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220화 (220/254)

회생 (6)

경쟁자는 떼어냈지만,

그걸로 모든 게 끝나지는 않았다.

협상은 계속 이어졌는데 당연히 오저당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트집 잡아서 금액을 후려치는 게 답이었다.

문제는 정보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낱 인터넷 쇼핑을 할 때도 비교라는 것을 해보고 결정하잖아.

다행히 그 문제의 해결은 글렌 툴릭 내부에서 찾았다.

마스터 디스틸러 빌리 크래넘.

그리고 생산직과 일부 관리 직원이 우리에게 슬쩍 정보를 흘려주었다.

최대한 저렴하게 인수해야 투자가 더 많이 들어올 거라 생각한 덕분이었다.

‘그만큼 인심을 많이 잃은 거지.’

헤이터에게는 내부에서 이뤄지는 총질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그 정도의 능력을 갖췄으면 이런 상황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덕분에 최종 인수 금액은 40억 가까이 절감되었다.

시간은 절대적으로 우리 편이었다.

상당히 큰 빚에 시달리고 있는 헤이터는 빚 독촉과 이자에 쫓기고 있었다.

당연히 그 역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다시 헬리엇을 불러서 증류소를 팔 생각을 했으나 정작 헬리엇은 관심이 없었다. 그전에 오저당에서 내민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덕분이었다.

“설마 그런 묘수를 낼 거란 생각은 못 했습니다.”

뫼리스는 헬리엇의 이브기와 따로 맺은 협의를 뒤늦게 알고 꽤 놀라워했다.

오저당이 헬리엇의 투자를 받는 내용은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투자하는 쪽이 되기로 했다.

무턱대고 결정한 것은 아니다.

슈미트를 통해 알아보니 헬리엇이란 사모 펀드의 성적은 생각보다 좋았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지금껏 손해는 보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 여유 자금을 넣기로 했다.

적어도 수백억 단위가 될 수 있는 제안인 탓에 이브기는 다시 진흙탕에 뛰어들기보다 고객을 유치하기로 했다.

유대인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헬리엇과 자신에게 뭐가 이득인지 셈하는 것이 무척이나 빨랐다.

빈손으로 돌아갈 바에는 뭐라도 확실하게 얻어가는 것이 이득이긴 했다.

“그러려면 올해도 열심히 벌어야죠.”

“글렌 툴릭은 누가 경영하게 됩니까?”

“저도 그게 고민입니다. 뫼리스 같은 분이 있다면 참 좋겠는데 찾기가 쉽지 않네요.”

“허허, 말씀만이라도 고맙네요.”

뫼리스는 농담처럼 받아들였으나 내가 한 말에는 진심이 살짝 섞여 있었다.

수년 동안 봐온 뫼리스는 믿을만 했고 실력도 인증받은 인물이다.

경영에 관련된 실력은 아직 검증되진 않았으나 유통 쪽의 생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를 데려오는 것은 어려웠다.

심양처럼 끌루소와의 관계를 파탄 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유럽 유통을 맡고 있는 끌루소는 중요한 파트너다.

그리고 임원까지 올라갈 거라 예상되는 뫼리스는 남아 있는 게 더 도움이 되었다.

“일단은 생산 책임자인 크래넘 씨를 글렌 툴릭의 임시 대표로 올려놓고 시간을 벌었으니 적당한 사람을 찾아봐야죠.”

계속 미루고 있을 수는 없다.

법인을 만들고 송금하는 과정이 끝나야 계약이 완전하게 마무리된다.

수백억이 거래되는 것이고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니라 가뜩이나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계약 과정은 문제없었다.

끌루소에서 보내준 변호사와 한국에서 법무법인 해국의 김영채 변호사까지 와서 인수 과정을 정리해주고 계셨다.

큰돈이 오가는 거래다.

적어도 내 사람이 하나쯤 있어야지.

끌루소를 파트너라 여기고 신뢰도 상당한 편이나 계약까지 그들의 손에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혹시 제가 추천해도 될까요?”

뫼리스는 한동안 고민하더니 내게 슬쩍 누군가를 추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예 후보자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일단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적당한 사람이 있으신가요?”

“네, 이 동네 출신인데 작은 마케팅 회사를 이끌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요.”

“마케팅이요?”

“지금은 마케팅 일을 하고 있으나 어릴 때는 증류소에서 꽤 오래 일을 해봤으니 이쪽 바닥이 생소하진 않을 겁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이 동네 사람들은 한두 다리만 건너도 증류소와 관련된 일을 한다고 봐도 된다.

당장 이곳의 마스터 디스틸러인 크래넘 씨만 봐도 네 명의 아들 모두 이곳과 인근의 증류소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믿을만한 사람인가요?”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더구나 그 친구의 아버지가 꽤 유명하거든요.”

“혹시 저도 아는 사람인가요?”

“아주 잘 알고 계시죠. 제가 추천하는 분이 글렌아워의 테넌트 씨 장남입니다.”

아··· 맞다!

장남이 마케팅 일을 한다고 했지.

심지어 예전에 글렌아워에서 머물 당시에 손녀를 데리고 글렌아워 증류소를 찾아와서 만나본 적도 있었다.

그때의 첫인상은 꽤 훌륭했다.

테넌트 씨와 외모도 상당히 닮았지만, 무엇보다 성격이 정말 좋았다.

어디 가도 인싸였을 것 같은 성격마저도 테넌트에게 물려받은 것 같았다.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던 탓일까.

뫼리스는 자신이 혹시 선을 넘는 발언을 했거나 추천 대상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조금 그런가요?”

“하하! 아니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추천이라 조금 놀란 겁니다.”

“능력은 제가 보장할 수 있습니다. 끌루소에서 히트한 랜덤 박스도 어니스트와 협업해서 만든 것이었죠.”

“여길 맡으면 지금껏 함께 일해오던 끌루소의 협력사가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괜히 끌루소에 손해를 끼치는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뫼리스는 그런 우려는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나라마다 있는 여러 협력사 중의 하나일 뿐이라 문제 될 부분은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겠네요.”

“제가 연락해서 미팅을 잡을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결정해야 할 사항이었다.

뫼리스는 어니스트와 잠시 통화를 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사이에 나도 스마트폰을 꺼내 한국에 있는 수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초 정도 기다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호가 내 전화를 받았다.

[이제 바쁜 거는 다 끝난 거야?]

“아직 할 게 산더미 같지. 오늘 글렌 툴릭 대표로 세울 사람 면접 보려고.”

그게 테넌트 씨의 아들인 것은 아직 이야기해줄 필요가 없었다. 확실하게 정해진 후에 말해도 늦진 않았다.

[잘됐네. 그러면 언제쯤 돌아오는데? 조만간 RJ 술도 런칭하는데 안 올 거야?]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일정 맞추려고 애쓰고 있어.”

감저의 런칭 준비는 거의 끝났다.

이제 곧 시중에 내놓으면 될 뿐이었다.

생각보다 레시피가 잘 뽑힌 탓에 애초에 예정했던 5만 병의 초도 물량이 어느덧 10만 병까지 늘어났다.

항상 보수적인 관점에서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역할을 하던 수호가 웬일로 자신감을 보여준 것도 한몫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폭적인 지원을 해줄 생각이었다.

명색이 오저당의 이사인데 맡고 있는 제품이 어느 정도 매출을 뽑아야 하잖아.

거기에 RJ라는 치트키도 있기에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오죽하면 뫼리스와 카를로스도 RJ와 협업해서 술을 빚고 있다고 하니 곧장 2만 병씩 주문을 넣어놨을 정도였다.

그것만 합쳐도 벌써 거의 절반 정도인데 편의점과 마트 그리고 주류 상사에서 미리 선점한 물량도 꽤 많았다.

[지금 들어온 주문만 다 합쳐도 10만 병은 런칭과 동시에 사라질 것 같아.]

“다음 출고는 언제쯤 가능해?”

[열흘 후에 5만 병 나오고 그 뒤부터는 일주일 단위로 5만 병씩 가능해.]

월산 생산량이 20만 병이란 의미다.

하지만 그게 생산 가능한 양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 애초에 5만 병 단위로 생산 계획을 짜서 그 정도였다.

만약에 마음 먹고 생산하기 시작하면 매달 50만 병씩 빚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거기에 숙성 탱크 같은 설비만 증설하면 100만 병 단위도 어렵지는 않았다.

“감자 확보는 잘되고 있는 거지?”

생산보다는 재료 확보가 문제다.

이게 소량 생산일 때는 문제가 아니지만, 대량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리 삼척에서 수매해준 감자가 상당히 많았으나 공산품이 아니라 가격과 품질 차이를 줄이는 게 꽤 어려웠다.

그래도 올해 여름에 나오는 감자는 미리 사전 약정을 걸어 놨기에 그때까지 얼마나 술이 팔리느냐가 관건이었다.

[너무 안 나가도 문제고, 너무 많이 팔려도 문제지. 새로운 제품을 런칭할 때마다 이게 가장 어려운 것 같아.]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는 점쟁이도 아닌데 당연히 예측하는 게 쉽진 않지.”

그리고 그 문제는 생산을 책임지는 수호가 아니라 황동선 이사와 사무직이 분석을 통해서 결정하는 것들이었다.

[이왕이면 폭발적으로 팔려서 품절되는 상황이 속은 편할 것 같아.]

“예전에는 품절 대란 이야기만 나오면 치를 떨더니 너도 많이 바뀌었네.”

[재고 쌓아두고 보는 게 더 속 쓰려.]

오저당의 술이 모두 다 대박을 치는 것은 아니다. 마이크로 양조장에서 빚는 술은 아직 반응이 크게 나오진 않았다.

천천히 마니아층을 늘리고 있으나 그 속도는 꽤 더뎠다.

물론, 그 기준이 조금 모호하긴 했다.

기존의 벽향주나 굿밤 같은 술들은 남다른 제품이었다. 모든 것을 그렇게 높은 기준으로 보면 쉽지 않았다.

[···응? 지금?]

그때 뭔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가 라니 같았는데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 들리진 않았다.

하지만 수호가 하는 말을 들으니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설마? 진희 씨 오늘 출산하는 거야?”

[귀 겁나 밝네. 그게 들려?]

“이런··· 직접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갑자기 스코틀랜드 증류소 인수한다는 말을 할 때부터 그럴 줄 알았어.]

“나도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어쩔 수 없잖아. 170년 된 증류소를 그 가격에 가져오는 일이 흔하진 않다고.”

이거 호세에게 미안해서 어쩌나.

안 그래도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전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하는 거 아냐? 정신없이 운전하다가 사고 날지도 모르니 네가 직접 운전해서 데려다줘.”

[그럴 필요 없어. 예정일이 다가와서 아예 며칠 전부터 병원 근처에 지내고 있어. 지금쯤이면 병원에 도착했겠네.]

도시와 시골 라이프 스타일의 가장 큰 차이는 문화생활뿐만 아니라 병원 같은 시설에서도 큰 차이가 난다.

삼척에도 산부인과가 있으나 많은 이들이 동해로 가는 이유도 거기 있었다.

물론, 오풍리는 태백이 더 가까웠기에 진희 씨는 그쪽에서 진료를 받았다.

그러니 아이를 낳는 것도 아마 그곳에서 할 것이라 예상됐다.

“나 대신 축하한다고 꼭 전해줘.”

[오케이! 호세도 이해해줄 거야. 더구나 네가 산 선물이 한두 개도 아니었잖아.]

여기 머무는 사이에 미국에서 사서 보낸 것들이 오저당에 도착했다. 그 꾸러미 안에는 옷부터 시작해서 온갖 게 있었다.

통화는 그리 오래 이어지진 못했다.

아직 진통 중이라 출산하려면 멀었으나 축하해주러 가려면 호세 몫까지 일을 끝마쳐야 하기에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전화를 끊고 스마트폰을 내려놓자,

때마침 뫼리스도 통화를 끝낸 건지 호텔 로비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곧장 통화 결과를 말해주었다.

“저녁에 여기로 오겠답니다.”

“일하는 곳이 에든버러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에든버러가 가까운 곳은 아니다.

서울에서 부산 정도라고 보면 된다.

170마일 정도 떨어져 있기에 아무리 빨리 이동해도 최소 4시간 정도는 걸리는 거리다.

그렇다고 비행기를 타기도 애매했다.

공항에 가서 기다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오히려 더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지루하진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넘쳐났다.

미국과 멕시코 등에서 걸려 온 화상 회의를 하고 김영채 변호사와 함께 글렌 툴릭 인수에 관련된 일을 처리하니 금방 저녁 시간이 됐다.

어느덧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

에든버러에서 출발한 테넌트 씨의 장남인 어니스트가 호텔로 찾아왔다.

급하게 달려왔음에도 그의 옷차림이나 모든 것은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예전에 테넌트 씨의 집에서 편안하게 입었던 모습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나와 뫼리스는 동시에 일어나 새롭게 태어날 글렌 툴릭을 이끌 유력한 후보자를 맞이해주었다.

“다시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어니스트 테넌트 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