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는 과학이야 (4)
빈틈이 느껴지는 순간.
본격적인 공략을 시작했다.
조감도에 이어서 오저당에서 만든 여러 종류의 판촉물 사진까지 보여주자 케이티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머! 이거 너무 귀엽네요.”
하지만 진짜는 따로 있었다.
카톡용으로 만든 향이의 이모티콘을 보더니 케이티는 상당히 부러워했다.
라니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고퀄로 만든 것도 이유였으나 미국에서 쓰는 채팅앱 자체가 그런 쪽으로는 부실했다.
“이게 현재 오저당에서 진행 중인 스프라이트 컬렉션입니다.”
“혹시 렉싱턴에 짓는 버번 증류소도 이쪽 라인업에 들어가는 건가요?”
“물론이죠. 저희가 괜히 버번 증류소에 요정 컨셉을 적용한 게 아닙니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술만 컬렉션에 넣고 있다고 말하자 케이티는 당연히 버번이 들어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누가 업튼 가문이 아니랄까 봐 버번에 대한 애정이 상당했다.
“버번에 들어가는 요정은 카우보이가 될 가능성이 높겠죠?”
아무래도 그게 가장 무난할 거다.
하지만 아직 확답을 주기 어려웠다.
파사데나가 정상화되면 어떤 형태의 요정이 나올지 아직 알 수 없었다.
‘혹시라도 인디언 요정이 나올 수도 있잖아. 그러면 대참사지.’
이게 애매한 것이 석화된 요정은 딱히 눈에 띄는 복장을 입고 있지 않았다.
마치 전신 레깅스를 입은 것처럼 매끈한 몸체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상상력을 동원해서 만들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그곳에 머물고 있는 요정을 베이스로 만들고 싶었다. 이게 은근히 요정들에게 잘 먹히기 때문이다.
스프라이트 컬렉션이 생긴 후부터.
멕시코와 한국의 요정들은 뭔가 동기부여가 되는 건지 조금 더 활기찬 느낌이 들었다.
그게 아니면 과거에 향이가 말했던 것처럼 요정을 믿는 이들이 늘어난 건가.
어쨌든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기에 그걸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거기까지 논의되진 않았습니다.”
“이제 막 증류소를 재건하기 시작했으니 아무래도 그렇겠죠. 제안하신 거를 수락하면 언제부터 일해야 하는 거죠?”
“졸업 일정 때문인가요?”
케이티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미국의 대학은 한국과 학기 제도가 달라서 대부분 6월에 졸업하게 된다.
학점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케이티가 졸업하는 것은 내년 여름이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공사 중이라 그맘때 합류해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내년 상반기는 수업이 별로 없으니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것까지는 가능해요.”
“그건 차차 의논하죠. 그전에 우리 OGD와 계약하실 건지 먼저 확답을 주실 수 있습니까?”
더 깊은 논의를 하기 전에 그것부터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괜히 나중에 말을 바꾸면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케이티는 승낙하기 전에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신제품 개발을 진행할 Lab이 필요한데 마련해주실 수 있나요?”
“어느 정도 규모를 원하시는 거죠?”
“제품 개발을 하려면 저를 제외하고 미생물학 전공자 포함해서 두 명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원하시는 설비도 10만 달러 이내라면 뭐든 사서 진행하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언젠가 필요한 시설이었다.
지금까지 주먹구구 방식으로 신상품을 개발했던 그대로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올라가려면 필요한 것이 신제품 개발에 대한 투자다.
미국은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시간을 두고 한국과 멕시코에도 관련된 시설을 만들 생각이었다.
중복 투자가 되지 않게 한곳에 모으고 싶어도 법인이 다르고 각 나라의 농산물 등의 재료를 모으는 것도 일이다.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원래 계획하고 있었던 거니까요.”
“언제 다시 만나서 사인하면 되죠?”
“곧장 계약서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요?”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인 후.
호텔에 있을 다미안에게 조금 전에 대화한 내용을 전달해서 계약서를 가지고 와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미국에 오기 전에 미리 페레즈에게 계약서 초안을 부탁해서 받아 놓은 상태라 어려운 지시 사항은 아니었다.
계약 금액과 케이티의 요청을 추가하는 것만 해주면 될 뿐이었다.
[그 주변에 차가 막혀서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길게 잡으면 한 시간쯤 걸리려나.
꽤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우선 케이티에게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차가 막혀서 한 시간쯤 걸릴 것 같다고 하는데 시간 여유가 있으신가요?”
“다른 약속은 없어서 괜찮아요.”
“그러면 식사라도 할까요?”
“좋죠. 제가 이 근처에서 가장 맛있는 곳으로 안내할게요.”
케이티는 주차장에 있는 자신의 차를 타고 움직이자고 제안을 했다.
케이티가 운전대를 잡은 차는 꽤 커다란 픽업트럭이었는데 상당히 관리를 잘하고 있는 티가 여기저기서 보였다.
“밖에 많이 막힌다고 하는데 걸어서 갈만한 곳은 없나요?”
“경기장 반대편에 있는 서문으로 나가면 괜찮을 거예요.”
확실히 그녀의 말은 맞았다.
서쪽 편은 그나마 한산했고 5분 정도 달려서 시내에서 살짝 벗어나니 몇 곳의 레스토랑이 눈에 보였다.
케이티는 그중의 한 곳에 차를 멈췄다.
“멕시코 음식점인데 괜찮으세요?”
“좋죠. 돈 레오넬 때문에 멕시코 출장을 몇 번 다녀왔는데 입맛에 잘 맞더군요.”
“아··· 맞다. 돈 레오넬도 오저당에서 빚는 술이었죠. 그건 도대체 언제 품귀 현상이 풀리는 건가요?”
케이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만이 담겨 있는 느낌이었다. 보통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뻔한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돈 레오넬을 구하지 못했던 거겠지.
“원하신다면 채용 선물로 돈 레오넬을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까지 도움을 주신 마스터분들에게 돈 레오넬을 선물로 보내드릴 생각이었다. 거기에 한 세트 정도 더 넣는다고 문제될 것은 없었다.
내 제안을 들은 케이티는 무척이나 반겼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맛인지 너무 궁금했는데 이 동네는 버번 위주로 팔아서 구하기 너무 힘들었어요.”
“버번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루이빌이니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대화를 하며 음식점에 들어간 우리는 가볍게 요기할 정도만 주문했다.
시간대가 헤비한 음식을 먹기에는 조금 애매했다. 그러는 사이에 케이티는 증류소에 들어갈 설비부터 확인했다.
“제 생각에는 발효조 크기가 조금 더 큰 걸로 들여놓거나 적어도 두어 개쯤 더 설치해야 할 것 같아요.”
“어떤 이유 때문이죠?”
“적어도 이틀에서 삼일 정도는 발효해야 하니 생각보다 발효조에서 작업 시간이 밀리는 일이 많더라고요.”
그런 수정 사항 정도는 지금이라도 충분히 수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 증류소가 본격적으로 지어지기 전에 미리 디스틸러를 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설비에 대한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증류소를 놀이터 삼아 자랐던 터라 케이티의 지식은 꽤 깊었다.
그녀는 거대한 구리 주전자와 비슷한 구조인 텀퍼와 비어스틸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했다.
“그러면 메시 쿠커랑 발효조는 어느 건물에 들어갈 예정인가요?”
“여기에 있는 건물이요.”
“동선을 고려하면 거기가 최선이겠네요.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효모에요.”
버번 증류소는 대부분 자체 생산하는 효모를 사용하는 편이다. 당연히 폐허가 되었던 파사데나에 그런 것은 없었다.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상황이다.
기존의 효모를 개량하는 것도 힘든 일이나 새롭게 만드는 것은 어지간한 마스터도 해본 경험이 없을 거다.
“아까 요청하신 제품 개발 인력을 동원해서 직접 만들거나 한국에서 만든 누룩을 가져오는 것도 방법이겠죠.”
“여분의 누룩이 있나요?”
“당장은 그리 많지 않은데 만약에 그걸로도 괜찮다면 어떻게든 맞춰야죠.”
인력만 더 보충되면 될 것 같았다.
오저당에서 만드는 누룩은 모든 작업이 수작업이라 무엇보다 인력이 중요했다.
본격적인 버번 생산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많은 양이 필요하진 않을 테니 당장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더구나 요정이 빚는 누룩이다.
다른 증류소의 것과 비교할 수 없다.
오저당의 누룩은 균일했고 그걸 가지고 빚은 술은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오죽하면 다른 양조장에서 우리 누룩만 따로 구매할 수 없냐고 할 정도였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직 설비는 주문이 들어가지 않았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정리해서 보내주세요. 최대한 맞춰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호호. 알겠어요.”
“저기 나오는 음식이 우리 것 같은데 먹으면서 이야기하죠.”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케사디아와 타코는 제법 푸짐했는데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이 소스였다.
함께 나온 소스만 다섯 가지가 넘어갈 정도였다.
“소스가 많아서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초록색 특제 소스가 가장 괜찮더라고요.”
“으음, 확실히 맛있네요.”
살짝 매운 느낌이었지만,
확실히 특제 소스라 불릴 만했다.
당연히 그녀도 특제 소스를 뿌릴 거라 생각했기에 소스 통을 내밀었으나 케이티는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아! 저는 소스 안 뿌려서 먹어요.”
소스 없이는 조금 밋밋한 느낌인데 왜 그러냐고 묻자 그녀는 테이스팅 때문이라고 했다.
“가능하면 자극적인 음식은 안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서 요즘은 소스 같은 것도 최대한 자제 중이에요.”
“아··· 그렇군요.”
“오래 일하려면 지금부터 관리해야 한다고 다들 말씀하셔서요.”
“프로다운 자세네요.”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상에 먹지 못하는 음식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깨작거리지는 않았다.
케이티는 음식을 복스럽게 먹는 편이라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장담했던 것처럼 음식점의 퀄리티가 좋았다.
“여기 정말 맛있네요.”
“제가 괜히 단골이 된 게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언제가 현지에 가서 먹어보고 싶기는 해요.”
“항공권은 제공해드릴 테니 시간이 될 때 OGD 멕시코에 한 번 다녀와 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해외 법인끼리 교류도 중요하다.
단순하게 톱다운 방식으로 오저당이 운영되는 것은 바람직한 구조가 아니다.
나는 각각의 법인이 협력하며 움직일 수 있는 구조를 바랐다.
한국에서 각 나라의 사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파악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케이티는 아직 해외에 나간 경험이 없다며 무척이나 반겼다.
그것도 요즘 핫한 돈 레오넬 증류소라니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자,
케이티의 말이 뚝 끊긴 느낌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내 뒤로 꽂혀 있었는데 고개를 돌려 보니 다미안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 눈빛 뭔지 알 것 같아요.]
향이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케이티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봐도 심상치 않은 것이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한 표정이었다.
다미안이 조각상 같은 미남은 아니나 훈남인 것은 나도 인정하는 바였다.
더구나 혼혈이라 그런지 뭔가 묘한 매력이 있었다.
“사장님. 말씀해주신 대로 계약서 수정해서 가져왔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이분이 앞으로 파사데나를 맡으실 디스틸러입니다.”
“케이티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옆에 계신 주 사장님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다미안입니다.”
옆에서 지켜보자니 꽤 재미있었다.
케이티가 눈도 떼지 못하고 있는 반면에 다미안은 전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아마도 첫 출장이자 중요한 계약이 진행되는 순간이라 여긴 건지 그런 것까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우선 계약서부터 쓰실까요?”
서류 봉투를 열며 케이티에게 묻자,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내게서 계약서를 받아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거기에 담긴 내용은 기본적인 근로 계약서 수준이었는데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매시빌에 대한 비밀 서약이었다.
주조 방식과 배합 비율 등.
오저당에서 술을 빚는 것에 대한 사항은 비밀로 해야 하며 유출시 법적인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과한 편은 아니었다.
이미 다른 증류소의 디스틸러에게 물어서 업계 평균 수준으로 작성한 거다.
케이티도 대충은 업계 사정을 알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다.
“여기 사인하면 되는 거죠?”
케이티는 망설임 없이 사인했다.
한동안 가장 커다란 숙제로 남아 있던 파사데나의 디스틸러가 구해졌기에 나는 흡족한 미소로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좋은 버번을 빚어주시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