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90화 (190/254)

신이 주신 기회 (2)

월드 스타의 일정은 빡빡했다.

봄에 시작한 투어는 반년이나 지속됐다.

십여 곳이나 되는 국가에서 길고 긴 투어를 마치자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

당연히 RJ의 일정은 알고 있었다.

이번 주에 독일에서 마지막 콘서트가 있는데 그걸 끝내고 약간의 휴식 기간 뒤에 연락을 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투어 중에는 매니저와 연락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RJ가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닌지 의심됐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도 생각보다 빨리 일정이 잡혔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전에 매니저가 했던 말이 있기에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아마 우리 오저당에서 쉬려는 거겠지?’

체험도 중요하지만, 힐링이 포인트라나.

예전에 라니와 함께 직접 콘서트를 가보니 한번 공연할 때마다 에너지 소모가 엄청난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2시간 가까이 거의 모든 무대를 멤버 전체가 소화하며 뛰어다녔을 정도였다.

멤버 대부분이 30대를 넘어섰기에 격한 안무를 보기만 해도 힘든 게 느껴졌다.

어쨌든 나는 그길로 곧장 한국으로 돌아오는 항공권을 찾아야 했고 다행히 일정보다 며칠 일찍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그리 쉽진 않았다.

남아있는 항공권이 거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부터 LA까지 인근 공항을 싹 다 뒤졌으나 대부분 매진된 상태였다.

현재 선택할 수 있는 표는 비즈니스와 퍼스트 클래스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와··· 비즈니스 클래스는 다르네요.]

향이는 비행이 시작된 후부터,

촐랑거리며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 여러 번 비행기를 탔으나 이렇게 좋은 좌석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나도 조금 신기했다.

확실히 돈이 좋기는 한 것 같았다.

기존에 타던 이코노미 좌석에 비해 세 배나 비싸게 산 좌석이라 그런지 안락함과 서비스의 차원이 달랐다.

반면에 다미안은 불편한 얼굴이었다.

항공권을 예매할 당시부터 그는 나와 별개로 원래 예정대로 며칠 뒤에 이코노미를 타고 귀국하길 원했다.

미국에서 놀려고 그런 것은 아니다.

고작 며칠 차이인데 자신의 표까지 비즈니스로 사야 하는 것에 대해 조금 부담스럽게 여겼다.

“기왕에 탄 비즈니스 좌석이니 즐겨요. 돈 많은 사람들이 왜 비즈니스나 퍼스트 클래스를 타는지 아시나요?”

“편하게 이동하려는 게 가장 큰 이유 아닌가요?”

다미안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볼 수 있다.

몇백만 원 정도를 투자해서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수십억 이상의 계약을 무사히 끝낼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오저당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런 일이 종종 생길 수 있으니 적응하세요.”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졸부처럼 돈을 흥청망청 쓸 생각은 없으나 필요한 순간에 망설여서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여전히 세계 최고의 팬덤을 자랑하고 있는 아이돌 그룹의 리더가 RJ다.

RJ의 오저당 방문은 적어도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잠시 스튜디어스가 제공한 어매니티를 신기한 듯 살피던 다미안은 문득 떠오른 것이 있는지 내게 나직하게 물었다.

“저번에 R··· 그분이 언급했을 당시에 오저당에 들어온 주문량이 엄청났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거의 반년 전의 일인데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다미안은 출근하기 전에 여유가 있을 때 모든 기사를 다 읽었다고 했다.

아주 바람직한 자세였다.

“그때는 정말 장난 아니었죠. 아마 이번에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이미 몇 개월 동안 오저당의 임원끼리 머리를 맞대고 구체적인 구상을 마쳤다.

적어도 저번처럼 그 기회를 흘려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번 기회는 반드시 잡아야 해.’

예전에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까지 오저당에서 여러 품절 상황을 겪었으나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주문 들어오는 규모의 차이가 엄청났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전까지는 우리가 겪은 품절 상황은 국내에 한정되었으나 RJ 덕분에 세계적인 벽향주 품절 대란이 벌어졌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를 것이다.

RJ에게 오저당에 오고 싶다는 DM을 받은 이후에 생산량이 몇 배나 늘었고 지금까지 꾸준하게 생산하고 있다.

현재 화이트 라벨 재고와 다음 주중에 나오는 생산량까지 합치면 백칠십만 병에 달하는 양을 즉시 출고 가능할 정도다.

지금 당장 몇 병이 출고되든 신경 안 쓰고 모든 설비를 풀가동을 시킨 덕분에 나올 수 있는 수치였다.

“그렇게 많은 양이 오저당에 있는 창고에 들어가 있다고요? 저한테 소개해주실 때는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오풍리에 있는 창고는 아니고 따로 단기 계약을 맺은 창고에 보관 중입니다.”

“아··· 그렇군요.”

“한국에 도착하면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 눈 좀 붙이세요.”

나도 잠시 잠을 청해야 했다.

비즈니스석은 누울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에 중간에 기내식을 먹을 때를 제외하면 줄곧 잠을 잘 수 있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편하게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고 우리가 공항 밖으로 나오자 서준석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일정을 급하게 당겼는데 F&B 미팅은 문제없이 잘 끝내셨나요?”

“네, 강남점 계약은 무사히 끝냈고 다음 주에 인테리어 공사 들어갈 예정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듣죠. 다미안 씨는 네비에 주소 찍어주세요.”

갈 때 가더라도 다미안의 이삿짐은 챙겨서 가야 했다. 여유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챙겨오기도 애매했다.

어차피 박스 몇 개가 전부라니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주차장에 세워진 허머에 올라타자 서준석은 능숙하게 빠져나와 서울로 향했다. 다행히 다미안이 살던 곳은 서울에서도 서쪽 지역인 강서구라 가는 길에서 멀리 벗어나진 않았다.

[에이스 고시텔]

잠시 후에 도착한 다미안이 살던 고시원은 생각보다 많이 허름했다.

거무칙칙한 건물 외관만 보면 거의 수십 년은 되어 보였다.

입구 앞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니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한 편이었다.

다만, 줄지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방문은 무척이나 생소했다.

[허얼··· 여긴 도대체 뭐 하는 곳이에요?]

향이는 생소한 형태의 내부 구조를 보고 혹시 감옥이 아니냐며 오해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다미안의 방을 열어 보니 창문조차 없는 비좁은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 있는 박스만 가져가면 됩니다.”

그리 크지 않은 박스 네 개가 전부였다.

우선은 서 부장이 옷이 들어 있는 큰 박스를 들고 나갔고 다미안은 책이 채워진 가장 무거운 박스를 들었다.

당연히 나도 잡다한 물건으로 채워진 박스를 들고 내려왔는데 정작 다미안은 시간이 흘러도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기다리던 서준석 부장은 자신이 가보겠다며 내리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먼저 다미안이 할머니 한 분과 함께 고시원의 문을 열고 나왔다.

느낌상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서준석 부장을 향해 손짓했다.

“일단은 기다려보죠.”

인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열려 있는 허머의 짐칸에 박스를 올려두고 다시 차에 올라탄 다미안의 눈시울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정이 많이 들었나 보네요.”

“시원섭섭하다는 게 더 정확하죠. 손자처럼 잘해주시긴 하셨지만, 저곳으로 다신 돌아가긴 싫거든요.”

“오저당에서 일하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얼마 후에 있을 오저당의 진급 대상자에 다미안이 포함되어 있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내 곁에서 일을 하면 그만큼 챙겨줄 생각이었다.

서준석 부장은 다미안이 타자 곧장 시동을 걸어서 서울을 빠져나왔다.

그가 운전하는 차는 처음 타보는 건데 확실히 부드럽게 운전하는 황 이사와는 스타일이 달랐다.

조금 거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서 부장이 규정 속도를 크게 어긴 것은 아니었으나 허머의 괴물 같은 가속력이 오늘따라 실감 났다.

액셀을 밟을 때마다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고 뒤에서 당기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오죽하면 향이가 멀미가 난다며 내 무릎 위에서 꼼짝도 안 했다.

그래도 운전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오저당에 도착한 나는 곧장 이사진만 불러 회의를 열었다.

당연히 회의 내용은 RJ의 방문 준비에 관련된 것이었다.

“사흘 뒤에 RJ가 오는 게 맞나요?”

“맞습니다. 오저당에서 머무는 일정은 2박 3일로 예전과 동일합니다.”

“독일 콘서트가 오늘 끝난다고 들었는데 곧장 오는 건가요?”

“매니저에게 듣기로는 자택에서 하루 쉬고 그다음 날 출발한답니다.”

어휴··· 도대체 그런 체력은 어디서 생기는 건지 모르겠네. 나 같으면 며칠은 집에서 나오지 않고 잠만 잘 것 같았다.

“그 기간 동안 오저당에 RJ가 와있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여행 중에 잠시 찾아오는 사람들은 양해를 구한다고 쳐도 문제는 찾아오는 양조장에 예약하신 사람들이지.”

수호는 그 숫자가 적지 않다고 했다.

“예약한 사람이 얼마나 돼?”

“현재는 예약을 잠시 막아놨는데 그전에 예약한 사람이 60명 정도.”

생각보다 많은 숫자였다.

어느덧 만추의 시기가 왔지만,

덕월 계곡의 단풍이 입소문 나면서 늦가을에도 찾아오는 이들이 꽤 많다.

“한 명씩 안내 전화드려서 사과의 의미로 화이트 라벨 선물 세트를 준비해서 보내드리겠다고 해주세요.”

적지 않은 금액이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먼저 약속을 깬 거는 우리다.

여기서 안일하게 대응하면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 막게 될 수 있다.

누군가는 별거 아닌 일이라 여길 수 있으나 누군가는 정말 어렵게 시간을 내서 방문하려고 예약한 것일수도 있다.

그러니 쉽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황동선 이사는 그런 나의 의중을 알아채고 별다른 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오히려 한술 더 떠서 판촉물 몇 가지를 더 얹어주자고 했다.

“그렇게 하시죠. 그리고 RJ의 소속사인 다이버와 촬영 논의는 마무리됐나요?”

우리의 목표는 RJ를 너튜브 채널에 출연하게 만드는 것이다. 컨셉은 구지노 배우가 찍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한 차례 경험이 있기에 그가 머무는 동안 뭘 찍을지 구체적인 콘티도 있었다.

황 이사는 내 질문에 곧장 답을 해줬다.

“10분 분량으로 2편까지 확보했습니다. 그 이상은 힘들다고 하더군요.”

“계약서는 작성했나요?”

“다이브 쪽은 이미 끝냈고 RJ는 도착하는 날에 사인을 받으면 됩니다.”

협상하는 과정은 꽤 지난했다.

다이버 쪽에서는 아티스트의 너튜브 촬영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고 하더라도 자체 채널 쪽에서 공개하고 싶어 했다.

그쪽에서 영상을 보는 이들이 우리 채널 구독자보다 훨씬 많은 것은 사실이다.

구지노의 출연과 RJ 덕분에 오저당의 너튜브 채널이 급성장하며 거의 50만을 찍었으나 그걸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협찬처럼 그냥 스쳐 지나가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 없었다.

그때 빛을 발한 것은 광고 대행사에서 일했던 황 이사의 인맥이었다.

함께 일했던 입사 동기가 다이버의 홍보 팀장으로 있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그는 이틀 동안 설득해서 합의를 끌어냈다.

그게 오늘 오전의 일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많이 신경 써주세요.”

“공짜로 받아낸 승락도 아닌걸요.”

“그 정도면 훌륭합니다.”

다이버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너튜브 영상을 일부 양보하는 대신에 새롭게 공개하는 5인조 신인 아이돌을 오저당의 모델로 써달라는 조건이었다.

지금까지 다이버는 RJ가 소속된 그룹의 뒤를 잇는 여러 그룹을 준비했으나 안타깝게 성과를 낸 그룹은 없었다.

그래서 뼈를 깎는 심정으로 글로벌 타깃으로 아이돌을 준비했다고 한다.

신인 아이돌의 광고료는 크지 않았다.

1억 미만으로 국내를 비롯해 태국과 일본을 포함한 해외에서도 옥외광고에 한정하여 광고가 가능한 조건이었다.

황 이사 말로는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했다. 만약에 데뷔와 동시에 대박이 터지면 오히려 우리가 더 큰 이득이다.

하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일종의 복권이랄까.’

반대급부를 주는 것에 불과했다.

가장 나이스한 것이 RJ에게 오저당 광고를 맡기는 건데 몇억씩 광고 비용으로 지출하는 것은 아직 무리였다.

꽤 긴 시간 회의 끝에 얼추 이야기를 마친 나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꽤 많았기에 서둘러 움직이자며 독려했다.

“자! 그럼 남은 사흘 동안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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