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87화 (187/254)

위스키는 과학이야 (3)

술은 생각보다 민감한 존재다.

어떤 재료를 쓰고 숙성하는 과정을 어떻게 설계하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당연히 그 과정을 조율하는 디스틸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증류소의 CEO가 선장이라면,

디스틸러는 목적지로 이끄는 항해사다.

자칫 방향을 잘못 잡으면 길게는 십여 년 이상의 시간을 날릴 수도 있다.

한마디로 증류소의 코어인 탓에 디스틸러가 내리는 판단에 의해 증류소의 흥망성쇠가 갈릴 가능성이 매우 컸다.

더구나 증류소의 핵심이 되는 레시피도 그들의 머릿속에 있으니 어지간하면 다른 증류소로 옮기는 경우도 흔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대형 증류소의 경우에는 테넌트처럼 수십 년 동안 일한 마스터 디스틸러를 상당히 흔하게 볼 수 있다.

‘나 같아도 쉽게 놔주진 않을 거야.’

수호와 호세 그리고 호르헤.

오저당도 이들 중의 한 명이라도 빠지면 상당히 타격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의존도는 더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절대라는 것은 없다.

마스터가 아닌 일반 디스틸러 경우에는 이직을 하거나 독립하는 케이스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보통 신생 증류소에서 그런 이들을 고용하는 편이다.

“그러면 다른 증류소에서 디스틸러를 스카우트해서 데려오실 생각이십니까?”

운전대를 잡고 있는 페레즈는 내게 어떤 디스틸러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물었다.

이제 건축이 시작되었으니 슬슬 준비할 때가 되기는 했다.

“후보 중에 현직 디스틸러도 있지만, 제가 원하는 이는 따로 있습니다.”

“혹시 누군지 여쭤봐도 됩니까?”

“글쎄요. 아직 확실한 거는 아니니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되면 알려줄게요.”

디스틸러 선정은 내 몫이다.

이 문제는 다른 이가 관여할 수 없다.

애초에 페레즈는 수출입과 유통이 전문이었고 술을 빚는 것에 대한 상식은 일반인 수준에 불과했다.

그건 슈미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파사데나가 OGD USA에 소속된 증류소라도 생산 시설과 디스틸러 선정에 대한 것은 전적으로 내가 맡았다.

다만, 운영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나중에 증류소를 운영하는 것은 결국 슈미트 아래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그렇기에 증류소를 경영하는 쪽은 슈미트가 적당한 사람을 찾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차를 세운 곳은 루이빌의 공항 주차장이었다.

차가 멈추자 다미안은 곧장 짐부터 챙겨서 꺼내기 시작했는데 페레즈는 찝찝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정말 저 먼저 가봐도 되는 겁니까?”

“이제 여기서 페레즈가 할 일은 딱히 없으니까요. 한국에서 보낸 컨테이너도 곧 들어오니 어서 가봐요.”

“알겠습니다. 그럼 남은 일정 잘 마무리하고 돌아가십쇼.”

“짐은 다 꺼냈습니다.”

다미안이 캐리어를 가지고 오자,

페레즈는 살포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하지 않던 행동인데 한국 출신 직원과 함께 일하며 저절로 몸에 익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LA에 있는 탓일까.

새로 뽑은 직원 중에 한국 계열의 직원이 제법 되었다. 어쩌면 본사가 한국에 있는 탓에 생기는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페레즈는 일단 발걸음을 옮긴 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항으로 들어갔다.

걸음걸이에서도 그의 성격이 묻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다미안은 운전석의 문을 열며 내게 물었다. 페레즈가 여기까지 운전했지만, 여기서부터는 그가 운전해야 했다.

미리 국제운전면허에 대해 말해주진 못했는데 다행히 2019년 이후에 발급받은 면허증이라 사용이 가능했다.

“루이빌 대학교로 가죠.”

“대학교요?”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이 거기 있거든요.”

누굴 만나려는 건지 다미안은 상당히 궁금한 것 같았으나 내게 묻진 않았다.

모든 것을 설명해줄 필요가 없다는 듯이 스스로 그쯤에서 선을 그은 것이었다.

나쁘지 않은 자세였다.

출장을 진행하며 모든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것도 조금 피곤한 일이었다.

비밀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차피 결과로 알게 될 것이다.

대학교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공항에서 고작 4마일 거리밖에 안 되었기에 5분도 안 돼서 도착할 거리다.

하지만 생각보다 대학교까지 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와··· 오늘 무슨 날인가요?”

“그러게요. 이 동네에 차가 이렇게 많은 거는 저도 처음 보네요.”

“아무래도 저쪽에 있는 경기장으로 가는 사람들인 것 같은데요.”

다미안이 시선은 카디널스 스타디움에 꽂혀 있었다. 실제로 그쪽으로 가는 방향만 유독 막히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제야 오늘 이곳에서 미식 축구 경기가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아차! 오늘이 루이스 대학교 경기 날이잖아요.”

하필 출장 일정과 겹치는 탓에 숙소 예약하는 것도 상당히 힘들었는데 렉싱턴에 있었기에 잠시 까먹고 있었다.

이미 차는 앞뒤로 막혀 있기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다들 축제 분위기네요.”

“혹시 좋아하는 스포츠 있어요?”

“저는 NBA 팬입니다. 어릴 때부터 농구를 많이 했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사장님은 어디 팬이신가요?”

나? 당연히 워리어스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내 또래 친구들 중에 대부분은 나와 비슷할 거다.

10대 때는 종종 아버지와 함께 직관도 다녔을 정도였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긴 했다.

워리어스에서 여러 번의 우승을 이끌었던 멤버 대부분이 은퇴했다.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리빌딩 중이라 요즘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다미안은 응원하는 구단이 있나요?”

“아뇨. 저는 두루두루 보는 편입니다.”

“언제 한 번 같이 직관하러 가야겠네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빈말은 아니었다.

요즘 NBA 인기가 상당했다.

시간이 되면 휴가 삼아서 한 번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약속 시간에 늦을 거 같으니 그냥 걸어갈게요.”

“한참 걸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저기 코너만 꺾으며 대학교니까 얼마 안 걸릴 거예요. 미팅 끝나면 연락할 테니 호텔에서 잠시 쉬고 있어도 됩니다.”

그렇게 말을 한 뒤에 문을 열고 내리자 다미안이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왠지 버려두고 혼자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 약속을 잡으려고 들인 노력이 상당했는데 우리 쪽에서 늦을 수는 없지.

다미안을 뒤로 하고 빠른 걸음으로 걷자 확실히 차보다는 훨씬 빨랐다.

그렇게 십여 분쯤 걸었을까.

마침내 루이빌 대학교가 보였다.

그 안으로 들어간 나는 J.B. Speed school 쪽으로 향했는데 역시나 그곳에 있는 주차장도 가득 차 있었다.

[걸어오지 않았으면 늦을뻔했네요.]

“아무리 MLB가 예전만큼의 인기는 아니어도 월드시리즈잖아.”

[저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더 편한 것 같아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젠 사람이 북적이는 곳이 싫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걷는 것은 파도에 휩쓸리는 기분이랄까. 내 마음대로 방향을 꺾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어쨌든 약속에 늦진 않았다.

정확하게 1분 전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살피다가 깊은 호수 같은 청록색 눈동자를 가진 금발의 여인을 찾아냈다.

미인이라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그녀가 바로 오늘 만날 사람이었다.

사진으로 먼저 얼굴을 익히기는 했으나 오히려 실물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케이티 업튼 씨 맞으시죠?”

내가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걸자,

그녀는 꽤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OGD의 대표로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는데 내가 예상보다 너무 젊어서 그런 것 같았다.

“혹시 OGD에서 오신 분이 맞나요?”

“네, 제가 전화드렸던 주도찬입니다.”

“그러시군요. 일단 이야기 나눌만한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요?”

“그러시죠.”

케이티라고 불러달라고 부탁한 그녀는 대학교 내에 있는 카페로 안내해줬다.

다들 미식 축구 열기에 휩싸인 탓인지 카페 내부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할아버지한테 연락을 받기는 했는데 저를 스카우트하고 싶다고요?”

“가능하다면 함께 일해보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인가요? 저는 아직 학생에 불과한데요.”

케이티의 신분이 아직 대학생인 것은 맞다. 아직 그녀는 이곳에서 화학 전공을 공부하는 중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그것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었다.

업튼 가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곳 루이빌에서 업튼 가문은 백여 년 동안 마스터 디스틸러를 배출해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케이티는 최고의 재능이라 불리고 있었다.

경력이 짧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보다 훨씬 더 길었다.

어린 시절부터 케이티는 할아버지가 일하던 투로즈 증류소를 드나들었고 학생 때부터는 테이스터로 일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미각 덕분이다.

내게 케이티를 소개해주신 몇 명의 마스터들은 그녀가 가진 재능을 신의 선물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나는 그 재능을 사고 싶었다.

“디스틸러에게 가장 중요한 재능이 테이스팅이니까요. OGD에서 함께 일하면 후회하진 않으실 겁니다.”

“글쎄요. 저는 지금 일하는 곳에서 마스터까지 올라갈 생각이라 다른 곳에 취업하는 것은 달갑지 않네요.”

“현재 일하고 계신 투로즈 증류소에서는 사촌 오빠들이 차기 마스터로 거론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업튼 가문 내에도 경쟁이 치열했다.

케이티와 나이가 꽤 차이 나는 사촌들의 경력은 이미 십여 년 이상인 상황이다.

그들을 제치고 마스터로 올라가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어요.”

“그 외에 또 다른 문제가 있죠.”

“그게 뭔가요?”

“새로운 술을 만들고 싶어서 화학 전공을 택한 거 아닌가요? 투로즈에서는 그게 쉽지 않을 텐데요.”

역사 깊은 증류소일수록 새롭게 레시피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기껏해야 약간의 변형을 해서 새로운 라인업을 내놓는 것이 전부다.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괜히 도전적인 제품을 내놨다가 기존의 고객마저 잃을 수 있으니 변화보다는 전통을 유지하는 쪽을 택하기 마련이다.

“OGD는 다른가요?”

“물론이죠. 저희는 어떤 술을 빚으셔도 버번이라는 정체성만 잃지 않는다면 전폭적인 지원을 해드릴 겁니다.”

“뭘 믿고 저한테 그런 제안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제가 믿는 것은 테넌트의 안목입니다.”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았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테넌트다.

그는 자신이 만났던 수많은 디스틸러와 전문 테이스터 중에 가장 뛰어난 미각을 지닌 사람이 케이티였다고 말했다.

“하아! 이 할아버지들이 정말··· 그래서 OGD의 조건은 어떻게 되나요?”

일단 조건 먼저 들어볼 생각인 것 같기에 나는 제법 큰 제안을 하기로 했다.

이번 디스틸러 영입이 실패라 하더라도 재능 넘치는 마스터 급의 테이스터를 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는 장사였다.

“연봉 8만 달러에 제가 제시하는 조건을 달성하면 12만 달러로 올려드리고 마스터 디스틸러 자리도 드리겠습니다.”

“무슨 조건인데요?”

“파사데나 증류소가 보유한 레시피를 완성시켜주셨으면 합니다.”

적어도 실력은 검증해야지.

무턱대고 마스터 자리를 줄 생각은 없다.

케이티는 완성의 기준이 미묘하다고 말했는데 기준점은 명확하다.

새로운 요정이 나타나거나,

아니면 석화된 요정이 부활하거나.

두 가지 중에 하나라도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건 실패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설명하기는 어렵기에 나를 비롯해 수호나 호세 같은 기존의 디스틸러의 평가로 대충 둘러댔다.

대신에 기간은 넉넉하게 줄 생각이었다.

“아까는 자유롭게 술을 빚어도 된다고 하셨는데 매시빌(Mash Bill) 복원이 우선인가요?”

“베이스만 놔두고 변형해도 되고 정말 자신 있으면 어떤 버번이라도 그 이상의 결과물만 내놓으면 됩니다.”

파사데나 버번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나도 아직 알 수 없기에 그걸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케이티는 잠시 입을 닫고 고민에 빠졌다.

그쯤에서 나는 서류 가방을 열어 태블릿을 꺼냈다. 아마 이걸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현재 짓고 있는 증류소의 조감도입니다. 아마 완공된 모습과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화면에 띄워진 것은 도니와 라니가 그린 증류소의 조감도였다. 그곳에는 앞으로 설치될 조경도 구현되어 있었다.

거의 테마파크 수준으로 꾸며질 예정인 증류소의 모습을 본 케이티는 처음으로 환한 미소와 함께 흥미를 보였다.

역시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케이티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지만,

그녀가 메고 있던 가방에 걸린 여러 인형만 봐도 성향은 쉽게 추측 가능했다.

‘역시··· 귀여운 것에 사족을 못 쓰는 스타일이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