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이 새로웠다 (1)
오뚝하게 솟은 코.
호수같이 깊은 눈망울.
심지어 얼핏 보이는 보조개까지.
제법 큰 키와 날씬한 몸매는 덤이었다.
어디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 하나하나가 모여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평소 이상형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으나 아마 이런 모습 아니었을까.
내가 잠시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
당연히 저쪽에서도 나를 발견했다.
잠시 눈이 마주친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은 여신 그 자체였다.
누가 봐도 그렇게 느낄만한 미소였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 아는 것 같았다.
하긴 RJ의 옆집에 누가 사는지 여기 오는 사람치고 모르는 이는 없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마저 이러면 반칙이지.
약간 저음이라 듣기 편한 느낌이었다.
잠시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것을 간신히 부여잡은 나는 누가 봐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 숙여서 인사했다.
그와 동시에 살짝 후회됐다.
하필 오늘 같은 날에 만날 게 뭐야.
어제 선배와 함께 과하게 달린 탓에 지금 몰골이 정상은 아니었다.
아침에 씻고 나오기는 했지만,
눈은 살짝 충혈되어 있었고 헤어 스타일도 평소보다 조금 볼썽사나웠다.
라니가 평소에 신경 써서 입고 다니라고 할 때 말을 들을 걸 그랬어.
그렇다고 쓰레기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이번 출장은 협회에서 미팅을 하는 자리라 나름 깔끔하게 입은 상태다.
남이 볼 때는 어떨지 몰라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옆집에 사는 주도찬이라고 합니다.”
“오빠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저에 대해서요?”
무슨 말을 했다는 걸까.
아니, 그 이전에 RJ와 무슨 사이일까.
오빠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여동생은 확실히 아니었다.
바로 옆집에 사는 RJ다.
가족이 몇 명인지는 예전에 말해줘서 알고 있었고 RJ가 이사 온 뒤에 형네 부모님도 며칠 동안 머무르셨다.
그렇다고 스태프는 아닌 것 같았다.
복장만 봐도 이제는 구분이 가능하다.
더구나 메이크업과 코디 같은 스태프가 남자 아이돌 집에 혼자 오진 않는다.
결정적으로 스태프가 올 때마다 동행하는 매니저의 차량도 보이지 않았다.
마당 안에는 RJ의 차와 함께 처음 보는 꽤 고가의 승용차 한 대가 전부였다.
‘혹시 여자친구?’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잠시 그런 심란한 심정을 숨기고 있는 사이에 다시 한번 현관문이 열렸고 배드민턴 채를 손에 쥔 RJ가 나왔다.
“오늘은 오라버니가 배드민턴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어! 도찬아 너 출장이라더니 언제 온 거야?”
“방금 돌아왔어요.”
“둘이 처음 보는 거지? 여기는 내 사촌 동생인 이연우고 이쪽이···.”
그 뒤에 RJ가 뭐라고 말했는데 솔직히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촌 동생’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마침 잘 됐다. 도찬이 네가 공정하게 심판을 봐줘.”
“일하다가 돌아오신 것 같은데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우리끼리 쳐요.”
“네 저질 체력으로는 내 상대가 안 되잖아. 그리고 우리는 저번에 못다 한 승부를 봐야 해.”
나는 그 제안을 냉큼 받아들였다.
옷만 갈아입고 나오겠다고 대답을 한 뒤에 집으로 들어갔으나 정작 옷장 앞에 서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멋지게 입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트레이닝복을 입을까?
내가 한동안 결정을 못 하고 머리를 부여잡고 있자 보다 못한 향이가 코칭을 해줬다.
[뭘 고민해요. 그냥 편하게 입어요. 나가서 어색하게 굴지 말고요!]
“그렇게 어색했어?”
[네, 자신감을 가지세요. 아자아자!]
이제는 요정에게 연애 코칭을 받아야 한다니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연애를 한 게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다.
마지막 데이트가 도대체 언제더라.
최소 8년 이상은 된 것 같았다.
와··· 생각해 보니 엄청 오래됐네.
그래도 모태 솔로는 아니었으니 내년에 마법사가 될뻔한 위기 상황은 아니다.
어떻게든 다 죽어버린 연애 세포를 되살리는 것부터 해야겠지.
어쨌든 향이의 도움은 꽤 컸다.
재빨리 편한 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자 이미 RJ와 연우 씨는 배드민턴을 치며 몸을 풀고 있었다.
마당에 깔린 잔디 위에 있는 두 사람은 한 폭의 그림 같은 느낌이었다.
잔디까지는 필요 없다는 것을 수호가 우겨서 심은 건데 그 말을 듣길 잘했다.
“이제부터는 도찬이가 카운터 좀 해줘.”
그때부터 나는 두 사람이 온갖 반칙을 곁들여가며 치열하게(?) 겨루는 배드민턴 게임의 점수를 세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 외로 일방적인 게임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운동 신경이 꽤 좋은 건지 연우 씨의 실력은 제법 훌륭했고 중간중간 내가 내리는 편파 판정도 한몫해주었다.
당연히 RJ도 그걸 알고 있었으나 아주 살짝 항의 정도만 하고 그만뒀다.
“아자! 21:18로 RJ 선수의 승리!”
“치잇··· 한 판 더 해요.”
“너는 잠시 쉬고 다음 선수는 주도찬! 우리는 설거지 내기하는 거 어때?”
“설거지요?”
“저녁은 우리 집에서 먹자. 연우가 직접 요리해주기로 했거든. 참고로 저 녀석 프랑스에 유학까지 다녀온 요리사야.”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요리사라니 생각지도 못했다. RJ가 저녁 식사에 나를 초대해도 괜찮냐고 묻자 연우 씨는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만들어서 먹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모처럼 실력 좀 발휘해야겠어요.”
그렇게 말한 뒤에 그녀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RJ의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RJ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5분만 쉬었다가 하자. 요즘 댄스 연습을 안 해서 그런가 간만에 뛰었더니 힘드네.”
“저는 형네 집에서 나오길래 숨겨놓은 여자친구인 줄 오해할뻔했어요.”
“예전에 저 녀석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지. 심지어 스캔들까지 날뻔했어.”
그런 오해가 괜히 생기진 않았겠지.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외모니 어느 정도는 이해됐다.
“그리고 내가 설마 애인을 숨겨 놓고 만나겠어? 그런 사람이 있으면 너한테 먼저 소개해줬을 거야.”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RJ가 월드 스타인 것이 부럽다기보다 안타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유명한만큼 인생에서 손해 보는 부분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돈과 명성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돈을 택할 것이다.
누군가는 돈을 경멸할 수도 있으나 돈에 인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쓰냐에 따라 달라진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도 마찬가지야. 연우는 내가 정말 아끼는 동생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라면 무조건 오케이니까. 잘 해봐.”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시치미를 떼려고 했지만, RJ는 웃으며 배드민턴을 치는 내내 보였던 내 모습을 묘사해줬다.
턱을 살짝 내리고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을 흉내 내자 향이는 자지러졌다.
완전히 취향 저격당한 것 같았다.
“눈빛만 봐도 알겠던데. 미동도 없이 바라봐서 연우 얼굴 뚫어지는 줄 알았다.”
내가 정말 그랬나?
아니라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오죽하면 향이가 고개를 저으며 RJ의 말에 동의할 정도였다.
[이그이그··· 너무 티 났어요.]
향이마저 RJ의 말에 동의했다.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왜 이러는 건지 모를 정도로 신기한 일이었다. 성근 선배가 어제 술을 마시며 했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살면서 한 번쯤은 그런 일이 있을 거라 했을 때는 믿지 않았던 나였다.
내 또래의 여자를 많이 만난 것은 아니나 할리우드 파티도 몇 번이나 가봤다.
훨씬 더 예쁜 여배우도 봤으나 그런 느낌은 오지 않았다.
“앞으로 매제라고 불러줄까?”
“아···쫌! 알아서 할 테니 옆에서 너무 티 나게 그러지 마요. 그게 더 안 좋아요.”
“아니라고는 안 하네.”
“그런데 사촌 동생의 남편한테도 매제라 부르나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였다.
애초에 일가친척이라고는 삼촌밖에 없는 것도 한몫했다. 어릴 때부터 호칭 같은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10대 때는 미국에서 살았기에 영어 단어가 더 먼저 떠올랐다.
“매제 아닌가? 어쨌든 연우는 당분간 우리 집에서 머물 예정이야. 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최선을 다해봐.”
“얼마나 머무는데요?”
“대략 한 달 정도 되려나. 자기 이름을 걸고 식당을 차릴 예정이라 다음 달부터는 서울로 올라가서 준비할 것 같아.”
프랑스 유학을 마친 후에 현지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경력도 쌓고 돌아왔다며 RJ는 동생 자랑을 쉬지 않고 했다.
그러나 그게 허풍은 아니었다.
배드민턴을 치며 땀을 뺀 뒤.
샤워까지 마치고 RJ의 집으로 가니 진수성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스토랑의 풀코스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와··· 이거 정말 맛있어요.”
심지어 맛도 무척이나 훌륭했다.
내가 RJ의 사촌 동생에게 한눈에 반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라니와 함께 RJ의 공연을 보기 위해 파리에 갔던 적이 있다.
그때 티켓을 구해준 구지노 배우에게 감사의 의미로 제법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대접했는데 그에 못지않았다.
어느 곳에 식당을 차릴지 모르겠으나 장사가 안될 거란 걱정은 안 되었다.
“호호. 감사해요.”
“그거 알아? 네가 있으니 이렇게 차려준 거지. 얘 집에서는 거의 요리 안 해.”
“오빠! 조용히 드시지요.”
“참고로 연우가 도찬이 너보다 두 살 어려. 그러니까 올해 스물일곱 맞지?”
“여자의 나이를 그렇게 함부로 밝히면 어떻게 해요. 그러니 아직 연애도 제대로 못 하고 있지.”
사촌 관계인 두 사람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친남매 같은 사이였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미소를 짓고 있자 연우가 왜 그렇게 웃냐며 물어봤다.
“저는 형제자매가 없이 자란 외동이거든요. 그렇다고 연우 씨처럼 예쁜 사촌 동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삼촌이 일찍 결혼했으면 모르겠는데 아직도 별다른 소식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아예 가망이 없진 않았다.
최근 F&B에서 일하는 선배들이 해준 이야기를 들어보면 1호점 지점장에서 승진한 이옥주 이사님과 뭔가 있었다.
“연우도 혼자야. 그래서 어릴 때부터 고모가 우리 집에 자주 데리고 왔지.”
셋 다 외동이고 해외에서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살았던 공통점이 있었다.
물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RJ는 의외로 해외에 유학을 간 적이 없었다.
하지만 활동을 할 때는 국내에 있는 시간보다 해외에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사우디 같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곳까지 다녀온 RJ가 가장 경험은 많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날 저녁 식사는 꽤 재미있었다. 잠시도 대화가 멈추지 않을 정도였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에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스마트폰을 꺼내서 확인하니 미국에 있는 카를로스의 전화였다.
마음 같아서는 끊은 뒤에 나중에 통화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가능하면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았으나 이 시간에 나한테 직접 전화를 한다는 것은 꽤 중요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컸다.
대부분의 소소한 사무적인 것들은 다미안과 비서들끼리 정리하는 편이다.
어쩌면 저번에 제안한 수매권에 관련된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이야기 중에 죄송한데 중요한 전화인 것 같은데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사업하는 사람인데 그 정도는 이해해줘야지.”
다이닝룸에서 나와 거실로 향한 나는 끊어지기 전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피곤한 느낌이 가득한 카를로스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잘 시간 아니지?]
“거긴 출근 시간도 되기 전인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요?”
[인수합병 때문에 밤새워서 회의하느라 정신없어.]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더니 역시 물밑으로 뭔가 진행되고 있기는 했다.
잠시 내게 하소연을 하던 카를로스는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줬다.
[저번에 말한 조건 그대로 아가베 수매권 대부분을 OGD에 넘길게.]
“갑자기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 자식들이 우릴 호구로 보고 있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후려치려고 해서 며칠 동안이나 실랑이했거든. 괘씸해서 마지막 카드였던 아가베 수매권은 안 넘겨주려고. 얼마나 필요해?]
카를로스의 목소리는 격앙된 상태였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 꽤 자주 만났는데 이런 모습은 처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만큼 지금 진심으로 빡쳐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오~ 예!’
나야 장단 좀 맞춰주고 카를로스의 수매권만 가져와도 이득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수매권 하나만 걸린 것이 아니다.
그걸 가져오는 순간부터 아가베 농장과 거래를 틀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어차피 이제 카를로스의 손에서 떠난 증류소이니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우리가 직접 농장과 계약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농장 입장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농작물만 키워내면 파는 수고는 덜 수 있는 계약이니 나쁜 일은 아니다.
기존 계약보다 약간만 더 쳐줘도 오히려 반길 것이다.
“다 가져갈 테니 최대한 많이 주세요.”