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생 (7)
미팅 장소는 호텔 방이었다.
스코틀랜드에 머물며 우리는 방 하나를 아예 사무실처럼 사용하는 중이었다.
거실 한편에 놓인 테이블에 앉은 나는 어니스트와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그게 오래가진 않았다.
불필요하게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은 내가 제시하는 자리에 관심이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러니 돌려 물을 필요는 없지.
“뫼리스 씨에게 이 자리가 왜 마련된 건지 들으셨나요?”
“네, 간단하게 듣긴 했습니다.”
“글렌 툴릭을 어니스트 씨에게 맡기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신이 있냐는 질문이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일을 맡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서도 능력과 열정 두 가지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따로 나눠서 생각할 수는 없었다.
능력이 없는데 쓸데없이 열정만 넘쳐서 일을 그르치는 사람이 가장 문제다.
사고 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반면에 능력은 있으나 열정이 없으면 글렌 툴릭처럼 도태되고 말 것이다.
이미 능력에 대해서는 뫼리스 씨가 보증했으니 그의 열정을 보고 싶었다.
현재 오저당의 임원 중에 열정이 부족한 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들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글렌 툴릭의 현재 상황상 역동적인 움직임이 가장 필요했다.
역사는 지속적으로 유지하되,
새로운 도전을 해야만 되살아난다.
내가 본 글렌 툴릭은 오래된 각질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상태에 가까웠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죠. 아버지를 보면서 언젠가 증류소를 직접 운영해보고 싶었거든요.”
“디스틸러가 아니라 경영을요?”
“저는 생산보다 완성된 제품과 서비스를 대중에게 선보이는 쪽이 더 재미있어서 마케팅을 시작했습니다.”
“글렌 툴릭을 되살릴 묘책 같은 걸 기대해도 될까요?”
별다른 기대 없이 질문했지만,
어니스트는 진지하게 대답을 했다.
아버지 증류소에서 일했던 경험이 헛되진 않았는지 여러 상황을 가정하고 해결 방안을 고민해본 티가 났다.
고작 네 시간 만에 떠올릴 그런 내용은 아니었다. 만약에 그게 가능하다면 그것 나름대로 충분히 인상적인 일이다.
물론, 대부분의 접근법이 마케팅에 기반한 시선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중에는 내가 구상하던 것과 비슷한 것도 있기에 여러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으니 꽤 오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꽤 흡족했다.
“좋네요. 만약에 글렌 툴릭을 맡게 된다면 지금 운영하시는 회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정리하길 원하신다면 하죠. 다만, 직원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내가 압박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폐업까지도 고려하고 있는 눈치였다.
사업체를 동시에 운영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이미 오저당 F&B를 삼촌에게 맡기며 같은 상황의 결과를 직접 확인했다.
가능하다면 온전히 글렌 툴릭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거기 직원들은 무슨 죄겠어.
괜히 일자리를 빼앗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는데 생각해 보니 굳이 해체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직원이 몇 명이나 되죠?”
“저를 제외하면 모두 네 명입니다.”
“그러면 모두 글렌 툴릭으로 입사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마케팅을 하던 사람들이라 맡길 일이 애매할 겁니다.”
“여기서 다른 일을 시킬 생각은 없어요. 사람마다 잘하는 게 다르잖아요.”
아예 어니스트의 회사를 인수하는 느낌으로 모든 직원을 데려오고 싶었다.
안 그래도 오저당에서 황동선 이사가 이끄는 마케팅팀의 업무량이 과중했다.
그들만으로는 모든 걸 커버하기 어렵다.
마케팅이라는 게 새로 출시되는 신제품에만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기존 제품의 판매량을 유지하고 한 단계 더 상승시키는 작업이 훨씬 중요하다.
애써 만들어낸 술의 수명이 짧게 사라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업무를 진행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매년 새롭게 출시되는 신제품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평범한 주류 회사의 루틴과는 완전히 다른 오저당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회의적이었다.
내가 구상한 것을 알지 못한 탓이었는데 글렌 툴릭 만으로는 마케팅 부서에 네 명이나 두는 게 쉽진 않다고 봤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저당이 여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현재 그룹내에 제대로 꾸려진 마케팅 부서는 한국만 유일하게 있죠.”
엄연히 다른 법인이긴 하지만,
다 같은 그룹 내에 속한 공동체다.
이번 기회에 멕시코와 미국 해외 법인의 마케팅 지원을 하고 있던 한국의 짐을 나눠서 이쪽에 맡기고 싶다고 밝혔다.
안 그래도 돈 레오넬의 생산량도 늘어나고 있는 터라 유럽 쪽에 배정되는 수출량도 점차 늘어나게 될 예정이다.
그때가 머지않았기에 시기도 적절했다.
“그러면 돈 레오넬이나 파사데나 버번 마케팅을 서포트하는 건가요?”
내 이야기를 들은 어니스트는 눈을 반짝이며 상당히 반겼다. 아무래도 직원들의 거취 때문에 마음이 쓰였겠지.
더구나 소규모 마케팅 회사에서 이제는 글로벌 주류 회사로 거듭나고 있는 오저당 소속으로 바뀌는 것이다.
당연히 복지나 연봉 규모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나 역시 이직하는 이들에게 두둑하게 챙겨줄 생각이었다.
“만약에 둘 중의 하나를 서포트하라면 어느 쪽이 더 끌리시나요?”
“하아··· 너무 어려운 결정인데요.”
“그런가요? 저는 고민할 것도 없이 돈 레오넬을 택할 줄 알았는데요.”
“스카치와 버번이 완전히 다른 맛을 지니고 있으나 같은 위스키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죠.”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갔다.
잠시 고민하던 어니스트는 가리지 않고 유럽으로 수출되는 것이라면 모두 다 하겠다는 것으로 결정했다. 당연히 거기에는 한국의 제품도 포함됐다.
“아! 생각난 김에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될까요?”
“무슨 제안이요?”
“위스키 업계에서 마케팅을 잘하는 곳이 몇 곳이 있는데 그중에서 MM이 혁신적인 마케팅을 많이 시도하죠.”
“MM이라면 메이커스 마크 맞나요?”
내 질문에 어니스트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왁스로 유명한 메이커스 마크는 다양한 홍보를 진행했다고 한다.
어니스트는 그들이 진행했던 것 중의 하나를 내게 제안했다.
“10년 전쯤에 MM에서 소셜 미디어 홍보를 위해 보틀 크기에 맞는 어글리 스웨터를 선물로 만든 적이 있죠.”
“그런 적이 있었어요?”
“다른 곳에서도 캠페인 등을 목적으로 몇 차례 진행한 사례가 있긴 했는데 이걸 퍼플 라벨에 적용하면 어떨까요?”
생각해 보니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돈 레오넬과 벽향주 그리고 글렌 툴릭과 파사데나까지 각 나라의 전통 의상을 디자인해서 입히면 어떨까.
하지만 단가를 무시할 수 없다.
어떤 방식을 택하냐에 따라 어쩌면 제품 판매가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만큼 소비자에게 부담이 전가될 것이다.
그러니 모든 제품에 적용하긴 어렵다.
다만, 3년 이상 숙성해서 한정 수량만 판매하는 벽향주 옐로우 라벨 같은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모든 제품에 다 주는 것은 어렵죠. 희소성이 떨어지니 의미도 없고요. 브랜드별로 100개 정도만 하시죠.”
한정판의 한정판이랄까.
하지만 경쟁을 부추길 생각은 없었다.
추첨하는 방식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말하자 어니스트도 동의했다.
“그게 가장 깔끔하긴 합니다.”
“다른 직원들이랑 논의가 필요하니 나중에 따로 제안서로 넣어주세요.”
“그럼 제가 글렌 툴릭을 맡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요?”
“당연하죠. 앞으로 글렌 툴릭을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스웨터 마케팅 이야기를 꺼내기 전부터 이미 나는 어니스트에게 글렌 툴릭을 맡길 생각이었다.
맡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테넌트 가문이 이 근방에서 이루고 있는 커뮤니티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실제로 이번에 인수하면서도 테넌트 씨의 도움을 꽤 많이 받았다.
무엇보다 순수한 열정이 좋았다.
적어도 원래 주인인 헤이터보다 훨씬 더 이곳을 잘 이끌 거라 믿음이 갔다.
애초에 글렌 툴릭이 술맛으로는 흠잡을 곳이 없었으니 앞으로 나아갈 길만 잘 찾아주면 될 것이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은 아직이신 거죠?”
“네, 슬슬 내려가서 먹어야죠.”
“그러면 집으로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아버지가 이야기 끝나면 모시고 와달라고 부탁했거든요.”
“그러시죠. 그런데 우리 일행 숫자가 제법 되는데 괜찮을까요?”
나만 입은 아니잖아.
적어도 다미안과 뫼리스 그리고 김영채 변호사 정도는 챙겨줘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넉넉하게 준비하신다고 하셨으니 다 같이 오시면 됩니다.”
*
그 뒤부터는 일이 술술 풀렸다.
어니스트가 법인의 대표로 세워지고 한국에서 투자금이 정상적으로 들어와 계약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쯤 되자 슬슬 귀국 준비를 했다.
더는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나머지는 어니스트가 맡아서 진행해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증류소의 핵심 인력인 술을 빚는 이들과 디스틸러 전부 그대로 남았기에 술맛이 바뀌거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아질 게 분명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오저당은 인수 후에 추가로 반년 이내에 200억의 투자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 돈으로 추가 저장고를 짓고 생산량을 늘리면 그만큼 요정이 더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곧장 떠나지는 않았다.
그 전에 이곳에서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나는 출국 직전까지도 증류소에 있어야만 했다.
사사삭 사악···.
하얀 스케치북에 그려지는 스코틀랜드 요정들의 모습은 꽤 익살맞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스프라이트 컬렉션에 추가하려면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내게 라니와 같은 그림 실력은 없으니 한국에 가서 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로 코앞에 있는 요정을 스케치하는 것도 간신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산만하던 녀석들이 그나마 가만히 있기에 가능했는데 전적으로 향이 덕분이었다.
그리고 여기 요정들도 내 그림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킬트!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판초와 스퍼와 동급인 글렌 툴릭 요정의 이름은 킬트(Kilt)로 정해졌다.
녀석의 하반신을 감싸고 있는 체크 스커트가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인 킬트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스케치북에는 킬트와 스코틀랜드 요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같은 과정을 거쳐 스퍼와 파사데나 요정의 모습을 스케치 따놨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파사데나 버번도 스프라이트 컬렉션에 포함될 예정이니 정식 라벨은 따로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들어가면 라니에게 맡겨야 하는 일이 제법 많았다.
글렌 툴릭과 파사데나 보틀과 라벨 디자인도 해야 하고 어니스트가 말한 마케팅 준비도 필요했다. 그리고 새로운 요정들을 주인공으로 디자인한 카톡 이모티콘 작업도 해야겠지.
고지효 사원과 함께 둘이서 지금까지 해오던 일의 양이 너무 많긴 했다.
아마 내가 가져가는 일감을 보면 내 머리끄덩이를 잡을 기세로 펄쩍 뛸 게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최근에 디자인 쪽에도 경력직 직원이 한 명 충원됐다는 것이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스케치가 끝났기에 여전히 엄한 표정으로 킬트에게 주의를 주는 향이를 말려야 했다.
“이제 다 그렸으니 그만 야단쳐.”
[예쁘게 나와야 하니 그렇죠.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겠어요?]
“한국에 돌아가면 라니가 예쁘게 다시 만져줄 거니 걱정하지 마.”
어차피 내 그림 실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기존에도 라니가 거의 재창조했을 정도였다. 향이가 계속 옆에서 지적질을 해준 덕분에 수정도 꽤 오래 했었지.
아마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서 공항까지 거리가 제법 멀어서 시간이 꽤 걸리니 슬슬 이동할 준비 하시죠.”
때마침 다미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기지개를 한 차례 크게 한 뒤에 시계를 보니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거의 2개월 만에 출장을 끝내는 터라 한시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얼큰한 김치찌개에 소담 퍼플 라벨 곁들이면 소원이 없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