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도 맞들면 낫다 (1)
그로부터 보름 뒤.
멕시코로 출장 일정이 잡혔다.
그리고 그 출장은 평소와는 달랐다.
평소라면 조촐하게 다미안과 둘이서 움직였겠지만, 이번 출장은 다섯 명이나 추가됐다.
모두 합치며 일곱이나 되었다.
지금껏 그 정도 되는 인원과 동행한 적도 없었고 무엇보다 다섯 명의 직원이 모두 여성이란 점도 적응되지 않았다.
스물넷부터 스물둘까지.
한창 발랄할 나이의 직원이다.
내가 있다고 조심하는 것 같았으나 은연중에 뿜어나오는 기운이 상당했다.
바람만 불어도 까르르 웃을 정도였다.
더구나 해외로 나가는 것도 처음이다.
서울조차 몇 번 가보지 못한 친구들이라 그런지 다미안과 나라면 그냥 지나치던 작은 것조차 꽤 신기하게 바라봤다.
“저거 TV에서 봤는데 정말 공항에 로봇이 돌아다니네.”
“와··· 사진도 찍어줘.”
“이건 짐을 날라주는 로봇인 것 같아.”
2017년에 도입된 이후.
안내 로봇의 종류는 꽤 다양해졌다.
요즘에는 공항 곳곳으로 음식을 배달하는 로봇도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어디에 있든 음식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제법 편한 일이다.
물론, 우리가 그걸 쓸 일은 없었다.
다미안과 나는 워낙 비행기를 많이 타는 편이라 보통은 라운지를 이용했다.
우리는 그냥 들어가면 됐고 직원들은 따로 비용을 내줬다.
“다미안이 잘 좀 챙겨줘요.”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출국부터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대부분은 다미안이 나서서 해결했다.
그걸 보니 다음부터는 연수를 인솔하는 직원들에게 수당이라도 더 챙겨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다미안은 그 일을 즐겼다.
마치 여동생을 챙기듯 다정한 모습을 보니 왜 오저당에서 일하는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많은 건지 알 것 같았다.
어쨌든 ‘친절한 다미안 오빠’ 덕분에 나는 신경 써야 할 게 그리 많진 않았다.
오히려 꽤 기분이 좋았다.
다들 성인이 되자마자 오저당에 입사한 케이스라 점차 성장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저들 중에 입사 3년 차인 두 명은 내년에 대리로 진급할 예정이다.
고졸인데 입사 4년 만에 대리 승진한다는 게 이상하다고 여길지 몰라도 오저당은 학력을 기준으로 승진하지 않는다.
대졸 학력을 가진 신입 사원과 비교하면 똑같거나 많아야 1년 정도 차이가 있다.
다른 회사처럼 고졸이라고 8년이나 사원으로 굴릴 생각은 없었다.
학교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배워와도 현장의 경험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어차피 배워야 하는 것은 똑같았다.
그렇다고 아예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대졸 신입 사원의 경우에는 관련 자격증에 수당을 더해줬다.
그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도 있으나 회사 오너부터 고졸인 걸 어쩌겠어.
수호와 나는 일찌감치 자퇴했다.
휴학을 계속 연장할 수도 없었고 한참 커가던 오저당을 운영하며 학업을 병행하는 것도 불가능했었다.
“어··· 도찬아?”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스코틀랜드에서 보내준 보고서를 읽기 위해 태블릿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위로 올리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잠시 대학생 새내기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성근 선배!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날 기억하는구나?”
“물론이죠. 제가 어떻게 선배를 잊어요.”
군대 가기 전에 친하게 지내던 선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장성근 선배는 유독 나를 잘 챙겨줬다.
혈연과 학연은 아니나 굳이 따지자면 지연에 가까웠다.
선배도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 가신 부모님을 뒀고 나처럼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기 위해 돌아온 케이스였다.
우리 둘 사이에는 나이 차이도 제법 있었다.
내가 신입생 당시에 성근 선배는 제대 후에 복학했던 거라 세 살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종종 따로 나를 불러내 밥도 사주고 조언도 많이 해줬다.
“하하! 다행이네. 설마 못 알아보는 건가 싶어서 아는 척을 해도 되나 망설였거든.”
인자해 보이는 미소는 여전했다.
하지만 성격이 둥글둥글하진 않았다.
저렇게 보여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똑 부러지는 성격을 가졌다.
나는 일단 자리부터 권했다.
이 자리에서 만나서 반가웠다며 그냥 헤어지기에는 조금 아쉬운 인연이었다.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였는지 사양하지 않고 테이블 반대편에 앉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뭐 그럭저럭··· 졸업하고 교수님 뵈려고 학교에 갔는데 네가 복학하지 않았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나중에 네가 오저당의 CEO라는 인터뷰 보고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인터뷰를 자주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예 거부하는 편도 아니었다.
꼭 필요한 때가 있으면 마다치 않았다.
얼마 전에 RJ의 감저를 런칭했을 때도 나도 함께 인터뷰를 했었다.
어느덧 거의 10년 전의 일들이라 추억 보정이 어느 정도 들어간 탓일까.
선배와의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다.
풋풋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의심의 끈은 놓지 않았다.
지금껏 내게 접근해온 사람이 적지 않다.
얼굴만 알고 지내던 학교 동창이나 군대 선후임이 돈을 노리고 다가오는 일이 적지 않게 있었다.
거기에는 사기꾼도 포함되어 있었지.
그들은 마치 내게 돈을 맡겨 놓은 것처럼 굴었고 대부분 좋은 꼴을 보지 못했다.
직접 찾아와서 귀찮게 구는 사람들은 엄청난 근육량을 자랑하는 수호가 으름장만 놔도 대부분 도망쳤다.
‘과연 선배도 그런 부류일까?’
제발, 그러지 마세요.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었다.
옛 추억마저 잃어버리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명함도 안 주고받았네.”
선배는 시계를 흘깃 보더니 슬슬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냈다.
내가 받은 성근 선배의 명함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회사가 적혀 있었다.
[주식회사 오션, M&A 파트]
업계 1위 기업인 오션에 취직한 것도 놀라우나 그보다 M&A 파트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더 눈길을 끌었다.
“선배, 못 뵌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아··· 졸업하자마자 다시 미국에 돌아갔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오션에 취직할 수 있었어.”
“오션이면 M&A에 누구보다 진심인 기업이라 엄청 바쁘겠네요.”
내 말이 틀리진 않았는지 성근 선배는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이번 출장이 아일랜드라고 했으니 아마 그쪽의 브랜드를 작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국에 언제 돌아오는 거야?”
“언제나 일정이 어긋나는 편인데 예상대로면 열흘 후에는 올 거 같아요.”
“잘됐네. 나도 그쯤이면 잠시 한국에 돌아올 것 같은데 시간 맞으면 예전처럼 돼지 껍데기에 술이나 한 잔 하자.”
“오션이 아니라 오저당 술이라면 저는 언제든 오케이입니다.”
“하하!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해. 출장 잘 다녀오고 나중에 보자고.”
정말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선배는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잠시 그쪽을 바라보고 있자 거리를 두고 앉아 있던 다미안이 다가왔다.
“일정을 빼놓을까요?”
“아니, 일단 멕시코 일정부터 보고 돌아올 때 다시 생각해보자고.”
“알겠습니다. 슬슬 들어가실 시간이니 가시죠.”
“다른 직원들은 어디 있지? 아까부터 안 보이는 것 같던데.”
“잠시 면세점 구경하고 시간 맞춰서 게이트로 오기로 했습니다.”
다미안과 함께 이동하자 이미 게이트 앞에 직원들이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예전처럼 미국이나 캐나다를 들르지 않고 멕시코로 향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2022년에 직항 노선이 중단된 이후.
몇 년이 지나 올해부터 다시 인천에서 멕시코시티로 가는 직항이 부활했다.
확실히 직항이 좋기는 했다.
한 번에 더 긴 거리를 이동하지만,
일정이 반나절 가까이 더 줄어들었다.
하지만 멕시코시티에서 한 번 더 비행기를 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으으··· 너무 힘들어요. 대리님이랑 과장님이 각오해야 한다고 했던 말이 뻥이 아니었어.”
“엉덩이가 쪼개질 것 같아요. 어떻게 매번 이렇게 다니실 수 있어요?”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벌써 돌아가는 게 걱정될 정도예요.”
상기된 표정으로 비행기에 올라탔던 직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파김치가 되어서 흐느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걸 본 다미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갔다.
“벌써 녹다운되면 안 돼요. 여기서 한 시간 정도 더 차 타고 들어가야 해요.”
“흐에에엑!”
“그나저나 호르헤는 어딨는 거지? 마중 나온다고 하지 않았나?”
“저기 계시네요.”
다미안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사이에 살이 더 쪄버린 호르헤가 보였다.
하지만 예전처럼 혼자 나오지는 않았다.
그의 좌우로는 선글라스를 쓴 여섯 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준비한 차도 무려 네 대였다.
우리 일행이 나까지 일곱이니 한두 대로 움직이는 게 어렵긴 했다.
“어서 오십쇼. 회장님.”
“호르헤. 이제 슬슬 다이어트 좀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다가 벌어놓은 돈도 못 써보고 훅 가요.”
“그러게요. 안 그래도 고민 중입니다.”
호르헤는 40인치는 가뿐히 넘을 것 같은 자신의 허리와 배를 바라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멕시코 사람답게 진지함은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그리고 능글맞게도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여기 있는 보디가드들이 회장님이 멕시코에 계시는 동안 경호를 맡을 테니 안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섯 명 모두요?”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지만,
곰곰이 따져 보니 꼭 그렇지는 않았다.
여기서 보호해야 할 대상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직원들까지 고려해야 했다.
“네, 제가 고용한 회사가 미국계 업체 사람들이라 믿으셔도 됩니다.”
원래 납치 같은 범죄는 외부 사람보다 내부의 사람이 더 위험한 법이다.
내통하는 이가 있으면 아주 손쉽게 낚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어서 이동하죠. 시선이 많이 쏠리네요.”
공항에서 영접받는 것은 적응되지 않았다. 더구나 평범해 보이지 않는 덩치 큰 남자들과 아시아인의 조합은 독특했다.
당연히 지나는 이들의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차에 올라탄 우리는 곧장 테킬라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내가 탄 차에는 운전기사와 다미안 그리고 호르헤가 탔다.
뒷자리에 앉은 나는 그동안의 일을 가볍게 보고 받았다.
“이번에 멕시코에서 한국으로 보내는 직원들은 정해졌나요?”
“네, 인적 교류 프로그램에 적합한 이들로 선정해놨습니다.”
“그중에 혹시 호르헤와 호세의 가족도 있습니까?”
“친척 두 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를 마쳤던 사항이라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들이 한국에 오면 호세 아래에서 일을 배우게 될 예정이었다.
그룹 간의 인적 교류는 중요하다.
이미 멕시코에는 한국에서 파견을 나와서 일하는 직원이 둘이나 있었다.
그들은 단기 연수가 아니라 최소 2년 이상 관리직으로 일할 예정이었다.
한국 직원들은 나의 눈과 귀다.
예전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나 돈 레오넬의 덩치가 엄청나게 커진 탓에 안전장치 하나쯤은 둬야 했다.
호르헤도 그걸 모르진 않았다.
다행히 그는 이런 걸로 내게 섭섭함을 토로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초심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4년이란 기간과 돈 레오넬의 매출.
두 가지 조건을 보면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진짜 나의 눈과 귀는 직원들이 아니라 요정들이다.
보이지 않는 감시 카메라 같달까.
판초가 직접 연락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올 때마다 향이를 통해서 체크는 할 수 있다.
“이번에 연수 온 직원들 잘 부탁해요.”
“오히려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이렇게 한번 오실 때마다 효율적으로 바뀌니 놀라울 뿐입니다.”
연수가 우리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나라마다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가르쳐주고 나오는 것도 제법 많았다.
그룹 내에서 가장 변화의 폭이 빠른 곳이 오저당이고 우리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만들어낸 프로세스는 공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정제된 노하우는 오저당만의 DNA에 가까웠다.
한동안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중.
마을 입구가 보이자 호르헤는 곧장 증류소로 갈 건지 아니면 숙소부터 들릴 건지 내게 물었다. 나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증류소를 택했다.
“일단 이번에 출시 준비 중인 돈 레오넬 퍼플 라벨부터 보러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