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주신 기회 (5)
RJ 영상이 너튜브에 올라가자,
당연히 조회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등록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거의 50만 회가 재생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다이버와 함께 번갈아 가며 연달아 공개된 영상은 일주일도 안 돼서 오저당 채널 최초로 천만 단위까지 올라갔다.
확실히 평소의 영상 조회수와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있었다.
RJ가 보유한 팬덤의 화력은 내가 그동안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오저당의 조회수 기록이 백만이 살짝 넘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RJ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예고편을 만들기 잘했어.’
예고편의 영향도 확실히 있었다.
다이버 채널에 RJ가 나오는 영상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우리 채널은 미리 알려주지 않으면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RJ가 나오는 두 편의 영상을 압축해서 예고편을 만들었다.
거기에 꼼수도 들어갔는데 공개 이틀 전에 예고편을 공개하며 팬 카페 같은 곳에 영상의 내용을 살짝 흘렸다.
당연히 그 일은 라니가 해줬다.
녀석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덕질을 하고 있었기에 게시판 같은 곳에 글을 쓰는 정도의 일은 쉬웠다.
“게시판에 처음 글을 올렸을 때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니까. 사실,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내가 성덕이라니!”
라니는 여전히 몽롱한 느낌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라니가 RJ와 함께한 시간이 제법 길었다. 심지어 같이 벽화를 그리는 작업도 했을 정도였다.
원래 거기까지 예정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RJ가 라니의 벽화와 그림을 보더니 상당한 관심을 보여 진행되었다.
그런데 RJ의 실력은 생각보다 꽤 좋았다.
“원래 RJ가 그림에 관심이 많았어?”
“물론이지. 활동기가 끝나고 휴식을 할 때마다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작품도 종종 사서 집이나 작업실에 걸어 놓을 정도야.”
“그래서 요정 벽화에 관심이 많았구나.”
“아마 여긴 성지가 될 거야.”
라니의 시선은 오저당 한쪽 구석에 RJ가 직접 그린 요정에 꽂혀 있었다.
그걸 RJ가 다 그린 것은 아니었다.
원래 라니가 그리려고 밑 작업을 마친 상태였는데 그 위에 채색을 RJ가 했다.
그리고 그런 녀석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오저당을 찾은 이들은 그 앞에 줄을 서서 사진을 찍었다.
라니가 말한 대로 성지를 찾아온 순례자처럼 경건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나저나 사람이 너무 몰려서 큰일이네.”
오저당의 입구는 아주 혼잡했다.
평소에 양조장을 방문하는 숫자보다 몇 배는 더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실제로 새로 지은 이후에 이제껏 한 번도 가득 차지 않던 주차장이었는데 요즘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여기까지 대중교통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라 오저당에 오는 이들은 대부분 차를 끌고 오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술을 가져가기 위해 주류 상사에서 보낸 대형 화물차도 많았다.
그 덕분에 혼잡함은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수호와 다미안을 비롯해 사무직 몇 명이 나와서 필사적으로 교통정리를 하고 있으나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오저당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다는 점이었다.
대부분 한두 시간 이내에 떠났다.
오저당의 정원을 한 차례 둘러보고 산책로를 걸은 뒤에 주막에서 가볍게 음료와 차를 마시면 딱히 할 게 없었다.
하지만 볼 게 없다고 투덜댈 수 없었다.
어차피 입장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저당에서 책임지고 관리하는 것은 찾아오는 양조장 프로그램에 체험 예약을 하는 이들이 전부였다.
“RJ 덕분인지 몰라도 해외에서 오는 체험객이 제법 늘어나는 것 같지?”
영상이 공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확실히 체감될 정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여길 오는 이들은 대부분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강릉의 버스 정류장을 들렀다가 오는 것 같았다.
“확실히 늘었지. 전에는 삼척에서 단체로 모아서 오는 사람들 제외하면 보기 드물었는데 요즘은 평일에도 체험하려고 찾아오는 여행객이 제법 되잖아.”
“해설하는 직원이 더 필요하진 않아?”
외국인 대상 프로그램은 아직 전문적인 해설을 붙이지 않고 직원들이 돌아가며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라니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했다.
“스페인어 수요는 아직 그리 많지 않고 영어 쪽은 수파싯이랑 다미안이 많이 도와줘서 괜찮아.”
“조만간 RJ와 계약을 하게 될 텐데 그쪽 신제품 디자인도 해야 하잖아.”
“이미 내년에 리뉴얼할 스프라이트 라벨 디자인도 만들어놨고 예정된 신제품도 그거밖에 없으니 뭐라도 해야지.”
“쉴 수 있을 때 쉬어. 언제 또 한꺼번에 일이 몰릴지 모른다.”
이번에 RJ 일도 계획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언제 다시 신제품 일정이 갑자기 쏟아질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내년부터 본격적인 양조장 인수가 시작될 테니 그쯤 되면 가장 바빠지는 것이 라니가 될 것이다.
“안 그래도 크리스마스에 휴가 붙여서 잠시 집에 다녀오려고.”
“잘 생각했어. 저번에 집에 갔을 때 아주머니 볼 면목이 없더라.”
“그러면 며칠 더 휴가를 주면 안 될까?”
“내년 휴가 당겨서 쓸래? 그 정도 편의는 당연히 봐줄 수 있지.”
“꺼지시죠. 악덕 업주님.”
라니는 콧방귀를 뀌며 돌아섰다.
평소에도 농담처럼 하는 말이라 나는 웃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밖의 상황 못지않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화이트 라벨은 만 병까지 챙겨드릴 수 있어요. 아니요. 지금 추가 주문하시면 다음 주까지 기다리셔야 해요.”
“네네. 죄송하지만, 이미 발주가 꽉 차서 그 정도의 여유는 없습니다.”
“오풍주는 발주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빨리 연락주셔야 해요. 언제 품절로 바뀔지 모릅니다.”
다들 발주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담을 끝내고 전화를 끊으면 곧장 울릴 정도였다. 전산상으로 재고를 관리해서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재고 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국내에만 한정되진 않았다.
해외 발주를 담당하는 쪽에서도 여러 건의 주문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기존처럼 벽향주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화이트 라벨부터 시작해서 소담과 오풍주 그리고 ASAP까지 들어오는 주문은 상당히 다양한 편이었다.
그들 역시 지난번에 RJ 덕분에 한 차례 당한 게 있기에 학습된 것이다.
갑자기 주문이 폭주했을 때.
우리 못지않게 당황한 게 주류 상사다.
그들은 한 병이라도 더 많이 수량을 확보하기 위해 애썼으나 그 당시에 생산 수량으로는 감당이 안 되었다.
‘지금은 그나마 생산량이 받쳐줘서 다행이지.’
미리 준비를 해놓은 덕분이었다.
화이트 라벨의 월간 생산량은 백만 병을 넘어섰고 다른 제품의 생산량도 상당한 편이라 예전처럼 최악은 아니었다.
그리고 170만 병의 화이트 라벨도 준비되어 있었기에 적절하게 배분해서 보내면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저번에는 반응이 없던 일본과 중국 그리고 베트남 같은 곳에서도 주문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가장 가깝고 큰 시장이라 우리 입장에서는 뚫어 놓으면 나쁠 게 없었다.
그중에서도 중국 주문량이 유의미했다.
손이 어찌나 큰지 첫 거래인데 화이트 라벨을 50만 병이나 주문했다.
당연히 그 주문은 성사되지 않았다.
우리가 당장 보낼 수 있는 양은 아무리 많이 잡아봐야 10만 병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일단은 조율 중이었다.
“사장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잠시 자리에 앉아 주문량을 체크하고 있자 다미안이 다가와서 나를 찾아온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사무실 입구 쪽을 바라보니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이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던 손님이라 나는 그를 회의실로 안내했고 곧장 명함을 꺼내서 주고받았다.
“반갑습니다. 교수님에게 소개받은 법무법인 해국의 김영채라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부디 교수님이 좋은 말을 많이 해주셨길 바랄 뿐입니다.”
김영채 변호사는 아버지의 제자다.
두 분의 나이 차이는 그리 크진 않았는데 아버지가 교수가 된 첫해에 가르친 제자 중에 유일한 한국인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작은 법무법인의 대표가 되었는데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법무법인에서 파트너로 일하다가 독립한 케이스였다.
“이렇게 멀리에서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최근에 조금 바빠져서 도저히 시간을 내기 어려웠거든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김영채도 사무실 안팎의 상황을 보았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유 역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바쁘신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그러시죠.”
“제가 듣기로는 양조장 몇 곳을 인수하실 생각이라고 하셨는데 맞습니까?”
“네, 대략적인 규모는 25억 미만이라 그리 큰 규모의 인수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양조장과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있기에 가능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언제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기에 자금은 그보다 더 넉넉하게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면 저희 법무법인에서는 서류 작업만 마무리하면 되는 일이겠네요?”
“이번 일은 그렇게 될 것 같은데 앞으로 비슷한 종류의 인수가 반복될 거라 호흡을 맞혀 움직일 분이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예상하십니까?”
“글쎄요. 그건 상황을 봐야겠죠.”
기존까지는 투자를 하기 위해 매달 얻는 수익을 모아서 사용해야 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상황이 조금 달라지고 있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사내 유보금이 쌓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창고에 쌓여 있던 화이트 라벨이 모두 출고되면 아무리 낮게 잡아도 30억이 넘는 순수익이 남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난 며칠 동안 팔린 다른 술까지 고려하면 보유금은 빠르게 늘고 있다.
그렇다고 당장 투자가 예정되어 있는 것도 딱히 없었다. RJ의 술을 빚을 공간과 설비는 그가 투자할 10억이 있다.
우리 쪽에서도 투자해야겠지만, 그리 큰돈이 들어갈 것 같진 않았다.
“아! 최근에 생산 대행 계약을 진행하고 있는게 계약서 작성에 대한 법률 자문도 도와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오저당의 모든 법률 자문을 맡긴다면 어느 정도를 예상하시나요?”
기존까지 법률 자문을 맡겼던 곳이 있기는 했지만, 기왕이면 한 곳에 몰아서 맡기는 것이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았다.
아직 소송 같은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고 있으나 오저당 인근의 땅을 사는 것부터 시작해서 생각보다 법률 자문을 받을 일은 많이 있었다.
언젠가 오저당의 규모가 대기업 수준이 된다면 법무팀을 꾸리겠지만, 그전까지는 실력 좋은 로펌에 맡기는 것이 편했다.
“흐음··· 글쎄요. 그건 조금 계산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질문을 받은 김영채 변호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어느 정도의 인력이 소모되어야 하는 건지 계산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죠. 여기 있는 리스트가 인수할 예정인 양조장입니다.”
“지역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있어서 동시에 운영하시려면 힘드실 것 같네요.”
“인수와 동시에 해당 지역의 양조장은 문을 닫을 겁니다. 그래서 토지 가격은 인수 금액에 포함되지 않은 겁니다.”
오풍리를 벗어나 여러 곳에 양조장을 운영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이곳의 규모를 늘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이번에 인수할 양조장을 가지고 삼척 시장과 딜을 할 생각이었다.
“아··· 그래서 25억에 여길 전부 인수할 수 있는 거군요.”
“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인수하는 양조장의 설비 일부와 상표권 그리고 술을 빚는 방법의 전수입니다.”
“혹시 모를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하려면 계약서를 꼼꼼하게 써야겠군요.”
김영채 변호사는 뭐가 중요한 건지 금방 이해했다. 돈만 받고 제대로 된 제조 방법을 공유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양조장의 사장님들을 내가 직접 만나봤는데 그럴 분은 안 계신 것처럼 보였으나 사람 일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김영채 변호사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며 자신 있는 미소를 보였다.
어차피 상대는 아주 작은 규모의 양조장에 불과했다.
구렁이 백 마리쯤 품고 사는 이들과 회사 인수를 두고 싸우던 사람이라 그런지 호락호락한 존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 거라면 저희 법무법인 해국에게 맡겨 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