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저합니다 (2)
오저당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중.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이 바로 감저다.
파사데나 버번은 시간이 필요하니 진득하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고 글렌 툴릭은 큰 문제가 없을 거라 예상됐다.
그리고 굿밤조차 순항 중이다.
어느덧 런칭 3개월 차가 되었는데 상당히 빠른 속도로 판매량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직 맥주 공장이 풀가동이 될 수준은 아니나 그래도 수익이 꽤 커졌다.
매달 올리는 수익은 5억 남짓.
마지막 보고서가 그 정도쯤 됐다.
이제 남은 것은 감저밖에 없었다.
감저만 제대로 안착시키면 당분간 마음 고생 없이 과실만 따 먹으면 된다.
감저의 위치는 특별했다.
오저당에서 빚는 것은 같았지만,
RJ의 후광을 받고 진행하는 제품이다.
그만큼 오저당에서 거는 기대도 제법 큰 상품이었다.
알게 모르게 지원도 많이 들어왔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강원도와 삼척이다.
삼척은 오저당에서 하는 일이라면 뭐든 도우려는 곳이었고 강원도는 감자를 이용한 술에 관심이 많았다.
몇 년 전에는 가뭄과 고온 현상 때문에 한때 감자 수확량이 반토막 나는 일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정반대가 됐다.
워낙 많은 양이 수확되어 값이 폭락하자 농가에서 수확조차 포기할 정도였다.
그 무렵에 감저를 빚기 시작했다.
시작 단계인 탓에 당장 많은 양을 수매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꾸준히 소비할 곳이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었다.
그러니 삼척에서도 우리 대신 수매에 나설 명분이 있었다.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것도 아니다.
감자 특유의 부드러움과 촉촉한 맛이 살아 있는 독특함도 가지고 있다.
RJ와 함께 제품화를 고려할 때도 느낀 건데 그냥 우리가 팔아도 스테디셀러 정도는 될 물건이었다.
“감저는 예정대로 일주일 후에 런칭을 진행하는 동시에 주류 상사를 통해 시중에 풀기로 되어 있습니다.”
보고는 황 이사가 맡아서 했다.
감저를 빚는 것은 수호의 몫이지만, 유통과 마케팅에 대한 업무는 황 이사가 관리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면 적어도 며칠 이내에 출고 작업을 마무리해야겠네요?”
“네, 초도 물량이 많지 않아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사흘 정도면 될 겁니다.”
“이번에 출고되는 물량 중에 F&B로 들어가는 양이 어느 정도죠?”
당연히 감저의 일부 수량은 F&B에 보내서 판매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처음에 만 병이던 초도 물량이 10만 병까지 늘었으나 부족할 게 분명하다.
이미 분위기가 그랬다.
어지간한 곳들은 감저가 RJ의 투자로 만들어진 브랜드라는 사실을 안다.
우리가 의도해서 흘린 것은 아니었으나 일이 그렇게 되고 말았다.
애써 감출 비밀도 아니었다.
RJ가 직접적인 감저 홍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찌라시라도 뿌려야 하나 고민한 적도 있었다.
“만 병 정도가 이번에 들어가고 다음에 나오는 물량부터는 최소 10% 이상은 F&B로 배정하기로 했습니다.”
“비율은 판매량을 보고 변경하죠.”
그게 서로 부담이 적었다.
별로 나가지도 않는 것을 푸쉬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많이 팔리면 더 많은 물량을 밀어주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매출을 봤을 때.
적지 않은 양을 소화할 수 있을 거다.
당연히 오저당에서도 어느 정도 프로모션 같은 것을 걸어줘야 한다.
같은 그룹에 소속된 회사다.
남들과 똑같이 대할 수는 없지.
다행히 내가 지시하기 전에 황동선 이사는 기본적인 할인 외에도 여러 프로모션을 걸어줬다고 했다.
“그런데 F&B에 만 병이 들어가면 다른 주류 상사에 풀리는 게 5만 병인가요?”
“네, 끌루소와 바크모에 나가는 4만 병을 제외하면 그렇게 됩니다.”
“지방에 있는 작은 주류 상사 같은 경우에는 순서도 오지 않겠네요.”
“그쪽은 다음에 나오는 물량 대부분을 밀어주기로 약속해놨습니다.”
어설프게 몇 박스씩 줄 바에는 그게 훨씬 안정적이긴 했다. 한 차례 출고할 때마다 모든 곳이 몰려들면 혼잡해질 뿐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규모가 큰 쪽만 너무 밀어주진 말고 가능하면 공평하게 해주세요.”
“그럼요. 최대한 말 나오지 않게 잘 배분하겠습니다.”
오저당이 엄청난 속도로 커졌으나 거래처에게 절대적인 갑은 아니다.
지금 오저당이 올리고 있는 매출은 도소매에서 힘을 실어줘야 유지된다.
만약에 그들이 등을 돌린다면,
매출이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주류 상사가 합심해서 관리하는 지역에 우리 술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아무리 손님들이 찾아도 냉장고에 술이 없으면 그걸로 끝이다. 대부분의 손님은 원하는 술이 없다고 옮기지 않는다.
대충 가게에 있는 다른 술로 타협하고 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몇 번의 과정을 거치면 서서히 고객의 머릿속에서 지워지게 된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것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기에 몇 명 안 되는 영업 부서에서도 매일 애를 쓰고 있었다.
“광고는 어떻게 집행되죠?”
“잡지 몇 곳에 광고를 넣고 SNS를 이용한 광고도 준비 중입니다.”
황동선 이사는 그에 관련된 내용을 정리해서 내게 보여줬다. 귀국하자마자 곧장 물어볼 거라 여겼던 것 같았다.
하긴 출장을 다녀오면 곧장 이렇게 회의를 여는 게 습관처럼 굳어졌다.
한동안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수호가 스마트폰을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그걸 내게 보여줬다.
뭔가 해서 봤더니 RJ에게 온 카톡 내용이었다.
“RJ 형이 런칭 하루 전에 오저당에 오고 싶다고 하는데 괜찮지?”
“언제부터 형동생 먹은 거야?”
“나랑 하루 이틀 연락하는 거 아니잖아.”
하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감저 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RJ와 가장 많이 연락을 주고받은 게 수호다.
평소에도 감저가 잘 숙성되고 있는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연락을 줄 정도였다.
그만큼 애정이 깊다는 의미기도 했다.
“우리야 언제든 환영이지. 그런데 해외 투어는 끝난 건가?”
“이번 주에 입국한다고 들었어.”
그와 관련된 대답은 라니가 해줬다.
평소에도 RJ가 소속된 그룹의 일정을 시간 단위로 꿰고 있는 녀석다웠다.
“런칭도 목적이긴 한데 이번에 와서 지금 짓고 있는 집의 인테리어 마무리 작업도 확인할 생각인 것 같아.”
“공사는 언제 끝나는 거야?”
“적어도 3주 후에는 마무리할 거라고 했어.”
이제 슬슬 새로운 보금자리에 넣을 가구도 알아볼 시기이긴 했다. 아마 그걸 위해서 와보기로 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제 알아보긴 해야겠구나.
기존에 한옥에서 쓰던 가구는 정말 저렴한 수준의 것들이 전부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돈이 여유롭지 않아서 대충 쓸만한 걸로 샀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적어도 쉴 때만큼은 편하게 지내고 싶기에 이번에는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Flex라는 것을 해보겠어.
“그러면 그때부터 한옥 리모델링 들어가면 되겠네?”
기존에 내가 쓰던 한옥은 다시 한번 손봐서 손님들의 방으로 쓸 예정이다.
김영채 변호사나 F&B 직원이 업무상 종종 오는데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사하시면 곧바로 시작할 수 있게 인테리어 업체와 함께 스케줄 짜놨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문제는 황동선 이사가 대답했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음에도 각자 일을 나눠서 빈틈없이 처리를 해주는 모습이 꽤 보기 좋았다.
섭섭하다거나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 없이도 이 정도로 시스템이 잘 돌아가 준다면 아무런 부담 없이 긴 출장을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또 나갈 생각은 없지만···.’
*
귀국한 지 며칠 정도가 지난 뒤.
RJ가 매니저와 함께 오저당에 왔다.
몇 개월 만에 다시 본 RJ는 상당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확실히 살도 많이 빠져 보였다.
월드 투어가 제법 힘들었던 것 같았다.
하긴 거의 두 시간 가까이 노래하고 춤추며 무대 위를 뛰어다니는 사람이다.
더구나 월드 투어잖아.
단기간 내에 끝나는 것도 아니다.
한번 그렇게 투어를 나가면 몇 개월씩 해외 생활을 하게 된다.
나도 종종 출장을 길게 다녀오지만,
그럴 때마다 한식이 너무나 절실해진다.
요즘 해외에서 K-FOOD가 유행인 탓에 한식당이 제법 많아졌으나 그걸로는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직 식사 전이면 같이 드시죠.”
한국인이라면 식사부터 챙겨야지.
아니나 다를까 RJ는 예전에 오저당에서 먹었던 이모님의 집밥이 그리웠던 건지 곧장 화색이 돌았다.
“민폐가 아니라면 부탁 좀 드릴게요.”
“우리 이제 남이 아닙니다. 같은 배를 타신 식구인데 민폐라뇨.”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면 든든하고요.”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긴 한 것 같았다.
그냥 인사치레처럼 한 말에 가까운데 RJ는 식구라는 말에 꽤 큰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혈기 왕성한 남자들이 10대부터 30대까지 긴 시간 동안 함께 스케줄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곧장 식사부터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모님과 식당 아주머니들에게 시간을 조금 드려야 했기에 우리는 일단 감저를 빚는 곳부터 찾아갔다.
“자주 못 와봐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오저당 분들이니 걱정되진 않더군요. 앞으로도 감저 잘 부탁드립니다.”
RJ는 감저를 담당하는 직원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놓는 술이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팬들에게 가능하면 좋은 술을 선보이고 싶은 욕심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감저의 숙성은 문제없이 진행되었고 이미 대부분 병입 되어 각지에 보내졌다.
이제는 성적표가 나오길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그렇게 한 차례 돌아본 뒤.
RJ가 향한 곳은 앞으로 살 집이었다.
날이 아직 많이 안 풀려 외부 조경은 마무리되지 못하고 있었으나 내부는 거의 끝났다고 봐도 되었다.
그리고 디테일한 부분은 인테리어 업체가 아니라 수호가 취미 생활도 할 겸 직접 꽃과 나무를 심기로 되어 있었다.
집주인은 RJ와 나인데 오히려 수호가 더 들떠있을 정도였다.
“어떤가요?”
“설계대로 인테리어가 잘 나온 것 같아서 만족스럽네요. 어서 이곳으로 이사 와서 살고 싶을 정도예요.”
“활동하실 때는 오저당에서 잘 관리해 드릴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RJ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으며 묘한 뉘앙스로 안 그래도 된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잠시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현재 상황을 털어놨다.
“아직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으니 비밀인데 그룹 활동은 멈추기로 했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월드 투어 중에 멤버 중에 둘이나 결혼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해서 한동안 개별 활동을 하기로 했거든요.”
지금까지 연애설은 거의 나오지 않던 그룹이지만, 알게 모르게 연애를 하고 있었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라고 했다.
어느덧 평균 나이가 30대를 넘겼기에 충분히 이해되었다. 아이돌이라고 죽을 때까지 혼자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저들이 다시 뭉칠 수 있을까?
과거에도 RJ의 그룹은 개별 활동 선언을 한 뒤에 3년이 넘게 뭉치지 못했다.
그때는 군대 문제도 있었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으나 이제는 자연스럽게 해체하는 수순을 밟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걸 위로해야 하나 아니면 축하를 해야하는 건가.
“이런··· 멤버분들에게는 좋은 소식이니 축하해드려야 하는 거 맞죠?”
“물론이죠. 다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팬들도 이해해줄 거예요.”
그리고 머지않아 결혼 발표를 할 거라니 엄청나게 많은 기사가 쏟아질 것이다.
아마도 라니를 비롯한 전 세계의 팬들이 슬퍼하면서도 축하해줄 것 같았다.
“앞으로 RJ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잠시 쉬면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작업 좀 하려고요. 어쨌든 그런 이유 때문에 당분간 오풍리에 머물 생각입니다.”
그걸 누가 말리겠어.
여기서 살겠다고 집을 지은 거잖아.
그리고 여러 개의 방 중에 한 곳은 아예 음악 작업을 하는 곳으로 세팅해놨다.
내 입장에서는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딱히 뭘 해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가 오풍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저당에 이목이 끌릴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매너 좋은 술친구가 이웃이 된다는 것은 언제든 환영이었다.
그가 오저당에 직접 온 것은 몇 번 안 되었으나 그때마다 좋은 기억이 많았다.
“그동안 바쁘게 지내셨으니 잠시 쉬었다가 가는 것도 좋겠죠.”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부탁이요?”
“이번에 하는 개별 활동에는 개인적인 사업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던 제약도 풀렸어요.”
RJ만 사업에 투자를 한 게 아니다.
다른 멤버들도 패션과 선글라스 같은 사업을 하나둘 시작하는 단계라고 했다.
이제 다들 제2의 인생에 대한 본격적인 출발을 하는 거라 봐야겠지.
“설마 감저 광고도 가능해진 건가요?”
“물론이죠. 이걸 기대했던 것은 아닌데 일이 또 이렇게 돼버렸네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 라이브 스트리밍해 볼까요?”
RJ는 자신의 별스타그램을 통해서 감저를 알리고 싶어 했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본격적으로 시작할 생각 같았다.
“제품만 알릴 수 있다면 뭐든 좋죠.”
우리 오저당의 너튜브 채널이 100만 구독자를 넘었다지만, RJ의 별스타그램은 무려 5천만 팔로워를 가지고 있다.
거의 우리나라 인구에 가까운 숫자가 가진 파급력은 상당했다.
일단 그의 별스타에서 라이브를 하고 동시에 촬영한 것은 다시 우리 너튜브에 올리면 완벽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미 여러 구상을 하고 온 건지 RJ는 라이브 타이틀까지 제안했다.
“제목은 <감저(甘藷)합니다>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