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GD USA (1)
그로부터 얼마 뒤.
심양 머천트는 발칵 뒤집혔다.
오저당에서 온 내용 증명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오저당이 그렇게 나올 거라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지금까지 문제없던 계약이었다.
별다른 트러블조차 없었기에 2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면 계약서에 명시한 내용대로 자동으로 연장될 거라 여겼다.
그런데 느닷없이 해지를 통보해왔다.
현재 오저당에서 수출 중인 벽향주 화이트 라벨과 오풍주의 매출을 생각하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직 대기업에서 생산하는 희석식 소주와 저가형 막걸리에 비해 판매되는 양은 작으나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오저당의 술을 독점으로 미국에서 판매하며 얻은 이익도 작진 않다.
작년에만 하더라도 오저당이 심양에 안겨준 수익을 합치면 10억이 넘는다.
지금 추세대로 계속 이어지면 올해는 적어도 20억을 넘길 가능성이 있다.
당연히 심양의 홍석진 사장과 임원진은 펄쩍 뛰며 오저당과 계약을 담당했던 마해진 팀장을 대회의실로 호출했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날아온 것은 여러 사람의 호통이었다.
“아니, 거래처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계약 연장을 하지 않을 거란 분위기도 읽지 못했다니 도대체 뭘 한 겁니까?”
“마 팀장이 직접 가서 어떻게든 오저당 사장의 마음을 돌려놓으세요.”
다들 잡아 먹을 듯이 닥달했다.
마해진 팀장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후계자 때문에 파벌을 나눠서 죽어라 싸우던 이들이 오늘따라 호흡이 잘 맞았다.
하지만 다들 그런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동조하지 않는 남자가 있었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는 이런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 모습이 더 눈길을 끌었다.
“홍진구 실장. 뭐가 그렇게 재밌어?”
오죽하면 홍석진 사장이 호통을 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장이 분노하는 것을 보면 보통의 회사원은 기본적으로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홍진구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다들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하는 게 웃기잖아요. 오저당이 계약 기간 연장할 거라 생각하신 분이 진짜 계셨나요?”
“뭐야? 너 말 다했어?”
“그런 예상조차 못 하신 분들이 정말 계신다면 심각할 정도로 무능하다 못해서 월급 도둑에 불과하네요.”
홍진구 실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독설을 내뱉고 있었다. 팩트로 폭행하는 말을 들은 홍석진 사장은 두통이 느껴지는 건지 머리를 부여잡고 말았다.
아마 평소였다면 홍진구도 그렇게 날카로운 말을 쏟아내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껏 인내의 시간을 보내온 그였다.
하지만 더는 심양이란 곳에 대한 기대와 미래가 모두 사라져버렸다.
바로 어제 홍진구는 갑작스럽게 LA 지사로 발령 처리가 났다. 원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좌천이라고 봐야 했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가 본사에 오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느낌상 절대 다시 자신을 불러들이지 않을 것 같았다.
찍어도 완전히 찍힌 탓이었다.
죄목은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봤다는 것이 전부였다. 홍진구는 사장 자리에 앉아 있는 홍석진의 둘째 아들이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그의 신분이 조선 시대로 따지면 서자라는 게 어릴 때부터 홍진구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망나니 같은 배다른 형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당장 나가! LA에서 다신 돌아오지 마.”
참다못한 홍석진 사장은 서류를 집어 던지며 둘째 아들을 쫓아냈다.
홍진구는 불러도 오지 않을 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으나 할 수 없었다.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저 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지금은 웃는 자가 이기는 거라며 그는 여유롭게 일어났다.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겁니다.”
천천히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그를 만류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때 자신의 편을 들던 임원도 돌아섰다.
아마 판을 뒤집지 못할 거라 판단이 섰기 때문이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심양은 글러 먹었다.
오늘 화를 낸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기획실에서 이미 몇 개월 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 거라 경고를 해줬다. 하지만 그걸 귀 기울여 듣는 인간이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오저당은 미국에 OGD USA를 만들어 직접 유통하기 시작했다.
현지 법인을 두고 심양에 벽향주와 오풍주를 계속 맡길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 오저당의 사장이 아직 20대에 불과하니 다들 애송이라 여겼겠지.
아마 그냥 놔뒀으면 고가의 술집에 데리고 다니며 구워삶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그게 통할까?
홍진구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오저당의 사장이 애송이라면 지금처럼 폭풍 성장을 이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차음 계약을 했을 때만 하더라도 고작 다섯 명이 운영하던 양조장이 어느덧 종합 주류 회사로 탈바꿈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심양 정도는 무시해도 될 수준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날 바로 짐을 챙겨서 회사에서 나온 홍진구는 며칠이 지나 미국으로 가기 직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LA에서 근무할 때 업무상 자주 만나야 했던 뉴욕 지사장 슈미트였다.
[LA로 발령 떨어졌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아신 겁니까. 벌써 뉴욕까지 제 소문이 났나요.”
[그렇게 깽판을 치고 나왔으면 소문 정도는 무시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쉬쉬하더라도 소문을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뉴욕에 있는 슈미트가 알고 있다는 게 놀랍진 않았다.
“뭐··· 될 대로 되라죠. 차라리 이번 기회에 사직서를 낼까 고민 중이에요. 어딜 가더라도 심양보단 낫겠죠.”
사직서 이야기를 꺼내자,
슈미트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딱히 해줄 말이 없어서 그런 걸로 착각했으나 오히려 슈미트는 수화기 너머에서 기쁨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말이 진심이면 LA 말고 뉴욕으로 와.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게.]
*
3일 뒤 홍진구는 뉴욕으로 향했다.
LA로 가는 길에 들리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으나 슈미트가 했던 말이 뭔지 꼭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세상.
그게 뭔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금까지 겪어본 슈미트는 일 처리가 깔끔하고 진중한 사람이라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센트럴 파크였는데 공원에 앉아서 한적함을 즐기고 있자 멀리서 슈미트가 다가와서 옆에 앉았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게. 한국에 돌아간 게 2년 전이지?”
“오저당과 계약을 맺기 직전에 본사로 복귀했으니 그 정도 됐죠.”
“이제 더는 가능성이 없는 거야?”
슈미트가 뭘 묻는 건지는 뻔했다.
심양을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10년 가까이 온갖 노력을 했던 홍진구였다.
반란을 도모했던 그는 패했고 더는 판을 뒤집을 수 있는 패가 없었다.
“전혀 없어요. 저도 이제 포기하려고요.”
“그래서 퇴직하려고?”
“LA는 아버지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조 상무가 있잖아요.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뻔한데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긴 그 사람이 좀 좀스럽지.”
“그래서 말인데 저번에 통화하면서 하셨던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죠?”
뉴욕 지사로 당겨준다는 의미일까.
LA보단 뉴욕이 일하기 좋은 조건이긴 했다. 이곳에는 한국 직원도 전혀 없었고 본사의 입김도 그리 센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굳이 퇴사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기대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어쩌면 다른 회사를 소개해주려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슈미트는 전혀 예상외의 대답을 내놨다.
“나도 조만간에 퇴직할 생각이거든.”
“설마··· 창업하시는 건가요?”
“내가 그런 돈이 어디 있어. 수출입과 유통을 하려면 자본금이 많이 들잖아.”
“창업이 아니면 좋은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으신 건가 보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슈미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을 들은 홍진구는 과연 어디로 옮기려는 건지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왜 이 자리에 불렀는지 대충 알아챘다.
“혹시 가시는 곳에 자리가 있으면 저도 좀 데리고 가주세요. 그러시려고 뉴욕까지 저를 부르신 거 맞죠?”
“맞아. 그런데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디로 가시길래 그래요?”
“오저당에서 OGD USA의 대표 자리를 제안했어.”
전혀 생각지도 못한 터라 홍진구는 깜짝 놀라 슈미트를 바라봤다. 안 그래도 오저당 때문에 발칵 뒤집힌 상황이었다.
이직 시기나 모든 것이 상당히 묘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회수하는 총판 권한을 관리하는 게 지사장님이 되시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지.”
“아··· 이제야 뭔가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네요.”
홍진구는 눈치가 상당히 빨랐다.
어린 시절부터 눈칫밥을 먹고 자라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순식간에 뉴욕 지사와 오저당의 관계가 이해되었다.
아마 슈미트뿐만 아니라 뉴욕 지사의 직원 대부분이 이동할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뉴욕 지사 사람들은 슈미트가 고용해서 관리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 마디로 심양은 오저당의 술에 대한 독점 권한뿐만 아니라 뉴욕 지사 자체를 날려 먹을 위기 상황이란 것이었다.
아직은 심양 소속이나 홍진구는 이런 상황이 꽤 재미있었다.
“이것도 오저당 사장의 작품인가요?”
“왜? 배신자라고 비난하고 싶어?”
“아니요. 저보다 한참 어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단한 것 같아서요.”
“보통 사람은 아니지. 나이가 어려도 경영에 대한 감도 좋고 무엇보다 합리적이라 마음에 들어.”
그게 슈미트의 솔직한 평가였다.
지금껏 2년 동안 지켜보았는데 오저당의 주도찬 사장은 매번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한국 사람과 일하기 힘들다고 하시더니 완전히 푹 빠지셨나 보네요.”
“그럴 수밖에 없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네요.”
한동안 둘은 주도찬 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슬슬 그쯤에서 슈미트는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갔다.
느낌상 거절할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말인데 오저당의 버번 증류소를 맡아서 운영해볼 생각 있어?”
“네? 수출입이나 유통도 아니고 증류소 경영을 저한테 맡기신다고요?”
“홍 실장이 경영 공부했다는 거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기획실에서도 일한 경험이 꽤 되잖아.”
슈미트는 현재 상황에 대해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제 막 짓기 시작한 증류소의 버번을 키우는 게 그에게 주어진 임무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증류소를 맡아서 해보고 싶은데 어쩔 수 없네.”
“지사장님 소원이 은퇴 후에 증류소나 와이너리를 경영하시는 거였죠?”
“10년 후에는 그 자리 내가 가져갈 거니까 잘 키워놔.”
“그럼 지사장님의 대표 자리는 제가 차지해야겠네요.”
“아마 쉽진 않을 거야”
슈미트는 가장 먼저 페레즈를 떠올렸다.
두 사람 중에 누가 자신의 뒤를 이을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일반 직원과 달리 법인 대표는 본사에서 임명하는 거라 언제 예상외의 변수가 생길지는 모른다.
당연히 그걸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홍진구도 경력이 제법 되기에 지금 나누는 말이 어떤 약속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길 운영하면서 동부 해안 항구를 통해서 수출입 되는 것도 관리해야 하는 업무도 맡아야 해.”
“오저당의 술은 모두 LA를 통해 들어오는 거 아니었나요?”
“버번이 만들어지면 유럽 쪽 수출도 있을 거고 나중에 쿠바와 버뮤다에서 럼을 수입할 수도 있잖아.”
아직 럼에 대한 어떤 계획도 세운 것이 없으나 지금까지 오저당의 행보를 생각하면 언젠가 손을 댈 것이라 여겼다.
그때가 되면 멕시코가 아닌 미국을 중심으로 모든 양을 소화하는 게 슈미트의 목표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공원 벤치에서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마침내 홍진구는 슈미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재미있겠네요. 맡아서 해보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이제 심양의 그늘에서 벗어나야지. 몇 년 이내에 심양 따위는 처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클 거야.”
“제 능력에 비해 과분한 자리를 주셨으니 저 역시 선물을 하나 준비해야겠습니다.”
“무슨 선물?”
어차피 내쳐진 자식이었다.
나중에 유산을 나눠줄 거란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러니 홍진구는 스스로 자신의 몫을 챙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왕에 내쳐진 거 뒤통수라도 세게 쳐버려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퇴직금으로 심양에서 제가 관리했었던 거래처를 모조리 가져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