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는 과학이야 (2)
미국의 파사데나 증류소.
몇 개월 만에 들린 그곳의 풍경은 상당히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미 부지 한편에는 컨테이너가 두 개 들어와 있었다.
그곳의 사용 용도는 철거 및 건축을 진행하기 위한 현장 사무소였다.
트럭과 중장비도 많이 보였다.
전부 철거를 위한 장비들이었다.
이미 예정되어 있던 대로 증류소의 건물 중에 두 곳은 완전히 허물 텐데 그 작업의 시작이 바로 오늘이었다.
“이분이 증류소 건축을 맡아주실 HAS의 로버트 핸슨 씨입니다.”
핸슨은 전형적인 미국 백인이었다.
덥수룩한 수염 때문인지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를 즐길 것처럼 인상이 강했다.
건축 쪽에서 일하는 이답게 거칠어 보였는데 말투는 또 그렇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오래된 증류소를 재건하는 작업은 언젠가 꼭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랄까··· 꽤 지적인 말투였다.
역시 외모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
HAS는 O&D의 오스카가 적극적으로 추천한 업체였는데 실적만 놓고 보면 증류소를 지을 정도의 급은 아니었다.
대규모 건설을 주로 하는 업체인데 다행히 스케줄이 잘 맞아서 파사데나 증류소를 맡아주기로 했다.
아마 거기에는 오스카의 입김도 상당히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
“전달받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저 나무는 절대 건드리시면 안 됩니다.”
“네, 이미 모든 인부에게 신신당부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이제부터 시작해도 될까요?”
“그러시죠.”
“혹시 모르니 현장에서는 안전모랑 보안경은 계속 쓰고 계시는 게 좋습니다.”
핸슨은 나와 다미안에게 주의를 준 뒤에 중장비에 탑승한 이에게 무전을 쳤다.
그가 시작하라는 신호를 주자 커다란 중장비에 시동이 걸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크레인으로 쇳덩이를 휘둘러 무너뜨릴 것 같았는데 그건 먼지가 많이 나서 안 쓴다고 했다.
대신 집게와 버켓이 달린 두 대의 굴삭기로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
한 채의 폐허는 금방 허물어졌다.
향이와 내가 요정을 발견한 건물인데 애초에 벽면만 남은 부분이 많았기에 정말 순식간에 폭삭 주저앉았다.
멀리 떨어져서 그걸 구경하고 있자 오스카와 도니 형제가 다가왔다.
미국에 올 때마다 봐서인지 다행히 도니는 이제 향이를 보고 처음에 봤을 때처럼 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시선만 따라다닐 뿐이었다.
덕분에 향이는 내 곁에서 떨어질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도니 앞에서 눈을 맞추며 싱긋 웃어주는 여유까지 생겼다.
“드디어 공사가 시작되는군요.”
“그동안 설계하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대놓고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두 형제는 상당히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으로 진행하는 증류소 설계를 완성하기 위해 렉싱턴을 비롯한 미국의 여러 증류소를 견학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작업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었고 설계를 진행하는 중간에도 내게 계속 연락해서 의견을 물어봤다.
증류소에 들어가는 설비와 증류 규모 그리고 보관하는 방식까지 최대한 맞춰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문제는 나도 답해주기 어려웠다.
한국에서 양조장도 운영해봤고 테킬라 생산도 얼추 프로세스를 이해하고 있으나 버번 증류소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결국, 도움을 받아야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스코틀랜드에 계신 마스터 디스틸러인 테넌트였다.
스카치와 버번의 생산 과정은 다르나 워낙 많은 증류소를 다닌 분이다.
테넌트는 많은 조언을 해줬고 고맙게도 은퇴하신 버번위스키 디스틸러 몇 분을 소개해줘서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 나온 설계는 그 모든 것이 반영된 완성본이었다.
“저희도 상당히 재미있게 작업했던 몇 안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하하. 그러셨다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정말 완공이 될 때까지 여기서 머무실 생각이신가요?”
O&D 설계 사무소가 그런 식으로 자주 일하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 들었다.
이미 설계도가 나왔기에 이제는 HAS 건축 사무소의 헨슨이 바통을 넘겨받아서 만들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제 동생은 자신이 설계한 것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아서 어차피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거든요.”
“그러면 프로젝트를 하나 할 때마다 상당히 텀이 길게 잡히겠네요.”
“저는 이 녀석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오스카는 멋쩍게 웃으며 솔직한 심정을 내게 말해주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O&D에 도니만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설계 기사들도 있기에 운영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는 않다고 했다.
“저는 형제가 없어서 그런지 두 분의 우애가 참 부럽네요.”
“하하! 저희도 다른 형제처럼 엄청 싸우고 또 화해하고 그럽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이곳 증류소에 들어갈 요정 동상을 만들 조각가님은 염두에 두고 계신가요?”
파사데나 증류소의 설계를 하며 도니는 증류소 곳곳에 요정 동상을 설치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광장 한복판에 세워지는 거대한 수준의 동상은 아니고 주먹만 한 요정들을 바라고 있었다.
폴란드의 난쟁이 마을 브로츠와프.
그곳처럼 꾸미고 싶다고 욕심을 내고 있었는데 예시로 들은 그 마을의 사진을 본 나는 도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케이크를 훔치는 2인조 난쟁이.
ATM기 앞에서 돈을 뽑는 난쟁이.
심지어 학교 앞에는 교수 난쟁이와 소방관 그리고 죄수 난쟁이까지.
상당히 재치 넘치는 조각상이 곳곳에 있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조각상 덕분에 브로츠와프는 꽤 특색있는 마을이 됐다.
무엇보다 향이가 가장 기뻐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정말 증류소에 그걸 설치하시려고요?”
“네, 한국도 비슷하게 몇 개 만들어서 배치해놨는데 반응이 좋더라고요.”
“음··· 딱히 누굴 콕 집어서 이야기한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혹시 모르니 제가 도니에게 물어볼게요.”
지금 당장 물어보긴 어려울 것 같았다.
도니는 향이에게 푹 빠져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지금 그에게는 향이가 이 세상의 전부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HAS의 직원이 뭔가 의논할 게 있다며 오스카를 찾았고 나는 잠시 뒤로 물러나서 다미안에게 다가갔다.
그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오늘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잘 되고 있나요?”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미디어 부서에서 마음에 드실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차피 따로 촬영하는 사람이 있으니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
증류소를 재건하는 작업.
그 모든 과정은 영상에 담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가 몇 개월 동안 여기에 매달릴 수 없기에 따로 프리랜서를 고용해서 HAS에 붙이기로 했다.
단순하게 촬영 때문만은 아니다.
OGD USA에서 이 공사 현장에 직원 한 명 정도는 두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완공되기 전까지 완전히 손을 놓고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는지,
혹시 문제가 생길 일은 없는지,
현장에서 지켜볼 사람이 필요했다.
일종의 감사 역할인데 거기에 촬영 업무를 추가한 거라 보면 되었다.
‘그래도 참 열심히 하네.’
다미안이 출근한 지 나흘이 지났다.
첫 출근부터 출장을 와서 어제까지는 다소 산만해 보였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감을 잡았는지 눈치껏 일을 하고 있었다.
노력 없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내가 요청해서 일을 진행할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너무 과해서 선을 그어 적절한 수준을 유지하게 해야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서로 맞춰가는 중이었고 비서를 둔 효과는 곧 체감됐다.
내 스마트폰으로 연락이 오는 것부터 상당히 많이 줄었고 대부분은 다미안을 통해서 스케줄이 정리되고 있었다.
당연히 그만큼의 지원도 해줬다.
인천에서 출국하기 전에 일정 정리를 하기 위한 고급 태블릿도 면세점에 들러서 하나 사줬다.
그때 페레즈가 다가왔다.
평소라면 굳이 LA에서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다고 했겠지만, OGD USA의 가장 큰 프로젝트인데 빠질 수 없었다.
“아까부터 안 보이던데 어딜 다녀온 거예요.”
“오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인부들이 마실 음료수를 사다가 HAS 컨테이너에 넣었습니다.”
“같이 가지 혼자 다녀온 거예요?”
“HAS 직원이랑 다녀왔습니다. 굳이 그런 데까지 직접 가실 이유는 없죠.”
오전에 지나가는 말로 음료수를 언급했더니 직접 다녀올 줄은 몰랐다.
그런 걸 안 사줘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으나 잘 부탁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번에 추가로 뽑은 직원들은 잘 적응하고 있나요?”
“대부분이 신입이라 제대로 써먹을 수준까지 키우려면 서둘러야죠.”
“아직 시간은 충분합니다. 그러니 너무 몰아붙이지는 마세요.”
일에 중독되어 있는 페레즈의 성격상 끝까지 남아있을 이가 얼마나 될까.
실제로 그가 올해 고용한 이들 중에 절반은 과도한 업무량에 질려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페레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적자생존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내년 4월에 슈미트가 합류할 때.
심양이 보유한 벽향주의 독점 기간이 끝나게 된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OGD USA의 움직임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 순간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래도 비교될 수밖에 없으니 초조하겠지.’
페레즈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됐다.
현재 미국 법인은 한국과 멕시코에 비해 상당히 밀리는 편이었다. 그 차이는 자체 생산 라인이 있냐 없냐에서 나왔다.
하지만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미국 시장을 개척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페레즈의 역할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가 노력한 덕분에 소담의 수출량은 나날이 수출이 늘어나고 있었다.
소담이 출시된 이후에 미국에서 수입한 수량만 40만 병을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OGD USA의 역할은 단순히 수입하는 것에 불과하기에 남기는 금액은 그리 많다고 할 수 없었다.
“이 속도대로 진행되면 내년 여름 정도부터는 버번을 빚을 수 있겠죠?”
“레시피를 인수 받은 것이 있기는 한데 수정하는 과정이 필요해서 정확하게 언제쯤이라 말하기는 어렵죠.”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회장님은 파사데나 버번 증류소의 성공 가능성을 얼마나 높게 보십니까?”
페레즈는 역시 돌직구 스타일이었다.
유통을 맡길 법인을 설립한 것인데 갑자기 폐허인 버번 증류소를 인수했던 게 아직도 이해되지 않아 보였다.
“글쎄요. 그저 잘 되길 바랄 뿐이죠.”
자신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요정의 도움만 제대로 받을 수 있다면 실패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하지만 변수가 있는데 석화된 요정의 부활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정말 상황이 안 좋다면,
당분간 내가 여기 머물러도 된다.
일반 요정이 없더라도 향이가 직접 버번을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조공을 엄청 해야겠지.’
아무리 향이라도 혼자 술을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다.
아차! 검이가 있으니 혼자는 아니지.
현재 그 녀석은 도니를 노려보며 향이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잊고 계신 것 같은데 제가 빚는 술치고 실패한 것은 아직 없습니다.”
“ASAP가 있지 않습···.”
“미국에서 아직 반응이 없을 뿐이지 동남아 쪽에서는 꽤 팔리는 중입니다.”
아직 페레즈는 태국 상황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나는 그 부분을 설명해줬다.
그 이야기를 듣자 페레즈는 웃으며 다행이란 표정을 지었다.
“미국에서는 ASAP 반응이 크지 않아서 조금 부담됐는데 다행입니다.”
“앞으로는 본사 상황을 포함해서 오저당의 전체적인 진행 현황을 정리해서 공유할 테니 참고하세요.”
“안 그래도 제안드리려고 했는데 그렇게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본사에서는 멕시코와 미국 법인의 일을 모두 모아서 체크하고 있지만, 현지 법인은 전체적인 큰 틀을 보지 못했다.
나는 그게 문제라 여겼기에 곧장 개선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당연히 그 내용은 기업 비밀이다.
페레즈와 슈미트 그리고 호르헤 같은 이들만 접근 가능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그 부분을 강조하자 페레즈는 당연한 일이라며 수긍했다.
“다만, 홍보 자료에 써도 되는 내용은 미리 구분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죠.”
“이제 슬슬 여기서 빠져도 될 것 같은데 이후의 일정은 혹시 어떻게 되십니까?”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가 여기서 얼쩡거려봤자 철거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이미 O&D에서 나온 이들도 하나둘 빠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시계를 슬쩍 본 이후에 여기서 조금 떨어진 루이빌로 갈 거라고 밝혔다.
그러자 페레즈는 LA로 갈 거냐며 물었는데 나는 공항에 가기 위해 루이빌에 가는 게 아니었다.
“여길 떠나기 전에 증류소를 맡길 디스틸러부터 구하러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