수당을 챙겨줄 것이 분명했다.
오저당 사장이 성격파탄자만 아니면 일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다미안은 이미 비서실 지원을 결심했고 곧장 이력서를 보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다미안은 태백행 버스를 탔다.
서류를 통과해서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는데 처음에는 조금 망설였었다.
서울도 아니고 강원도까지 면접을 보러 가는 것이 쉽진 않았다.
하지만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오저당에서는 면접 오는 이들에게 교통비를 모두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다면 바람도 쐴 겸 다녀오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태백 시외버스 터미널]
버스에서 내린 다미안은 문자로 받은 지도를 확인하며 기차역 앞에 있는 공용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버스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44인승 버스 옆면에 적힌 ‘오저당’ 맵핑을 확인한 그는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버스 안에서 남자 한 명이 내려와서 이름부터 체크했다.
“오저당에 면접 보러 가시는 분 맞으시나요?”
“다미안 홍이라고 합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시간에 딱 맞춰서 오셨네요. 편하신 자리에 앉으시면 5분 이내에 출발할 거예요.”
“아직 안 오신 분들도 많은 것 같은데요.”
그가 들고 있는 리스트를 흘깃 보니 체크되지 않은 이들이 1/3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 이분들은 안 올 겁니다.”
“이렇게 많이요?”
“면접 보러 오겠다고 하고 당일날 안 오는 분들이 상당히 많아요.”
이런 일이 꽤 흔한 것 같았다.
다미안은 오히려 잘 된 거라 여겼다.
한 명의 경쟁자라도 빠지면 이득이잖아.
버스에 올라타니 안에는 열 명이 안 되는 사람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외국인도 있었다.
피부색만 봐서는 동남아 나라에서 온 사람 같았다. 다미안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그가 앉은 자리 건너편에 앉으며 영어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다른 이들은 뭔가 초조해 보였다.
면접을 앞두고 있기에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고 마치 연인을 만나러 가는 이처럼 상당히 상기된 표정이었다.
“반갑습니다. 오늘 면접 보러 가시는 거죠?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오해하셨군요. 저는 이미 채용됐습니다. 오늘 입국해서 첫 출근하는 겁니다.”
“아! 부럽네요. 저는 다미안이라고 하는데 채용되면 잘 부탁드릴게요.”
“태국에서 온 수파싯입니다.”
둘은 악수를 나누고 오저당으로 향하는 30분 내내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수파싯과 다미안은 나이도 엇비슷하고 둘 다 영어가 능숙해서 대화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태국 현지에서 고용되셨다고요?”
“네, 운 좋게 며칠 사장님을 모시고 시장 조사를 다녔거든요.”
“여기 사장님은 어때요?”
“비서실 지원하셨다고 하셨죠?”
다미안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수파싯은 무조건 그 기회를 잡으라고 조언을 해줬다.
“제가 오래 뵌 거는 아닌데 사람을 막 대하실 분은 아니에요. 그리고 은근히 잘 챙겨주시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저당의 사장님도 영어를 잘하시는데 왜 비서를 뽑는지 모르겠네요.”
“옆에서 지켜보니까 연락이 오는 곳이 상당히 많아서 정신 없을 정도더군요.”
“아··· 그렇군요.”
일종의 메신저 역할인가.
그 정도면 어렵다고 여겨지진 않았다.
한동안 여러 대화를 하며 구불거리는 도로를 달리자 드디어 오저당으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 내린 다미안은 한눈에 매료되고 말았다.
어쩌면 단풍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덧 만추가 된 탓에 사방은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까지 들어오는 길에 보였던 코스모스 길이 상당히 예뻤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스페인에서 살 때는 아주 작은 지방 도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였다.
창문만 열면 초원이 펼쳐졌고 온갖 작물과 동물을 키우는 농장도 있었다.
그런 탓인지 도시에 대한 동경이 있었으나 막상 살아보니 삭막했다.
서울은 공원도 많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의 질이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반면에 이곳은 유토피아 같았다.
“와··· 이곳이 오저당 맞죠?”
수파싯도 상당히 놀라워했다.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던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겨울이 상당할 텐데.’
과연 적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역시 스페인에서 왔던 첫해에 정말 얼어 죽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었다.
더구나 서울도 아니고 강원도 산골이라 다미안은 다가올 겨울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건 사소한 문제였다.
잠시 그렇게 주변을 살피는 사이에 수파싯에게 히스패닉 외모를 가진 남자가 다가왔다.
“안에서 다들 기다리고 계시니 짐은 여기 놔두시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수파싯은 알겠다며 대답한 뒤.
다미안에게 인사를 하며 합장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 모르는 일이나 수파싯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응원해줬다.
“분명 좋은 결과가 있으실 겁니다.”
*
오저당 옆에 있는 오두막.
그곳은 올해 공사를 하며 세워졌다.
햇살이 잘 들어오는 양지였으나 뭔가 세우기 애매한 크기의 땅이라 이렇게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곳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바람이 잘 통하기에 언제나 선선했고 여름철에는 낮잠 자기도 꽤 좋았다.
그곳에 앉아서 과일을 먹으며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손에는 보고서가 쥐어져 있었다.
거기에 담긴 내용은 체인 스토어가 들어갈 후보지에 대한 것과 대략적인 비용에 대해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이렇게 세세한 보고까지는 필요 없었으나 삼촌은 채용한 직원들이 작성한 것을 내게도 항상 공유해주고 있었다.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고 참고하라는 의미였다.
“엄청 공격적으로 나가시네···.”
그게 내 솔직한 소감이었다.
삼촌은 로데오점에 이어 새로 오픈할 스토어의 장소를 꽤 핫한 곳으로 골랐다.
가장 먼저 살피고 있는 곳은 강남역과 신천역 그리고 북창동 부근이었다.
적절한 장소가 나오면 곧장 2호점을 낼 예정인데 인테리어는 로데오점을 맡았던 솔 인테리어의 김우종 사장의 몫이었다.
기존에 삼촌과 함께 로데오점을 만든 경험이 있기에 적절한 선정이었다.
그때 버스 한 대가 들어왔다.
멀리서 봐도 오저당의 것이었다.
버스 겉면에 큼지막하게 오저당 로고와 이름이 맵핑된 덕분에 유독 눈에 띄었다.
현재 오저당에서 운영되는 저 버스는 출퇴근용이자 단체 방문객을 위해 것이라 삼척 시청의 보조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말에는 관광객을 위해 쓴다는 조건만 지키면 되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흐읏! 이제 저는 슬슬 가봐야겠네요.”
옆에 기대서 노트북을 만지고 있던 황동선 이사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그 역시 이곳을 좋아해서 종종 나와서 일을 보고는 했다.
“몇 명이나 온 거죠?”
“출발 전에 보낸 카톡에는 아홉 명이 전부랍니다.”
“오늘 면접 보기로 예정되어 있던 게 열네 명이었으니 다섯 명은 안 온 거네요.”
“어쩔 수 없죠. 아! 비서실 채용은 직접 면접을 보신다고 하셨잖아요. 어디로 자리를 마련할까요?”
지금까지 일반 직원들 면접은 임원진이 진행하고 있었으나 비서실만큼은 내가 직접 보겠다고 미리 말해놓았다.
어딜가든 붙어 다닐 사람인데 무엇보다 내 기준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리를 옮기긴 싫었다.
회의실은 다른 면접이 진행될 예정이고 그렇다고 사장실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서류 전형을 통과한 비서실 지원자는 고작 한 명에 불과했다.
“여기로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