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밤 (2)
설계도가 픽스된 이후.
오풍리에 맥주를 빚는 공장을 세우는 일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미 공사를 맡길 업체를 선정해놨던 상황이라 곧장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 전에 우리는 삼척시에 인허가 등의 모든 절차를 마무리해놔야 했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사전에 진행해야 하는 절차는 삼척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쉽게 넘어갔다.
그렇다고 대충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환경 영향 평가 때문에 중간에 바뀐 설계 포인트가 제법 있을 정도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환경 부분은 꽤 신경 썼다.
예상 기간은 대략 8개월 남짓.
그나마 이번에 짓는 공장의 크기가 대기업 수준의 것은 아니라 그 정도였다.
가능하면 10월 전에는 공장의 기틀을 마련하고 올해 내에 내부 공사와 설비를 세팅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생산에 관련된 설비 세팅만 빠르게 진행하면 연말에 준공 단계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뒤.
호세와 강진희 사원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원래 계획대로 진행되진 않았다.
갑자기 결혼식 일정을 잡으려니 예약이 비어있는 예식장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대안은 오저당이었다.
오저당의 중심이 되는 참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정면에 좌석을 놓았다.
뜻하지 않은 야외 웨딩이었는데 이게 생각보다 제법 운치가 좋았다.
거기에 날씨도 도와주었다.
하루 전까지만 하더라도 날이 흐려서 비가 오는 게 아닌가 걱정했었다.
하지만 정작 결혼식이 열리는 날이 되자 어느 때보다 화창하고 뭉게구름마저 아름답게 나무에 걸려 있었다.
“오늘만큼 보람된 날이 없네. 지금까지 정원을 만드는 데 들어간 노력이 하나도 아깝지 않아.”
수호는 감회에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이 꾸민 정원을 바라봤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사방이 꽃밭이라 무척이나 화사했다.
무엇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붉은 장미들이었다.
다른 지역은 모두 장미가 지는 시기가 되었으나 삼척에서도 산골에 있는 오저당의 장미는 아직도 만개해 있었다.
강렬한 붉은 색과 신부의 하얀 웨딩은 너무 잘 어울렸다.
“네 말대로 정원 꾸민다고 돈을 들인 보람이 있다.”
“그런데 호세한테 사준 차값이 3천만 원은 넘어가는 거 같은데 무리한 거 아니야?”
“살짝 오버된 거라 상관없어.”
아기가 곧 태어날 텐데 일반 승용차가 아니라 SUV가 적당했고 여러 옵션을 넣다 보니 3천만 원은 쉽게 넘어갔다.
만약에 비자가 끝나서 호세가 멕시코로 돌아갔을 때 생겼을 손해를 생각해보면 이걸로도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그나저나 호세랑 진희 씨가 동시에 빠지면 지게차는 누가 몰지? 유 씨 아저씨 혼자만으로는 엄청 힘드실 텐데.”
“앞으로 육아 휴직도 쓰고 그럴 텐데 임시로 사람을 구해서 쓰던지 다른 직원들을 교육해야지.”
“육아 휴직에 관련된 사규는 다 작성된 거지?”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사규로 작성된 게 있었으나 막상 적용할 대상이 없어 생각보다 허술했다.
오저당의 직원 대부분이 미혼이다.
아직 평균 연령이 20대 초반에서 중반쯤이라 다들 어렸고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40대 중반 이후에 몰려 있었다.
30대는 열 명도 안 되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부분에 대해서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인데 눈치 보지 않고 쓸 수 있게 만들어줘야 했다.
그래도 안심이 되는 게 있다면 동네 어르신들이 아이들을 상당히 예뻐해 줄 거란 사실이었다.
‘거의 공동 육아 수준일걸.’
간혹 오저당에 직원들의 아이들이 놀러 올 때마다 오풍리의 어르신들이 무척 예뻐해 주셨다. 아마 손자와 손녀 생각이 나셔서 그런 것 같았다.
잠시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결혼식은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이번 결혼식의 주례는 진희 씨가 자라난 보육원의 원장님이 해주셨다.
당연히 진희 씨와 함께 자란 아이들도 상당히 많이 왔는데 신부가 펑펑 우는 탓에 결혼식은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신랑인 호세는 물론이고 향이마저 눈물을 글썽거렸다.
[두 분 모두 행복하게 사셔야 해요!]
그런 향이의 바람 때문일까.
오저당의 모든 요정들은 신랑과 신부 곁에서 춤추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축복의 세레모니를 보는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장관을 나만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부 측 친구분들 나와주세요.”
그 뒤로는 사진 촬영이 이뤄졌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듯이 줄지어서 촬영하진 않았다. 예식장에서는 다음 차례가 기다리고 있기에 바빴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제한이 없었다.
어차피 주말이라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을 주민분들도 모두 모셨기에 마을 축제처럼 먹고 마시고 즐기면 되었다.
당연히 그 자리에 오저당의 술이 빠질 수는 없었다.
벽향주와 소담 소주 그리고 ASAP.
마지막으로 오풍주까지 끊임없이 술이 나왔고 그 모든 비용은 당연히 오저당이 무료로 제공하기로 했다.
“케이터링이랑 뷔페에 술까지 제법 돈이 많이 들어가서 신랑이랑 신부가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더라.”
“호세를 위한 거는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안 그래도 요즘 오풍리에서 한참 공사 중이잖아. 어르신들 불만도 늘어나고 있으신 것 같아서 드리는 뇌물이야.”
요즘 오풍리는 한적함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더구나 평생 사시던 동네가 완전히 바뀌고 있었다.
대부분은 많이 이해를 해주고 계셨으나 불편한 것이 상당히 많이 있으실 것이다.
얼마 전에는 화물차가 나가며 흙을 상당히 많이 흘리고 다녀서 마을 도로 상태가 완전히 엉망이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3층 규모의 창고를 짓는 것과 공장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연말이 될 때까지 온갖 공사 차량이 오가고 소음도 생길 텐데 어떻게든 마을 내에서 반목이 생기는 것은 막아야 한다.
마음이 한번 돌아서면 앞으로 뵙기 껄끄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하지만 매번 술을 제공해드릴 수는 없는 일이잖아.”
“당연하지. 마을 주민분들을 모두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 생각은 없어.”
“그러면 다른 방안도 마련해야겠네.”
“황 이사님이 준비 중이니 걱정하지 마.”
간혹 의사 선생님의 왕진을 오게 할 수도 있고 종종 도시에 가실 때마다 직접 태워다 드리는 것도 더 늘릴 생각이었다.
심지어 지난주에는 오저당의 셔틀버스를 이용해서 이장님과 이모님이 일부 어르신들을 모시고 나들이도 다녀왔다.
거기에 귀촌하는 자녀나 손주들이 있으면 채용 특혜도 드리고 있었기에 오저당으로는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실제로 그런 형태로 오저당에 입사한 분들의 숫자가 어느덧 십여 명에 달했다.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으셔도 앞으로 세워질 공장의 경비 일이나 다른 일자리도 있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쌍둥이 저 녀석들은 아주 신났네.”
수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우주와 유성이 고가의 카메라를 들고 결혼식을 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미디어 부서를 담당하고 있는 둘은 100만 구독자를 앞두고 아주 들떠 있었다.
골드 버튼은 일종의 훈장과 같다고 매번 말하던 녀석들이었다.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둘이 들인 노력은 누구보다 치열한 수준이었다.
요즘에는 외국어도 많이 늘어서 둘이서 현지 법인에 출장을 다녀올 정도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늦은 무렵.
신혼여행을 떠나기 위해 신혼부부는 허머에 올라탔다. 인천 공항까지는 다미안이 직접 운전해주기로 했다.
둘 다 극구 사양했으나 다미안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안전하게 공항까지 모시겠습니다.”
*
호세의 휴가는 한 달이나 됐다.
멕시코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부모님과 고령의 할머니 곁에서 시간을 보내라는 배려라고 봐도 되었다.
무엇보다 100% 한국인의 혈통을 가지신 할머니께서는 호세가 한국인 배우자를 찾길 그렇게 원하셨다.
신줏단지 모시듯 새색시인 진희 씨를 상당히 아껴줄 것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대가족 사이에서 쉽게 적응하긴 어려울 것이라 예상되었으나 아마 특별한 경험을 하고 돌아올 것이라 예상되었다.
무엇보다 강진희 사원에게는 가족의 의미가 특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 대신 오풍주를 빚던 호세의 빈자리는 수호와 내가 어느 정도 채워줘야 했다.
당연히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오랜만에 술 빚는 건데 아직 쓸만하네.”
“유 이사님. 클라쓰는 어디 안 갑니다.”
“어이구 그러셨어요?”
“그래도 모처럼 몸을 쓰니 힘드네.”
“운동 부족이야. 너도 틈틈이 와서 나랑 같이 운동하자니까.”
수호는 여전히 다부진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요즘에는 남자 직원들 일부를 데리고 헬스 동아리를 꾸렸다.
자비를 들여서 기구도 많이 들여놨는데 이 녀석만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마케팅팀의 심태섭 과장은 낚시 동아리를 하고 있었고 라니와 고지효 사원은 요즘 직원들과 미술을 시작했다.
직원 중에 그런 취미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내 취미는 경영이니 사양할게.”
“뭐래··· 그게 무슨 취미야?”
“육성 게임이나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 같은 거랑 비슷하지.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그걸 실제로 해보고 있는 거고.”
한번 나락으로 떨어지면 게임 오버인 헬 모드의 경영 시뮬레이션이랄까.
내 이야기를 들은 수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잘하는 거나 계속해라. 그러려면 굿밤 맥주가 성공해야 하는 거 알지?”
“수백억이나 투자하는데 당연하지.”
“그게 망한다고 오저당이 휘청거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앞날은 아직 모르는 거니 솔직히 조금 쫄린다.”
오저당은 내놓는 술마다 어느 정도의 성공을 하며 지속적인 성과를 내놨다.
ASAP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그나마 소담 소주가 살짝 저조한 편이나 퍼플 라벨에 기대를 걸고 있다.
벽향주의 퍼플 라벨이 그러했듯이.
소담의 퍼플 라벨도 다른 술과 차원이 다른 맛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숙성 기간은 1년에 불과하나 요정의 효과를 받아 10년쯤 숙성한 것과 같았다.
더구나 국내에서 옹기에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숙성을 하는 소주는 없다.
기껏해야 3년 동안 항아리 숙성을 한 소주 제품이 있기는 했는데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라 확신했다.
한 가지 애매한 게 있다면 금액이다.
기존에 40도짜리 소담 소주의 가격이 22,000원이었는데 1년 숙성한 퍼플 라벨은 4만 원으로 소비자가가 정해졌다.
위스키보다는 저렴하나 부담되는 가격인 것은 확실했다. 그걸 술집에서 사서 마시려면 적어도 6~7만 원쯤 되겠지.
하지만 그리 걱정되진 않았다.
소담의 퍼플 라벨은 국내 판매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아마 대부분의 소비는 해외를 통해서 이뤄질 가능성이 컸다.
애주가들이라면 벽향주 퍼플 라벨처럼 품절을 대비해 일단 사놓을 것이다.
“진짜 그렇게 될까?”
“카를로스와 뫼리스가 장담했잖아. 생각보다 사람들의 욕망은 단순해.”
“그렇게 되면 더할 나위가 없지.”
“벽향주 퍼플 라벨은 어떻게 되고 있어?”
“문제없이 한 달 뒤에 나올 거야.”
3층 창고 두 동에서 빚고 있던 벽향주 퍼플 라벨이 나올 시기가 다가왔다.
올봄에 내놓았던 양과 비교하면 거의 2.5배 이상은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현재의 퍼플 라벨은 시작점이었다.
우리가 최종 목표로 하는 것은 장기 숙성한 위스키와 겨루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벽향주도 당연히 추가 숙성을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3년쯤 숙성하면 어지간한 위스키보다 더 깊은 맛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이미 그 과정은 시작됐다.
봄에 출고된 퍼플 라벨이 들어있던 3층 창고 한 동은 3년이란 시간을 채울 동안 판매하지 않을 벽향주가 채워져 있다.
“그런데 벽향주를 3년 숙성한 옐로우 라벨이 나오더라도 문제야. 한 번만 빚어서 판매할 거는 아니잖아?”
“당연히 추가로 빚어서 준비해야지.”
“나머지 벽향주 저장고도 옐로우 라벨로 바꾸려고?”
그건 아니지.
퍼플 라벨도 계속 만들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공간을 마련하는 것밖에 없었다.
“내년에 창고를 몇 곳 더 짓자.”
“이제 근처에 더 들어갈 공간도 없어.”
“너는 특화 단지가 다 채워질 것 같아?”
“글쎄다. 조금 힘들지 않을까?”
유명석 삼척 시장이 장담과 달리 다른 양조장을 끌어오는 일은 지지부진했다.
초반에 오겠다고 하던 곳들도 어려울 것 같다며 발을 뺄 정도였다.
인력을 구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미 이 근방의 인력은 오저당이 대부분 끌어온 상태였다.
더구나 오저당은 중소기업 정도 되는 규모에 월급도 수도권 버금가는 수준인 덕분에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소형 양조장과 브루어리에서 감당이 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면 지금 당장 지으려고?”
“아니, 당장은 맥주 공장이 더 우선이지. 그리고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 삼척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게 분명하잖아.”
“결국, 우리밖에 소화할 곳이 없으니···.”
“빙고! 정답이야.”
굳이 지금 나설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실제로 뭔가 지으려고 해도 내년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라니가 보낸 카톡이 왔다.
[굿밤 보틀이랑 라벨 디자인 끝냈으니 회의 시간 잡아서 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