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생 (2)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이번에 다시 회생한 카우보이 요정도 멕시코의 판초와 비슷한 유형 같았다.
상급 요정인 검이보다는 더 위인 것 같으나 향이처럼 직접 의사소통하는 것까지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이미 판초가 증명했듯이 증류소 한 곳을 책임지고 맡을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향이는 잠시 카우보이 요정과 대화를 나누더니 내게 부탁이 있다고 했다.
[이 친구도 이름을 붙여주세요.]
“뭐가 좋을까?”
[저도 그렇고 검이나 판초도 모두 두 글자니까 맞추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두 글자라···.”
파사데나의 이름을 딸까?
파사나 데나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올랐으나 너무 성의 없어서 기각!
작은 의미라도 담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두 글자로 이뤄진 단어 중에 어울리는 것은 찾기 어려웠다.
내 결정은 스퍼(Spur)였다.
생각나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스퍼라는 단어는 박차라는 의미도 있으나 자극제나 원동력이란 뜻도 있다.
이곳 파사데나에서 그런 존재가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도 한몫했다.
향이는 그런 나의 결정에 대해서 별다른 이견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떤 의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실체가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름이 붙여지기 마련이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요정들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수많은 술의 요정 중의 하나일 때와 이름이 붙여진 요정의 차이는 꽤 크다.
소멸의 위기일 때 스스로 자아를 가지고 존재에 대한 확신이 있는 요정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모든 요정에게 이름을 붙이면··· 그건 불가능하겠구나.”
[현재 오저당의 요정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수만 명쯤 되니 어렵죠.]
“적어도 중급 요정 이상은 가능할 것 같은데?”
[나중에 숫자가 늘어나도 그럴 수 있을까요? 지금처럼 상급 요정 이상 되는 아이들만 챙겨주셔도 충분해요.]
향이는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해도 좋다고 먼저 말해줬고 나도 그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밖에 좀 봐보세요.]
그때 향이가 사장실에 설치된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요정이 늘어나는 게 보였다.
파사데나에서 탄생한 술의 요정은 스퍼의 외형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카우보이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요정은 아메리카의 원주민처럼 생겼다.
다양한 깃털로 만든 장신구를 착용한 모습은 꽤 신비로웠다.
그러나 그 숫자가 많진 않았다.
모두 합쳐 봐야 수십 정도 되려나.
현재 파사데나에서 숙성을 마치고 제품화 시키는 양을 생각하면 그게 한계였던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 부분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요정이 다시 돌아왔다는 게 중요하다.
이제는 술을 빚어도 기존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맛이 나올 게 분명했다.
그리고 생산량이 늘어나면 날수록 더 많은 숫자의 요정이 생겨날 것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다.
한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노크 소리와 함께 슈미트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병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방금 병입을 마친 파사데나의 버번 위스키였는데 거기에 사용된 라벨은 심플 그 자체였다.
이곳의 버번도 스프라이트 컬렉션에 들어갈 예정이나 아직 캐릭터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스퍼가 나왔으니 그 모습을 따서 캐릭터로 만들면 된다.
기초적인 스케치는 예전처럼 내가 따주면 되니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다.
어차피 2년 이상 숙성한 것부터 라벨을 사용할 예정이라 시간은 충분했다.
“방금 나온 파사데나의 1호 버번입니다. 같이 맛을 보셔야죠?”
“좋죠. 얼마나 좋아졌는지 궁금하네요.”
버번의 매시빌을 찾는 모든 과정에 참여했으나 6개월 동안 숙성한 버번의 맛은 아직 한 번도 확인하지 못했다.
과연 시간이 흘러 어떤 맛을 지니게 됐을지 상당히 궁금해졌다.
기존에 한 달을 숙성한 버번의 맛을 보고 긴 시간을 투자해서 빚어낸 버번이다.
하지만 망쳤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랬다면 케이티가 제품으로 내놓을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슈미트는 홍진구의 사무실에 비치된 잔을 꺼내와서 내 앞에 내려놨다.
그런 뒤에 1/3쯤 잔을 채웠다.
테이스팅을 하는 목적이라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쪼르르륵···.
테이스팅 잔에 담긴 버번의 색은 보통의 버번보다는 묽었다. 8년 동안 숙성한 것들과 같은 수준이길 바랄 수는 없지.
하지만 그 특색은 여전했는데 슈미트는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캬아··· 좋네요. 이걸 장시간 숙성하면 어떤 맛이 나올지 기대됩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겁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회장님이 가진 술에 대한 안목은 믿을 수 있죠.”
요즘 멕시코와 미국에서 나에 대한 호칭은 회장으로 완전히 굳어졌다.
소통 중에 사장이란 호칭 때문에 혼선을 빚는 일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미국과 멕시코 현지 법인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는 것도 내가 회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아직 대기업처럼 그룹사가 많은 것은 아니나 다들 이제 시작이라 여겼다.
언제 또 어떤 형태로 내가 증류소를 인수할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제 소원이 한 가지 있는데 버번이 돈 레오넬만큼만 팔리는 겁니다.”
“쉽진 않을 텐데 홍진구 플랜트 매니저가 상당히 노력해야겠네요.”
“생각보다 손발이 잘 맞아서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슈미트와 홍진구는 꽤 잘 맞았다.
기본적으로 그는 열심히 일하는 직원을 선호했다. 슈미트의 아래에 있는 페레즈만 봐도 알 수 있는 취향이었다.
그리고 홍진구도 그런 유형에 가까웠다.
케이티만 믿고 모든 것을 미루는 그런 성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사건건 끼어들어 의욕을 꺾는 것도 아니었다.
홍진구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서도 위스키에 대한 공부를 지속적으로 했다.
그런 노력을 보여주니 케이티나 다른 생산직도 그의 진심을 알아주었다.
“이번에 만들어낸 버번 유통은 어떻게 진행될 예정입니까?”
어차피 많은 양은 아니라 부담될 정도는 아니나 최대한 빨리 처분하고 싶었다.
주류 회사를 운영하며 가장 속 터질 때가 바로 숙성을 끝냈으나 출고량이 따라주지 못할 때다.
그게 반복해서 쌓이다 보면 회사가 휘청이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그나마 다행히 아직 오저당에 그런 악성 재고는 없었고 가능하면 OGD USA도 그러길 바랐다.
“기존에 카를로스와 협의해주신 내용 그대로 바크모에 프로모션을 걸고 일부는 F&B를 통해 소진할 예정입니다.”
*
LA 한인 타운의 중심가.
지철은 장사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대부분의 일은 현지에서 고용한 직원이 하고 있으나 매장을 세 개나 챙겨야 하기에 매일마다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오저당 F&B 미국 지사장]
요즘 그는 자신의 직함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 중이다.
운이 좋게 인연이 맺어져 얻은 자리인 것은 그 역시 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걸 당연하게 여길 수는 없었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 만큼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최근 매출을 본 본사에서는 성과만 계속 유지한다면 미국에 더 많은 직영점을 낼 수 있을 거라고 귀띔해주었다.
한국의 것을 그대로 가져와 꾸민 것이 제대로 먹힌 덕분이었다.
오저당 주점 특유의 인테리어.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K-POP.
그리고 현지화되지 않은 한식 그대로의 맛을 구현해낸 것도 매력 포인트였다.
오풍주와 전 세트.
벽향주와 잡채 세트까지.
현지인에게 통하는 인기 메뉴가 제법 자리 잡았기에 저녁 무렵이 되면 빈 테이블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장님! 파사데나 온 버번은 어디에 놓을까요?”
“응? 그건 언제 온 거야?”
“아까 창고 정리하러 가셨을 때 OGD USA 직원이 놓고 갔어요.”
“그거 이쪽으로 옮겨주세요.”
지철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바에서 마른 헝겊으로 잔을 닦고 있던 유나가 먼저 손짓을 했다. 요즘 그녀는 1호점에 거의 출근하다시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서 직접 일할 때도 종종 있었으나 대부분은 바텐더의 교육 때문에 왔다.
네 박스나 되는 버번은 곧장 바 뒤에 있는 작은 창고에 넣어졌다.
“드디어 왔구나.”
유나는 자신만의 곳간이 채워지는 모습을 보며 꽤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좋아?”
“파사데나 버번이 가성비 좋잖아. 그리고 슈미트가 프로모션까지 걸어줘서 이것만 한 칵테일 재료가 없다고.”
파사데나의 버번은 아직 그 자체의 맛으로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건 다른 재료와 기술로 채울 수 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녀가 파사데나의 버번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맛을 봤을 때는 부족했던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정말 미스테리해. 초기에 받은 것보다 맛이 점점 더 좋아지는 느낌인데 이번 거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요즘은 스트레이트 수준까지 올라간 것 같던데 맞아?”
“응,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건지. 요즘은 얼추 비슷해진 것 같아.”
그다지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파사데나 버번의 생산 과정에 주도찬이 참여했다는 것은 두 사람도 알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녀석이 지금껏 빚어서 세상에 내놓았던 술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였다.
술의 신에게 축복이라도 받은 걸까.
주도찬이 손을 댄 술치고 평범한 것은 전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사업적인 수완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쌍둥이가 찍어간 영상은 언제쯤 너튜브에 올라간다고 들은 거 없어?”
“이제 슬슬 올라올 때가 되긴 했는데 아직 별다른 연락은 없었어.”
“이번 기회에 많이 홍보가 돼서 손님이 더 많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게 내조를 이렇게 잘해주는 예비 신부도 있는데 잘 돼야지.”
지철과 유나는 봄이 올 무렵에 한국에 잠시 돌아가서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양가 부모님이 모두 한국에 계시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성공하더라도 내 인맥으로 초반에 이목을 끌었다는 거 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물론이지.”
직원들이 보든 말든 두 사람은 잠시 꽁냥꽁냥거리더니 다시 일을 시작했다.
오픈 시간이 다가오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오픈과 동시에 단골 한 분이 들어와 바에 앉았다.
“애덤, 오늘은 무슨 일이 있길래 대낮부터 술을 마시러 온 거예요?”
애덤은 1호점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의 오너이자 쉐프였다.
저녁에 가게를 닫으면 종종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시는 탓에 지철과 유나와도 상당히 친해졌다.
그리고 그는 지독한 버번 마니아였다.
평소에 버번 외에는 입에 대지 않는 그가 오저당의 주점을 찾는 이유는 오로지 한식 안주 때문이라고 봐도 되었다.
“식자재 납품하는 곳에서 펑크를 내서 오늘 저녁 장사는 접어야 할 것 같아.”
“저런···.”
“뭐 이번 기회에 다른 곳으로 바꿔야지. 안 그래도 요즘 식자재 퀄리티가 점점 떨어지고 있어서 눈여겨보고 있었어.”
그렇게 말하며 애덤은 나지막하게 ‘망할 중국 놈들’이란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의도했던 것은 아닌지 급하게 유나와 지철에게 손을 저었다.
“오해는 하지 마. 두 사람에게 악감정이 있거나 인종 차별을 하려던 거는 아니야.”
“애덤을 하루 이틀 보나요. 그리고 저희가 중국인도 아니잖아요.”
“하하! 두 사람은 쿨해서 마음에 들어.”
그러면서 애덤은 거래하던 업체가 중국인 사장이 운영하는 곳인데 은근히 장난질을 쳐서 감정이 안 좋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거래를 계속한 이유는 공급 가격이 평균보다 낮아서였다고 밝혔다.
“한국 속담에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이 있어요. 싸게 납품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단 의미죠.”
“나도 이번에 참 많이 배우고 있어.”
“사장님 레스토랑도 조만간 자리를 잡으실 겁니다. 맛으로는 어느 곳과 비교해도 부족할 게 없잖아요.”
지철은 애덤의 레스토랑을 높이 쳐줬다.
미국에 살면서 여러 음식을 먹어봤으나 애덤이 만든 이탈리아 요리만큼 맛있는 것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늘은 어떤 술로 드릴까요?”
유나의 질문을 받은 애덤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곧장 대답을 했다.
“언제나처럼 버번이지.”
“한 번쯤은 한국 전통주를 드실 만도 한데 버번에서 벗어나질 않으시네요.”
“내 피에는 버번이 반쯤 흐를 거야.”
“호홋, 알겠어요. 그럼 아직 낮이니 칵테일로 한 잔 타드릴게요.”
저녁 장사가 어렵다고 말했지만, 혹시 모르니 스트레이트는 권하지 않았다.
유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파사데나 버번을 가지고 핫 토디를 만들었다.
잔에 꿀을 조금 넣어준 뒤.
버번위스키로 꿀을 풀어주고 레몬주스와 뜨거운 물로 넣은 뒤에 팔각과 시나몬 스틱을 가니쉬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거는 어떻게 안 거야?”
“목소리가 달라졌으니까요. 뛰어난 바텐더는 단골의 컨디션까지 알아챌 수 있답니다.”
“하하! 어쨌든 고마워.”
애덤은 사양하지 않고 핫 토디를 호호불며 천천히 들이켰다.
그러더니 꽤나 호들갑을 떨며 유나에게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와아··· 이거 죽이잖아! 그런데 여기에 들어간 버번 도대체 어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