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특화 단지 (3)
맥주를 빚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기존에 판매 중인 주류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기에 여건은 충분했다.
그러기에 작년부터 여러 양조장을 인수했던 것이기도 했다.
현재 오저당이 빚는 술은 아직 전통주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소주인 소담과 청주(약주)인 벽향주 그리고 그 둘을 베이스로 두고 만든 ASAP와 탁주인 오풍주가 전부다.
종합 주류 회사가 되려면 오저당이 양조장이란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
우리가 비록 소주를 판매하고 있으나 증류식 소주라 희석식 소주와 판매량을 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오저당에서 값싼 희석식 소주를 만들 생각은 전혀 없기에 맥주가 다음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미뤄둔 이유는 한 가지 문제 때문이다.
원래 오저당의 요정은 전통주를 제외한 위스키와 맥주 같은 술에 신경도 안 썼다.
주종을 초월하는 것은 향이와 검이 그리고 중급 요정 이상부터 가능했다.
‘지금까지 맥주를 시도하지 못한 이유가 거기 있지.’
이제는 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저당에서 빚는 술의 양이 많아진 지금은 중급 요정의 숫자가 상당하다.
앞으로 주류 특화 단지에 추가로 더 지을 것을 생각하면 더 늘어나겠지.
다행히 수호는 그런 내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니, 자포자기한 건가.
“내가 너를 어떻게 말리냐.”
“나는 언제나 너를 비롯한 오저당 식구 모두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다고.”
“웃기네. 다른 거는 몰라도 사업 확장할 때는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게 너잖아.”
에이씨···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고 그러고 싶었겠냐고! 지금껏 의논 없이 지르고 봤던 거는 언제나 요정의 일들이 중간에 끼어 있었다.
그러니 나도 조금 억울했다.
물론, 그 결과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껏 손해 본 결정은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지.
그걸 알기에 수호를 비롯해 황동선 이사와 재무를 책임지는 서준석 부장도 이제는 어느 정도 그러려니 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야.
“그래서 맥주 만들지 마?”
“아니, 그런 말은 아니지. 어느 정도 자리만 잡으면 매출 단위가 달라지는 게 맥주잖아. ASAP가 팔리는 거를 보니 확실히 다르기는 하더라.”
“일단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몇 병씩 마시는 일이 많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RTD처럼 맥주는 가볍게 마시기 좋다.
그리고 한두 병 마시기 시작하다 정신을 차려보면 맥주병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다.
따지고 보면 소담이나 벽향주를 마시는 것이 더 저렴하게 느껴질 정도인데 막상 주문할 때는 그게 그렇게 안 느껴진다.
양에서 느껴지는 차이도 크고 병당 가격도 저렴한 탓이다.
우리 회식 때만 하더라도 가능한 오저당 술을 마시려고 애써도 꼭 맥주는 낀다.
아무리 ASAP가 있더라도 그 쌉싸름한 향과 맛은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ASAP처럼 팔리면 소원이 없겠다.”
수호는 지난달의 수출된 양을 거론하며 작게나마 자신의 희망을 밝혔다. 나 역시 그 정도만 돼도 성공이라 생각됐다.
지난달에 홍콩과 베트남 등의 동남아 지역에 수출된 ASAP의 양만 250만 달러(약 33억 원) 남짓 될 정도로 대폭 늘었다.
태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자 곧장 인근 나라에서도 반응이 온 덕분이었다.
더운 나라라 그런지 거의 음료수처럼 마시는 데다가 청량한 맛이라 맥주보다 더 많이 찾는다고 했다.
거기에 RJ효과도 상당히 컸다.
그가 오저당에 온 이후에 한류에 힘입어 동남아는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의 루트가 뚫리며 주문량도 대폭 늘어났다.
당연히 벽향주 화이트 라벨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최대 생산량을 유지 중이다.
‘스프라이트 컬렉션도 한몫했지.’
작년부터 준비한 새로운 라벨을 올해 1월부터 벽항주와 돈 레오넬에 적용됐다.
전체적인 컨셉은 동일하나 디자인이 바뀐 탓에 소비자들이 어리둥절했으나 곧장 기사를 내보내 이유를 알려줬다.
매해 새롭게 바뀌는 라벨.
그것만으로도 두 가지 술의 판매량은 꽤 의미 있을 정도로 상승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일부 애호가는 기존에 유통되어 시중에 남아있는 술병을 구하기 위해서 수소문할 정도였다.
“염두에 두고 있는 브루어리가 있어?”
수호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저당을 운영하면서 국내에서 생산되는 술은 거의 한 번씩 마셔본 것 같았다.
각지에 있는 주류 상사에서 보내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술을 마실 때마다.
나와 수호 그리고 호세는 테이스팅 노트를 작성했는데 거기에는 향이의 반응도 적용되어 있었다.
“당연히 주의 깊게 살피고 있던 곳이 있지.”
“그런데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곳은 쉽게 브루어리를 팔지 않을 텐데.”
“굳이 그런 곳을 노릴 필요는 없어. 작은 규모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가져와서 어차피 손을 볼 거잖아.”
그게 훨씬 손이 덜 가게 될 것이다.
지금 수백억 이상 자금을 태워 가며 브루어리를 가져올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수년 전부터 시작된 브루어리 창업 열풍에 올라탄 곳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최근에 자료를 보니 맥주를 제조할 수 있는 면허를 발급 받은 업체만 거의 200여 곳에 달할 정도다. 문제는 그중에 적자를 보는 회사가 대부분이란 것이다.
당장 가장 성공적인 판매량을 보여준 수제 맥주 브랜드도 현재 누적 적자만 450억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어떻게 버티는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한때 편의점에서 판매하던 수제 맥주 중에 단종된 제품의 숫자도 상당하다.
수년 전의 자료를 보면 50% 이상이 편의점에서 사라졌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어딜 생각하고 있는데?”
“너 혹시 예전에 마셨던 굿밤(Goodbam)이란 맥주 기억나?”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맥주이자 향이와 요정들에게 상당히 좋은 반응을 끌어낸 몇 안 되는 맥주 중의 하나다.
그보다 더 향이가 좋아하던 맥주도 있었으나 인수하는 게 불가능한 수준의 덩치를 가진 곳이라 제외해야 했다.
약간의 부족함은 오저당과 요정을 통해 보완하면 되기에 그건 문제 되지 않았다.
잠시 굿밤에 대한 기억을 더듬던 수호는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인디아 페일 에일(IPA)이었던가?”
“아니, 화이트 에일이었어.”
“제길 우리가 그동안 테이스팅한다고 마신 술이 한두 종류였냐. 가물가물해서 노트 보기 전에는 잘 모르겠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맥주는 종류도 꽤 많았다.
발효 방식의 차이에 따라 에일과 라거로 나뉘고 맥아(몰트)와 홉을 뭘 쓰고 어떻게 배합하냐에 따라 맛과 종류가 나뉜다.
수많은 맥주 중에 굿밤을 택한 이유가 에일 중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밀맥주인 화이트 에일이란 것도 한몫했다.
그게 오저당의 특성을 살리기 좋았다.
오저당은 다른 어떤 양조장보다 효모 관리에 특화된 곳이라고 봐도 된다.
더구나 화이트 에일은 효모에서 느껴지는 화사한 향이 강점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용하는 물이 연수라 맛이 강한 스타우트 같은 종류의 맥주와 어울리지 않다는 점도 고려 대상이었다.
한동안 이야기를 듣던 수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정말 라거가 아니라 에일을 팔려고? 네가 말한 대로 종합 주류로 가려면 아무래도 라거가 더 적합하잖아.”
“국내 시장 점유율이 라거가 훨씬 높은 거는 아는데 에일보다 라거의 생산 과정이 꽤 길다는 것이 문제야.”
짧게는 일주일에서 두어 달까지.
상면 발효냐 하면(下面) 발효냐에 따라 숙성 온도와 기간이 달라진다.
라거는 저온발효로 긴 숙성을 거치는 반면에 에일은 길어야 2~3주 정도다.
더구나 우리에겐 요정이 있기에 다른 곳의 절반쯤이면 숙성이 끝날 거다.
결론은 라거가 아닌 에일을 빚어야 미친 듯이 맥주를 찍어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 크래프트 수준으로는 안 끝낼 생각이라는 거네?”
“응. 가능하면 맥아 제조 시설도 만들고 적어도 연간 생산량이 3천만 리터 정도는 되어야 어디 가서 비벼보지.”
“허얼! 3천만 리터씩이나?”
현재 국내 맥주 중에 6위 정도 되는 브랜드가 연간 5천만 리터를 판매한다.
1위 브랜드가 7.5억 리터인 것을 고려하면 쩌리 같아 보여도 작다고 말하기 애매한 수치다.
당연히 시작부터 그렇게 많은 맥주를 생산하진 않겠지만, 설비만큼은 시작 단계부터 크게 질러놓을 필요가 있었다.
한번 자리 잡으면 현재 상황상 더 늘리기 애매했다. 가능하면 단지 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먼저 선점해야 한다.
“또 엄청나게 돈이 들어가겠네.”
“아무래도 그렇겠지.”
“서 부장님 머리에서 또 쥐 나겠어.”
“어차피 이번에 인수한 양조장은 대부분 소량 생산을 기본으로 하는 거잖아. 거기에 들어가는 돈은 얼마 안 돼.”
양조장을 늘리는 것은 다양성을 위한 시도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술은 당연히 추가 투자를 해서 메인 상품이 될 거다.
그 말은 오저당 내부에서도 각각의 브랜드를 가지고 담당자들끼리 치열한 경쟁이 시작될 거란 의미였다.
“그러니까 너도 방심하지 마. 언제 오저당을 대표하는 술이 바뀔지 몰라.”
물론, 쉽지는 않을 거다.
이미 벽향주가 쌓아 올린 명성이 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마니아층이 형성된 상태라 어지간해서는 그 자리를 내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라는 것도 없다.
모든 제품은 흥망성쇠를 겪는다.
두꺼비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은 소주가 밀려나고 도수가 낮은 새로운 브랜드가 대세가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소담 퍼플 라벨이 나오면 벽향주가 밀릴까 봐 안 그래도 조금 쫄리거든.”
“잘됐네. 내가 바라던 바야.”
“사악한 자식. 그래서 그 굿밤이란 곳은 인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나도 아직 알 수 없었다.
일단 내가 바라는 수준으로 맥주 공장을 만들 수 있을지부터 확인하고 그다음에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겠지.
그 과정에서 서준석 부장과 논의는 필수였다.
올해 세워 놓은 예산이 있으나 상당히 많이 바뀔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먹은 것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이건 얼마가 들어가든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꽤 있었다.
굿밤을 빚는 브루어리 역시 다른 곳과 비슷하게 적자가 꽤 심한 편이라고 했다.
매번 느끼는 건데 술을 잘 빚는다고 판매까지 잘하라는 법은 없다.
아마 오저당도 요정과 생각지도 못한 여러 기회가 없었다면 비슷했겠지.
“아마 불가능하진 않을 거야.”
*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김영채 변호사와 만났다.
그가 속한 법무법인 해국은 지난 3개월 동안 양조장 인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도장을 찍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게 전부였다.
대부분은 김영채 변호사가 이끄는 팀이 세부적인 협상까지 마쳤는데 일 처리 하나는 정말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당연히 그에 따른 비용도 제법 나왔는데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굿밤 브루어리는 삼척에서 제법 먼 충남 공주에 있었는데 제법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자 네이게이션이 목적지라 알려줬다.
그곳에 도착하자 향이와 나는 왜 여기서 빚는 술이 굿밤인지 알 수 있었다.
[밤나무가 상당히 많네요.]
공주가 밤으로 유명하던가.
거기까진 알 수 없었으나 확실히 브루어리 주변은 밤나무로 둘러싼 느낌이 들 정도로 빽빽했다.
겨울인데 밤나무인 걸 어떻게 아냐고?
바닥에 갈색 고슴도치 같은 밤껍질이 지뢰처럼 깔려 있으니 모를 수가 없지.
그렇다고 굿밤에서 빚는 맥주에서 밤 맛이 나는 것은 아니고 캔 디자인에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것을 보면 Good Night로 보는 게 맞았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내 뒤를 쫓아오던 김영채 변호사의 차가 공터에 멈췄고 곧 차에서 내려 내게 다가왔다.
“생각보다 규모가 작네요.”
그는 주변 풍경보다 브루어리의 규모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지금 그의 표정은 먹잇감을 앞둔 포식자 같았다.
뭔가 여유롭고 자신감 넘친달까.
하지만 그 이상 접근은 불가능했다.
왈왈!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백구 한 마리가 낯선 사람을 보며 경계했다.
다행히 튼튼해 보이는 목줄을 하고 있었는데 향이와 검이는 깜짝 놀랐는지 내 뒤통수 너머로 숨었다.
[헉! 깜놀했잖아. 느그 아부지 어디 계시니?]
한동안 시끄럽게 백구가 짖자 브루어리 안에서 한 남자가 다급하게 나오더니 우리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다가왔다.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