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저합니다 (1)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한정식 식당부터 찾았다.
김영채 변호사와 헤어지기 전에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정도는 대접하고 싶었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일정이 있는데도 글렌 툴릭 인수를 위해 스코틀랜드까지 와줬다는 게 너무 고마웠다.
물론, 그만큼의 보상도 주어졌다.
법무법인 해국은 전체 인수 금액의 일정 비율만큼 수임료로 받았고 그 덕분에 이번 출장에서 수억 원을 챙겨갔다.
한 달 동안 세팅을 도와준 것치고 제법 많은 돈이었으나 아깝지는 않았다.
지금껏 오저당에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일처럼 도와줬기 때문이다.
법률 자문이 필요할 때마다 김영채 변호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언을 해줬고 따로 자문료를 받지도 않았다.
그것에 대한 보상이 지금 들어갔다고 봐도 되었다.
“다음에는 여유를 갖고 인수하시면 더 저렴하게 인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번에는 헬리엇이 채가기 전에 가져와야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뭐··· 이번 케이스는 이해합니다. 그래도 오저당과 같이 일하니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겨서 좋네요.”
“앞으로 더 큰 규모의 인수도 진행될 테니 쭉 저희와 함께하시죠.”
올해 수익은 당분간 글렌 툴릭과 헬리엇 사모 펀드에 투자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예정이나 인수를 멈출 생각은 없었다.
아직 계획은 전혀 없으나 아직 오저당 품 안에 가져오고 싶은 술이 많았다.
보드카와 럼 외에도 언젠가 와인을 빚는 와이너리도 보유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 자리를 잡기 시작한 벽향주와 돈 레오넬에서 나오는 수익이 작지 않기에 하반기나 내년에 다시 움직일 수도 있다.
아니면 스카치 위스키를 빚는 증류소를 더 사들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미 스코틀랜드에 현지 법인까지 만들어놨으니 열심히 굴려야지.
“물론이죠. 오히려 제가 바짓가랑이 붙잡고 안 놓아드릴 겁니다.”
김 변호사는 넉살 좋게 웃으며 비어버린 내 잔을 가득 채워줬다. 당연히 우리가 마시는 술은 오저당의 벽향주였다.
한정식을 파는 곳이라면 기본적으로 벽향주를 가져다 놓는 게 트렌드가 됐다.
아무래도 가성비 때문이다.
어지간한 고급 소주와 비교해도 화이트 라벨의 품질은 뒤처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한정식 식당에서 추천하기 적당한 편이기는 했다.
그렇게 가벼운 뒤풀이를 마친 뒤.
다미안과 나는 삼촌이 계신 F&B를 잠시 들렸다가 삼척으로 향했다.
지난해 4/4 분기 보고를 받기 전에 미국으로 출국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얼마 뒤면 설날이 다가오는데 다시 서울에 올라오기 귀찮다는 게 이유였다.
오저당에 자리를 잡은 이후부터 모든 명절은 따로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그리 외롭진 않았다.
오저당 직원들 중에는 보육원 출신도 상당한 편이라 나처럼 오풍리에서 연휴를 보내는 이들이 꽤 많은 편이었다.
실제로 설날 당일은 꽤 바쁘다.
선물 세트를 가지고 동네 어르신들께 인사드리며 돌아다니는 것도 해야 한다.
그리고 오저당과 연을 맺은 보육원 아이들 선물도 찾아가서 줘야 한다.
매년 찾아가다 보니 이제는 안 가면 서운해할 정도라 외로울 틈도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을 쪼개서 다닌 덕분에 오저당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한 덕분에 직원들은 아직 퇴근하지 않았는데 가장 먼저 우릴 반겨준 것은 수파싯이었다.
“캐리어는 제가 옮겨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출장 가서 생각해 보니 예전에 공부했던 곳이 에든버러 대학교 맞죠?”
“네, 정말 좋은 곳이었죠.”
“다음에 스코틀랜드 출장 갈 일이 있으면 같이 다녀오죠. 아니면 연수 신청을 해도 좋고요.”
오저당의 연수 프로그램은 생산직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관리직과 사무직도 짧게나마 경험 삼아 해외에 보내주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거기 가서 술을 빚는 것을 배우는 것은 아니고 가능한 많은 증류소를 돌아다니며 시스템을 보고 돌아왔다.
오저당에 도입할만한 시스템이 있는지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그 덕분에 오저당의 설비 일부는 더 능률적인 방향으로 변형되기도 했다.
다양한 견문을 쌓는 게 왜 중요한 건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한 가지 분야에 몰두해서 고인물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완전히 고여서 썩을 정도가 되면 어디에도 쓸 수 없다.
그런 사례의 대표적인 예가 글렌 툴릭이 아닐까.
하지만 모든 것을 배울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오저당이 훨씬 더 좋은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케이스도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숙성된 소담 소주를 베이스로 만드는 ASAP 공정이 대표적이었다.
잠시 수파싯과 에든버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에 여기 있으면 안 되는 호세가 보였다. 지금쯤이면 아직 출산 휴가 중이여야 정상이었다.
“호세! 출산 휴가 아직 안 끝났잖아. 왜 회사에서 알짱거려?”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들렸어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가서 제수씨나 잘 돌봐드려.”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진희 씨나 강진희 사원이라고 불렀지만, 수호와 호세만 따로 있을 때는 제수씨라는 호칭을 썼다.
뭐랄까 그게 더 끈끈한 느낌이라는 수호의 주장 때문이었다.
“제가 오래 빠지면 오풍주는 어쩌려고요. 이제는 오풍주만큼은 유수호 이사님보다 제 실력이 훨씬 더 좋단 말이죠.”
호세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면서 집에만 있기도 애매하다며 변명을 했다. 현재 와이프인 진희 씨는 조리원에서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호세는 집과 조리원을 오가며 아기를 보고 있다고 했다.
“어쨌든 축하해. 수호가 보내준 사진을 봤는데 너무 예쁘더라.”
“다행히 제 엄마를 쏙 빼닮았어요.”
“이름은 지었어?”
“아직 짓지 못해서 태명인 동동이라고 계속 부르고 있어요.”
왜 태명이 동동이냐고 예전에 물었더니 동동주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제수씨가 평소 마시지도 않던 동동주를 임신 중에 그렇게 마시고 싶어 했다나.
그래서 동동이라고 지었다고 했다.
오풍주를 담당하는 호세 아이답달까.
하지만 출산했다고 곧장 술을 마실 수 있는 것도 아니라니 임신과 출산은 물론이고 육아까지 쉬운 게 없어 보였다.
“수유 때문에 당분간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하니까 엄청 우울해하던데요.”
“논알코올 제품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1% 미만인 알코올도 0%로 표기돼서 그것도 안 된다고 하네요. 완전한 알코올 프리는 아니라는 말이죠.”
거기까지는 몰랐었다.
애초에 논알코올은 관심이 없었다.
오저당의 가장 큰 무기는 요정들이 해주는 주류의 숙성인데 알코올이 빠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향이와 다른 요정들은 탄산음료나 일반적인 물도 마시지 않았다.
혈관에 알코올이 흐르는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그나저나 글렌 툴릭이란 위스키는 가져오신 거죠?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수백억을 태운 건지 궁금하네요.”
“내가 아니라 위스키를 기다린 거였어?”
“겸사겸사 온 거죠.”
술을 마시고 조리원에 다시 가보는 것은 조금 그렇지 않냐고 하자 호세는 많이는 안 되고 테이스팅은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다시 조리원 가려면 운전해야 하잖아.”
“아차··· 그걸 까먹었네요.”
“나중에 제대로 만들어진 게 오면 원 없이 마시게 해줄 테니 오늘은 그냥 패스하자.”
“알겠어요.”
호세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걸 마시면 오늘 밤에 동동이를 보러 가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게 이야기 나누는 사이에 직원들이 하나둘 모였다.
“저 없는 동안 다들 수고 많았어요. 퇴근 시간이 머지않았는데 때 되면 가시고 실장급과 임원은 저랑 회의 좀 하시죠.”
그렇게 말한 뒤에 회의실로 곧장 직행하자 그 뒤를 따라 황동선 이사를 비롯한 임원들이 쫓아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호세도 들어오려고 했으나 그건 수호가 잘라냈다.
“출산 휴가자는 열외야. 그러니 알짱거리지 말고 가서 아기나 봐.”
호세는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렸고 임원진이 모두 착석한 뒤에 귀국길에 가져온 글렌 툴릭의 위스키를 꺼냈다.
“뭐냐, 고작 두 병이 전부야?”
“나머지는 글렌 툴릭의 대표가 된 어니스트가 따로 보내주기로 했어.”
“테넌트 영감님 반응은 어땠어?”
“엄청 좋아하시더라.”
아들과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지 궁금할 정도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단순하게 테넌트 씨의 아들이라 대표 자리를 준 것은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해두어야 했다.
낙하산 취급을 받을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세운 회사까지 접어가며 나름의 진심을 보인 것도 언급했다.
당연히 테넌트 씨를 직접 겪어본 수호가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여기서 그런 오해를 할 사람은 없잖아. 보스가 어련히 잘 뽑았겠지.”
“그리고 예고했던대로 파사데나 버번과 추가로 글렌 툴릭까지 스프라이트 컬렉션에 들어갈 겁니다.”
“글렌 툴릭도?”
수호의 질문에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두 개의 제품만 가지고 컬렉션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더구나 스코틀랜드 하면 스카치 위스키가 떠오를 정도이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건 라벨에 사용할 디자인 초안인데 디자인할 때 참고했으면 좋겠어.”
나는 스케치북을 라니에게 조심스럽게 넘겼다. 어쭙잖은 실력을 자랑하기에는 라니의 재능이 워낙 출중했다. 괜히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고 싶진 않았다.
디자이너에게 디자인 초안을 만들어 주는 게 조금 이상해 보여도 그렇게 보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기 있는 이들치고 내가 벽향주와 돈 레오넬의 캐릭터 디자인 초안을 직접 만든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대신 부담되는 시선이 느껴졌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캐릭터일지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각 나라의 전통 복장은 뻔하잖아.
“예상대로 미국은 카우보이고 스코틀랜드는 스커트를 입은 요정이네.”
“작업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이 정도면 충분하지.”
라니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미 동일한 작업은 많이 해본 상태다.
올해도 스프라이트 컬렉션은 다시 한번 라벨을 새롭게 바꿔서 선보였다.
하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나는 이왕에 다들 모인 김에 귀국 전에 메일로 받아놨던 어니스트의 마케팅 제안서를 화면에 띄웠다.
표지를 띄운 상태에서 나는 어니스트가 이끌었던 마케팅 회사에 대해 설명했다.
그들 모두 데리고 와서 마케팅팀을 하나 더 구성하기로 했다는 것을 미리 밝히자 황동선 이사는 쌍수를 들고 반겼다.
“이제 고통 분담을 할 팀이 생겼군요.”
“경쟁 대상이기도 합니다.”
“하하! 절대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글렌 툴릭을 맡은 어니스트가 제안한 건데 한번 보시고 의견을 말해주세요.”
제안서는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 여섯 페이지 정도가 끝이었다.
기존에 MM에서 진행한 예시와 예상되는 효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보틀에 이미지를 합성한 사진이 끝이다.
흘깃 황동선 이사를 보니 흥미로워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그가 아닌 라니였다.
완전히 취향을 저격당한 건지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머릿속에서 우리 술에 어떤 옷을 입혀볼까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멋! 이거 너무 귀엽잖아.”
“우리도 스프라이트 컬렉션의 특징을 살려서 만들어 보는 거는 어떨까?”
“재미있을 것 같네. 그런데 저거 내가 디자인은 할 수 있어도 실제 구현이 가능할지 확인하기가 어려워.”
그 정도는 감안하고 있었다.
라니라고 모든 걸 잘하지는 않는다.
지금껏 해오던 제품 디자인은 의류와 결이 많이 다르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건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일단 디자인부터 해놓고 구현 가능한 이를 찾아내서 맡기면 되는 일이다.
많아 봐야 수백 개에 불과하니 아무리 제작비용이 비싸도 부담되진 않았다.
어차피 매년 마케팅 비용은 늘어나고 있는 중이었고 올해 국내에서 사용하려고 책정한 예산도 십억 원 정도에 달했다.
그중의 일부를 가져다가 쓰면 된다.
이야기가 얼추 마무리되자,
나는 회의 주제를 감저로 바꿨다.
런칭을 앞두고 일정에 맞춰 나도 돌아왔으니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가 되긴 했다.
한편으로 내가 없는 동안에 진행되고 있던 준비 과정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건지 알고 싶었다.
“이제 감저 런칭 이야기를 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