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는 과학이야 (1)
황 이사가 떠난 뒤.
한 청년이 오두막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외모가 조금 독특해 보였다.
머리카락과 눈은 검은색이나 백인처럼 느껴졌는데 혼혈인 것 같아 보였다.
이력서에 첨부한 사진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재미있게도 향이는 그를 보자마자 합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슨 이유라도 있어?”
[잘 생겼잖아요. 무조건 합격이에요.]
“허얼! 외모가 전부는 아니잖아.”
[그냥 느낌이 좋아요.]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요정들은 예쁜 것들을 참 좋아했다.
그나마 보석 같은 것에 물욕을 부리는 것은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는 사이에 오두막으로 다가오던 청년은 나를 발견하고 곧장 고개를 숙여서 인사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면접을 보기로 한 다미안 홍이라고 합니다!”
“제가 누군지 아시는 것 같네요.”
“이곳에 오기 전에 인터뷰하신 기사를 읽었는데 거기서 사진을 봤습니다.”
“일단 올라오세요.”
내가 손짓하자 그는 신발을 벗고 오두막 위로 올라오다가 잠시 멈춰섰다.
다미안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오두막 너머에 흐르는 덕월 계곡의 모습이었다.
풍경 하나만 놓고 보면 유명한 정자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곳이었다.
거기에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ASMR이라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그는 오두막에 올라와서 빈백을 잠시 바라보더니 그냥 바닥에 털썩 앉았다.
예상외의 선택이었다.
“편하게 거기 앉아도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여기 앉아도 편합니다.”
“뭐 그건 알아서 하시고 음료는 뭐로 드시겠어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응, -1점을 적립하셨습니다.
아무거나 달라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주문이다. 나는 차라리 미국에 있는 페레즈처럼 간단명료한 게 좋았다.
상당히 호불호가 강한 편이나 적어도 뭔가 선택하고 진행하며 미적지근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에 직원 한 명이 내가 요청한 두 잔의 차와 다미안의 이력서를 가져왔다.
“스페인에서 태어나서 자라셨다고요?”
“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 것치고 한국어가 능숙하시네요.”
“어릴 때부터 집에서는 한국어만 쓰라고 아버지가 항상 강요하셨던 덕분이죠.”
“군대도 다녀오셨네요. 그러면 지금은 한국 국적인 거죠?”
다미안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후회는 없다고 했다. 스페인의 1인당 GDP는 한국보다 낮아졌고 실업률은 급격하게 치솟았다.
한때 15%까지 떨어졌으나 최근에는 25%를 넘길 정도였다.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할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한 거죠.”
“상당히 심각한가 보네요.”
“어릴 때 같이 학교를 다녔던 친구 중에 정규직에 취업한 이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하긴 예전에 보았던 경제 뉴스에서 스페인의 비정규직 비중은 EU 회원국 중에 가장 높다고 했던 것 같았다. 다른 나라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쯤에서 나는 스페인어와 영어를 번갈아 가며 쓰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어느 정도 실력인지 궁금했는데 당연히 스페인어는 나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수준이었고 영어도 상당히 능숙했다.
“혹시 다른 언어도 가능합니까?”
“포르투갈어는 스페인어랑 흡사한 부분이 많아서 얼추 알아듣는 수준이고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생존에 필요한 수준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인 영어와 스페인어만 할 수 있어도 세계 어딜 가나 의사소통 정도는 가능하다.
“좋네요. 오저당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지금 물어보셔도 됩니다.”
“저··· 연봉이 사내 규정에 따라 정해진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렇지. 연봉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슬쩍 그가 이력서에 적은 희망 연봉을 확인해봤는데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음, 희망 연봉을 2,800만 원으로 적으셨는데 이 정도면 만족하시나요?”
“문과인데다가 스타트업을 제외하면 경력이 없으니까요. 대신 출장이 많다고 하니 그걸 고려해서 썼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제가 너무 높게 쓴 건가요?”
“아니요. 생각보다 낮아서요.”
오저당의 직원 중에 삼천만 원 이하로 받는 이는 현장 실습을 나온 학생들을 제외하면 한 명도 없었다.
다른 중소기업의 연봉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지만, 오저당 직원들에게 주는 돈은 아깝지 않았다.
그만큼 일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력 보충이 제때 이뤄진 적이 거의 없었기에 그에 대한 보상이었다.
더구나 외진 곳에 있는 회사다.
사람을 구하려면 연봉이라도 넉넉하게 책정해야 고민이라도 해볼 거잖아.
그리고 현재 오저당의 순수익은 매우 높은 편이라 어차피 세금으로 나갈 바에는 직원에게 나눠주는 게 속 편했다.
“사원으로 입사하면 현재 사내 규정에 따라 연봉 삼천만 원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출장을 가거나 주말에 일정이 잡히면 별도로 수당이 책정될 겁니다.”
내년에도 올해처럼 출장을 자주 다니면 적어도 사천만 원 이상은 수령할 거라 말하니 다미안의 눈빛은 반짝였다.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것 같아 보였다.
“뽑아만 주시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하긴 지금 그의 스펙만으로 다른 곳에 취직해도 내가 제시한 수준의 연봉을 받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내 주변만 봐도 다들 비슷했다.
대학 동기 중에 이미 졸업한 친구들과 선배들은 요즘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 정말 힘들다고 했다. 그런 탓인지 몰라도 은근히 취업 청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1학년만 다니고 휴학을 냈기에 친한 이들이 그리 많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내 밑에서 일하는 것을 꺼려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그나마 신입생 때 잘 챙겨주었던 선배 두 명은 오저당 F&B에 소개해줬다.
그렇다고 낙하산이라 보긴 어려웠다.
오히려 고생길이 열렸다고 봐야지.
아직은 시작 단계에 불과하기에 당분간은 상당히 바쁘게 지낼 것이다.
그래도 오저당이란 캐쉬 카우가 있는 회사다. 어지간하면 망하지 않을 테니 나로서는 최대한 신경 써준 것이다.
“정말로 오저당에서 일할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출근하겠다고 약속한 후에 잠수타는 분들이 은근히 많아서요.”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우리 사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일하겠다고 하면 무조건 잡아야 했다.
비서실에 지원한 이들도 별로 없었지만, 무엇보다 다미안 정도의 언어 실력을 지닌 이는 없었다.
다미안의 확답을 받은 뒤.
직접 오저당의 곳곳을 안내해줬다.
창고 같은 곳은 그가 들어갈 일이 거의 없으니 대충 지나갔고 사무실과 한옥을 주로 설명해줬다.
앞으로 그가 머물 곳이기 때문이다.
한옥에서 같이 살던 수호와 호세는 방을 빼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아무래도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편하면 태백 시내에 개인적으로 방을 잡고 출퇴근하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제가 곁에 있어야죠.”
“퇴근 시간 후에는 가능하면 업무 이야기는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장담할 수 없지만, 노력은 할 거다.
수호와 호세는 이사와 실장급이라 얼굴만 마주하면 일 이야기를 했으나 이제는 조금 바꿀 때가 되기는 했다.
“참고로 내년쯤 새로 집을 지을 예정이라 여기서 그리 오래 살지는 않을 거예요.”
가능하면 한옥에서 살고 싶었다.
작은할아버지가 물려주신 곳이기 때문에 옮길 생각이 없었으나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한옥의 마당에는 주막이 있기에 주말이 되면 왁자지껄한 소리 때문에 낮잠을 자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더구나 한옥의 주방과 화장실을 거의 공용처럼 사용하니 위생 문제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집을 새로 짓기로 했다.
위치는 오저당에서 조금 더 계곡 안으로 들어간 곳이라 지금 머무는 한옥에 비해서 꽤 한적한 장소였다.
여름철에 계곡 트레킹을 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평소에 사람 그림자조차 구경하기 어려울 정도로 외진 곳이다.
오풍리 마을 주민들도 그쪽으로는 자주 오지 않았다.
위치상으로는 산장 같은 곳이었으나 그래봤자 고작 300m 정도의 차이였다.
오저당에서 그리 멀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소음 같은 거는 조금 덜할 것 같았다.
“어디서 머물든 지금 사는 고시원보다는 환경이 좋을 겁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일할 수 있나요?”
“오늘부터 당장 일할 수도 있습니다.”
다미안은 신입 사원답게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은 없었다.
대신 나는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여권은 당연히 있으시죠?”
“물론이죠.”
“그러면 오늘 근로 계약서 쓰고 메일 주소 보내드릴 테니 곧장 그쪽으로 여권 사본부터 보내주세요.”
왜 여권부터 달라는 건지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출장 일정을 설명해줬다.
조만간 미국에 가야 하기에 같이 가려면 다미안의 항공권부터 예약해야 했다.
이것 역시 나중에는 다미안이 해야 할 일이나 아직 정식으로 출근하기도 전인데 그런 일을 맡길 수는 없었다.
“첫 출근은 삼일 뒤에 인천 공항으로 하시면 됩니다.”
*
사흘이 지난 뒤.
다미안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오저당에 면접 왔을 때 입었던 정장 차림으로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 입고 미국까지 가려면 엄청 불편할 텐데요. 괜찮아요?”
“아닙니다.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러지 말고 가서 갈아입어요.”
보는 내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다미안도 내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는지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화장실로 갔다.
잠시 후에 그는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되돌아왔다.
그렇다고 티셔츠 같은 것을 입은 것은 아니고 셔츠와 면바지였는데 키도 훤칠한 것이 제법 잘 어울려 보였다.
나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조금 더 커 보이니 185cm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앞으로 출장 가기 전에 별다른 말이 없으면 편하게 입어도 돼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삿짐은 다 챙겨놨죠?”
미국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
서준석 부장이 허머를 끌고 서울로 올라올 예정이었다. 요즘 그는 F&B 문제 때문에 종종 서울에 출장을 와야 했다.
고시원에 살던 다미안의 짐은 다행히 그리 많지 않다고 하니 허머의 짐칸에 싣고 오저당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이럴 때는 역시 큰 차가 좋다니까.
오저당의 법인 명의로 여러 종류의 차를 리스해서 운영 중이나 그중에서도 허머는 주로 내가 자주 타는 차였다.
처음에는 차폭이 넓어 조금 부담되었으나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을 마쳤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사과 박스 몇 개 정도거든요.”
“생각보다 적네요.”
“짐이 많아질수록 공간이 줄어드니 자연스럽게 미니멀리스트가 되더군요.”
서너 평에 불과한 공간에서 사는 것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살던 미국의 집은 적어도 마흔 평은 되었고 잠시 얹혀살던 삼촌 집도 서른 평이 넘는 아파트였다.
하지만 다미안이 불우해 보이진 않았다.
독립해서 공부를 하느라 조금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으나 스페인에 계신 아버지는 꽤 부유하신 편이라고 했다.
이민 초창기에 시작한 사업이 잘되어 자수성가한 사업가라고 들었다.
결국에는 다미안의 자존심 때문에 도와달라고 하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출출한데 아침부터 먹을까요?”
“시간이 조금 애매하니 일단 출국 수속부터 하고 식사하러 가시죠.”
다미안은 슬슬 자신이 뭘 해야 하는 건지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제안대로 짐을 부치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항공사 부스 앞에 도착해 항공권을 꺼내려고 하자 그제야 다미안은 가장 궁금해하던 것을 물어봤다.
“그런데 어디로 출장을 가는 거죠?”
“제가 말해주지 않았나요?”
“네, 그냥 인천공항으로 오라고만 하셔서···.”
하긴 항공권 예약도 다미안의 여권 받아서 오저당의 직원이 해줬다.
그런데 목적지도 모르면서 출장 가는 짐은 어떻게 싼 건지 궁금했다. 아무튼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딘지 설명해줬다.
“렉싱턴에 있는 OGD USA의 파사데나 증류소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