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도 맞들면 낫다 (2)
오저당이 가진 여러 특징 중.
라벨이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크다.
한국과 멕시코에서 나오는 스프라이트 컬렉션은 많은 마니아를 보유 중이다.
매년 라벨 디자인을 바꾸는 것도 수많은 수집가의 관심을 제법 많이 받았다.
많이 모은 이들은 벌써 십여 가지에 달하는 오저당 보틀을 수집했을 정도다.
심지어 빈 병만 파는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 돈 레오넬이 그렇게 거래됐는데 미국을 제외하면 아직 그리 넉넉하지 않게 물량이 풀리고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라니가 작업을 마쳤으나 미국의 스퍼와 스코틀랜드의 킬트는 아직 대기 중이다.
두 곳 모두 제품 출시는 내년쯤은 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저당의 보틀에는 공통점이 있다.
숙성을 해서 내놓는 대부분의 증류주는 화이트-퍼플-옐로우-블랙 순서로 퀄리티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연히 돈 레오넬도 거기 포함된다.
3개월 숙성해서 내놓는 레포사도는 당연히 화이트 라벨이고 1년 숙성하는 아네호 등급은 퍼플로 구분할 예정이다.
그 이상은 아직 계획이 없었다.
솔직히 더 숙성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3년 이상 숙성해서 엑스트라 아네호 등급을 만들어도 과연 그게 팔릴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소비층은 레포사도에 포진되어 있는 편이다. 아네호는 그나마 취향이 스트레이트인 이들이 많이 마신다.
하지만 엑스트라 아네호는 애매했다.
더 오래 숙성했으니 풍미가 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만큼 테킬라 특유의 향은 희미해진다는 거지.
‘그걸 마실 바에는 위스키를 마시지.’
더구나 우리에겐 요정이 있다.
1년도 이미 충분하다 못해서 너무 과하게 숙성된 느낌마저 들 정도다.
하지만 등급을 받으려면 기간을 지켜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돈 레오넬의 테킬라는 레포사도와 아네호가 아니라 태생부터 엑스트라 아네호라 봐도 된다.
오죽하면 테킬라만의 향을 어떻게 지키느냐가 문제였을 정도였다.
“휴우··· 이거 긴장되네요.”
호르헤는 증류소에 도착하자 곧장 퍼플 라벨을 꺼내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미 보틀과 라벨은 준비를 마쳤기에 일부 수량은 병입을 마친 상태였다.
내 앞에 놓인 빈 잔에 따라진 돈 레오넬 퍼플 라벨은 꽤 진한 갈색이었다.
확실히 오크통에서 제법 오래 숙성한 덕분에 기존의 화이트 라벨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예전에 제가 왔을 때 맛봤던 수준만 유지했으면 문제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잔을 들려고 할 때.
나보다 먼저 향이가 술잔에 매달렸다.
그 상태로 돈 레오넬의 맛을 봤는데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만의 평가를 내놨다.
[이건 무조건 합격이죠!]
반박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곧 나도 녀석의 말에 동의했다.
이 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건 반칙에 가깝다는 생각이었다.
아네호 등급 중에 이 정도 수준의 테킬라가 과연 있기는 할까.
아니 수십만 원에 달하는 고급 테킬라도 퍼플 라벨과는 견줄 수 없었다.
고작 1년 숙성한 것이나 이 바닥은 위스키와는 다르게 20년 가까이 숙성하는 그런 경쟁자가 없다.
그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잠시 여운을 느끼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나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던 호르헤가 어떤지 물어봤다.
“어떻습니까?”
“숙성이 잘됐네요. 아네호 등급인데도 레포사도처럼 테킬라 향이 살아 있어요.”
“다 같이 꽤 오랫동안 고민해서 만든 공법인데 효과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괜히 돈 레오넬의 퍼플 라벨이 이렇게 오래 걸린 게 아니다. 처음 한두 해는 빚는 족족 팔려나가니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테킬라 특유의 향을 어떻게 남기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
호르헤는 정말 많은 방법을 써가며 해결책을 찾아야 했고 긴 시간을 거쳐서 이제야 겨우 제품이 나올 수 있게 됐다.
이 문제를 해결한 이는 미국에 있는 케이티였다.
파사데나의 신제품 연구실.
그곳을 세운 목적이 이뤄진 것이다.
화학 실험실처럼 꾸려진 연구실에서 찾아낸 해결책은 최신 과학 기술이었다.
그걸 적용한 덕분에 퍼플 라벨이 완성될 수 있었다.
아주 좋은 사례였다.
이번 일 덕분에 신제품 연구실과 각 나라의 디스틸러 사이에 프로젝트 진행이 하나둘 시작되고 있을 정도였다.
“현재 병입된 수량이 몇 병 정도 되죠?”
“회장님 확인을 받고 시작하려고 준비 중이어서 아직 100박스가 안 됩니다.”
“곧장 병입 시작하죠. 이번에 출시와 동시에 30만 병이 나가는 거 맞죠?”
“네, 그런데 정말 99달러나 받아도 될까요?”
기존에 팔던 화이트 라벨의 가격은 35달러다. 그런데 이번에 출시할 퍼플 라벨은 무려 99달러로 정해졌다.
호르헤는 그걸 조금 염려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도 저렴하다 여겼다.
테킬라 중에 탑 클래스라 손꼽히는 곳에서 내놓는 비슷한 등급 중에는 200달러가 넘어가는 것도 허다했다.
그런데도 99달러를 받는 이유는 업계 1위까지 노려보기 위한 도전장이다.
현재 돈 레오넬은 테킬라 시장에서 4위에서 5위 정도까지 올라갔다.
여기서 1위까지 가려면 무려 7배 이상의 매출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 부동의 1위는 세계 시장에서 30%나 차지 중이다.
아직도 매년 성장하는 중이라 쉽게 볼 수 없는 상대였다.
“레오넬 어르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돈 레오넬로 업계 1위 찍어봐야죠.”
“상상만 해도 좋네요. 그런 날이 온다면 상당히 기뻐하실 겁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계속하다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셔야 할 텐데요.”
돈 레오넬을 파신 레오넬 할아버지는 건강이 썩 좋지 않았다. 당시에 수술은 성공했으나 연세가 너무 많으셨다.
이런저런 잔병치레를 자주 하고 계셨고 언제 합병증이 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시간이 그리 많진 않았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오저당에서 마련해준 대궐 같은 저택에서 가사 도우미와 간호사까지 거느리고 호화롭게 지내고 계시죠.”
“부족한 게 없는지 잘 살펴봐 주세요.”
예전에 우리가 인수할 때 12만 달러를 받으셨지만, 그것만으로 그런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어렵다. 수술비로 쓰인 돈만 하더라도 상당했었다.
호르헤에게 듣기로는 정작 손에 쥐고 계신 것은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OGD 멕시코를 통해 추가로 재정적인 지원을 해드렸다.
돈 레오넬만으로도 매년 7천만 달러 이상을 남기고 있으니 아깝진 않았다.
오히려 그게 마음이 편했다.
레오넬의 처지를 알면서도 입을 닦으면 날강도 소리나 듣게 되고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인심까지 잃을 수 있다.
지역 사회를 위해 매년 꽤 큰 돈을 쓰는데 헛수고가 되면 아깝잖아.
많은 돈이 들어가진 않았다.
몇억 정도만 줘도 한국에서는 엄두도 나지 않을 대저택을 구할 수 있다.
거기에 인건비도 싸서 여생을 여유롭게 사셔도 부담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오래가진 않았다.
벌써 호르헤는 퍼플 라벨의 병입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생각에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호르헤는 곧장 직원들부터 불렀다.
우리가 오기 전에 이미 준비는 다 마친 상태라 따로 준비할 것은 없었다.
그때부터 돈 레오넬은 완성된 퍼플 라벨을 쏟아내기 시작했기에 일하는데 방해되지 않게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판초와 함께 테킬라 사이를 날아다니는 향이가 보였다.
녀석은 마치 시찰 나온 감독관 같았다.
요정들을 몰고 다니며 현재 숙성 중인 테킬라를 하나씩 확인하고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확실히 판초도 많이 성장했네.’
처음에 봤을 때와는 꽤 달라졌다.
그때보다 덩치도 더 커져서 이제는 거의 향이와 비슷한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향이처럼 말을 하진 못했다.
아마도 한계점이란 게 있는 것 같았다.
대신 돈 레오넬에도 하급부터 시작해서 어느덧 상급 요정까지 하나 나타났다.
그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
이곳의 상급 요정이 가진 능력이 착향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구실에서 개발한 방법과 맞물린 덕분에 효과가 훨씬 더 좋아졌을 거다.
당연히 요정의 숫자도 늘었다.
현재 돈 레오넬의 생산량은 매달 110만 병에 달할 정도로 매우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그게 이곳의 한계는 아니다.
아가베를 충분히 확보할 경우.
최대 200만 병까지도 빚을 수 있다.
그 정도면 테킬라 업계에서 잘하면 3위 자리까지도 넘볼 수 있을 것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돈 레오넬의 직원들을 본 다미안은 그사이에 숫자가 더 늘어난 것 같다며 놀라워했다.
자동화 설비는 한국보다 부족하나 인력으로 빈틈을 채우고 있었다.
“인력 하나는 정말 부럽습니다.”
“인건비가 저렴하니 그렇죠. 저는 아직도 이 사람들 월급이 실감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꽤 많이 받는 편이라 만족도가 꽤 높다잖아요.”
다미안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지난해 발표된 멕시코 평균 월급보다 생산직에 해당하는 오저당 직원의 월급이 두 배쯤은 많다.
그래봐야 80만 원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극소수의 관리직은 한국 연봉 기준으로 받는 중이다.
예를 들어 재무를 책임지는 직원은 300만 원 이상을 받는데 그 정도면 정말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수준이다.
한때 미국에서 일하던 재택근무자들이 멕시코로 이주한 이유가 있었다.
생활비의 차이가 엄청났다.
그러고 보니 미국의 파사데나 전체 임금을 놓고 보면 멕시코와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확인할 생각은 없었다.
‘괜히 속만 쓰리지.’
그러는 사이 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멕시코 직원들이 품질 검수를 마친 후에 박스에 넣기 시작하자 나는 그중의 하나를 꺼내서 살펴보았다.
“올해 라벨이 지금껏 만든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드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호르헤에게 말해서 퍼플 라벨 네 박스만 뉴욕으로 곧장 보내달라고 해주세요.”
“카를로스를 만나시기 전에 도착하면 되는 건가요?”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출장을 떠나며 카를로스에게 퍼플 라벨이 나온다고 미리 알려줬다.
당연히 그는 곧장 제품부터 확인하고 싶다며 멕시코까지 날아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카를로스가 여길 오면 안 된다.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가 퍼플 라벨의 생산 수량을 파악하게 되면 다 쓸어가려고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 나오는 퍼플 라벨은 순차적으로 세계 각국에 나눠서 보낼 생각이다.
아마 이걸 맛보면 서로 물량을 달라고 난리가 날 것이다.
충분히 그럴만한 퀄리티의 술이다.
이미 돈 레오넬 자체의 명성도 꽤 높아진 터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텃밭인 미국을 홀대할 수는 없기에 적어도 절반쯤은 줘야겠지.
‘물론 그만큼 뜯어낼 생각이기도 하고.’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절반이나 가져가려면 대가가 있어야지.
이번 기회에 굿밤과 감저에 대한 대규모 프로모션 정도는 기본으로 받고 딜을 시작해도 될 것이다.
돈 레오넬의 파급력을 생각해 봤을 때.
카를로스는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 내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돈 레오넬로 그가 얻은 이익은 상당했다.
지난해만 800만 달러 넘게 번 것으로 알고 있다. 한화로 110억 원이 넘어가는 돈이니 작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게 다 카를로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나 수십 곳의 바크모 스토어는 우리가 먹여 살렸다고 봐도 무방했다.
거기에 벽향주와 감저 같은 술까지 합치면 금액은 훨씬 더 높아진다.
벽향주만 하더라도 지난해 미국에 수출된 양이 150만 병에 달할 정도였다.
이미 OGD 그룹은 바크모의 수많은 협력사 중에서도 이제 A급으로 분류되기 충분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그러면 원래 예정대로 항공권을 끊을까요?”
“네, 사흘 뒤에 출발하죠. 아! 그리고 카를로스 비서랑 통화해서 미리 약속 잡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최종 확인 전이었기에 혹시 몰라 따로 약속을 잡아 놓지는 않았다. 내가 직접 맛을 보고 개선할 점이 있었다면 공개 전에 그것부터 해결해야만 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